셀 사역

제목12월 9일 대강절 두 번 째 주일 사역2024-04-23 16:54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이번 성탄절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430장 :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  나는 예배자입니다.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생각하는 신앙을 가지라
● 본문 : 갈라디아서 1:6-9
1)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이 ‘속히’ 배교한 이유를 오늘의 설교에 근거하여 말해보자.
⓵ 갈라디아 지역에 만연했던 종교적인 정황과 관련하여 설명해 보자.
⓶ 바울에게 복음을 들은 이후에 아쉬웠던 점과 관련하여
⓷ 결론적으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부족했던 점은?  

2) 생각하지 않는 얄팍한 신앙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은?
⓵ 설교 주제와 연관하여
⓶ 위의 결과에 따른 필연적 위기는?  

3) 적용하기
⓵ 생각하는 신앙의 정수는?
⓶ 영적 훈련의 멈춤에 따른 긴박함을 두려워하라
⓷ 2018년 더 많이 생각하고 사유하는 교회, 성도가 되도록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 주간 중보 제목

1) 사무총회 준비가 잘 이루어지도록
2) 성탄절 교회 사역( 새벽송, 성탄절 예배의 승리)을 위하여
3) 송구영신 예배가 은혜롭게 진행되도록
4) 셀 사역의 유종의 미를 위하여
5) 부교역자 청빙을 위하여
6) 담임목사의 건강과 사역을 위하여

● 셀 사역하기

1) 2018년, 지역 셀 사역 마무리 잘 하기
2) 2019년 지역 셀 사역에 순종하기
3) 피선교지에 격려하며 인사하기
4) 셀 원들의 기도제목 파악하여 송구영신예배 때 중보 내용으로 올리기 독려
5) 재정 감사 완료
  

 
설교요약 (SUMMARY)
설교 요약

본문: 갈라디아서 1:6-9
제목: 생각하는 신앙을 가지라

사람들이 왜 조그마한 일에 흥분하고 넘어지는가? 삶의 철학이 없기 때문에 넘어집니다. 삶의 철학이 없다는 것은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가벼움을 갖고 인생의 여정에서 추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의 비극은 철학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철학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아주 이상한 선입관이 있습니다. 점쳐주고, 작명해 주고, 사주팔자를 봐주는 그런 미신 같은 것들의 직업을 떠올리는 선입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철학은 인간이 추해지지 않게 해주는 바람막이와 같은 대단히 중요한 학문입니다. 철학의 과정은 생각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의 내용은 사유를 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전 세계에 최대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 러시아, 중국이라는 나라의 수장들이 공동의 선을 이루어야 한다는 글로벌한 상식의 철학이 없는 자들이 통치하는 철학 말입니다. 어떤 비극이 이 지구상에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쳐집니다. 사정이 이렇게 긴박한 데도 일부 지도자들의 자국의 경제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데 혈안이 되어 전 세계인들이 공히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공생의 철학을 헌 신짝 벗어던지듯 내 던지며 무감각하게 방관하고 있지 않습니까? 철학적 사고가 끊긴 세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사실은 앞으로가 더 걱정이 되는 것은 저만의 소회가 아니라 많은 지성인들이 공히 염려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철학적인 사고 구조는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좁게는 개인적으로 대단히 중요한데 이런 공식은 신앙인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는 점에서 오늘 설교를 시작됩니다. 철학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라. 말을 던지고 보니 조금은 낯 설은 느낌이 있어 언급한 위의 문장과 가장 가까운 문장으로 이렇게 다시 바꾸어보겠습니다. “생각하는 신앙을 가지라”
생각하지 않는 신앙은 정말로 비극을 넘어 재앙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권면은 오늘 우리 세인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는 모든 지체들에게 백번을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본문 6절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이 구절에서 주목할 단어를 발췌하겠습니다. ‘속히’입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은 이 단어를 ‘quickly’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재빠르게’입니다. ‘재빠르게’라는 이 부사는 해석하면 이렇게 바꾸어도 무방합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렇다면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유대로부터 내려온 거짓 교사들이 전하는 할례라는 다른 복음에 대하여 별로 생각하지도 않고 받아들여 배교라는 카드를 꺼내들면서까지 거기에 함몰되었다고 해석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계속 강조했던 것처럼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별로 생각이 없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내 버린 꼴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왜 복음에 대하여 이렇게 가볍게 대우했을까요? 생각하지 않는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신앙은 이런 비극을 초래합니다.
※ 생각하지 않는 신앙은 믿음의 주체가 아닌 객체에 관심을 갖게 만듭니다.
갈라디아 지방에는 생각보다 회당이 많이 존재했습니다. 제가 4년 전에 둘러보았던 바로 이 지역 갈라디아 지역만 해도 회당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음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고니온에서도 바울은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루스드라, 버가에서도 성경에 직접적인 언급이 없어 확언할 수는 없지만 전례를 참조한다면 회당에서 사역했을 개연성이 농후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긴장감이 이들 지역에서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만들어진 유대인의 회당에서 유대교적인 율법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이방인들이 상당수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갈라디아 여러 곳에 산재되어 있었던 회당에서 진행되던 유대 율법적인 종교의식에 참여한 소위 말하는 이방인이었지만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고, 그 결과 그들은 적지 않은 갈라디아 회당 종교의 재정적인 지원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유대 회당을 유지하고 이끌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무시하지 못 할 고객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느 한 순간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어떤 이유때문인가요?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울의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 사역을 사도행전 13장에 누가가 세밀하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무대로 잠시 들어가 보십시다. 13:14-41절에 보면 바울은 비시디아 회당에서 유대인의 역사를 아우르는 대단한 설교를 행하였음을 알려줍니다. 유대 역사를 비추어 해석한 예수 그리스도의 캐리그마에 관한 설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색다르고 신선한 메시지를 전하는 바울의 설교를 들었던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 있었던 자들이 사도행전 13:42-44절에서 다음과 같이 반응을 했음을 누가는 보고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비시디아 안디옥의 영적 기상도가 바뀌었음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 종교에서 기독교로의 탈바꿈입니다. 엄청난 반응이었습니다. 마치 혁명과도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비시디아 유대 종교 집행부는 이런 원인을 제공한 바울을  대단히 위험한 인물로 경계하기 시작했음을 계속 이어지는 사도행전 13:45절이 전합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이런 악연이 바울과 갈라디아 지방의 유대인들에게 쌓여 있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 회심한 자들에 의해 세워졌고 그 세력을 갈라디아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제는 든든한 교회 공동체로 서 가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는 유대 종교가 무시할 수 없는 종교적 대안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세력으로 서 가고 있었던 갈라디아 교회에 심하게 적대감정을 갖고 있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호시탐탐 갈라디아 교회에 대하여 공격할 시기와 방법에 골몰하였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바로 그때 같은 기독교 공동체인 예루살렘 교회에서 내려온 자들이 갈라디아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의 마음을 뻥 뚫리게 해 주는 좋은 소식을 벌이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지난 주일에 살폈던 할례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행간에 숨겨져 있는 기막히고 숨 가쁘게 펼쳐진 영적 대결이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이 바로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갈라디아에 살고 있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너무나도 고맙게 이 일을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이슈화시켰고 이게 웬 떡인가 싶어 그들은 사이드에서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하면서 쾌재를 불렀을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이 논쟁이 수면 위로 부상하자 생각 없이 기독교로 개종했던 유대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잊고 있었던 할례의 종교성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고 거기에 맞물려 이방적인 그리스도인들 역시 대중적인 심리에 속절없이 넘어가 다시 유대교에서 정한 율법적 종교로  개종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줏대 없이 갈라디아 지방에 살고 있던 자들은 배교를 서슴지 않았을까요? 이 주석을 통해 우리들이 주목해야 하는 영적 교훈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교훈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신앙의 결론은 항상 종교적 행위라는 객체에 함몰된다는 교훈입니다. 진짜로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주체적인 내용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그 예수와 전혀 상관이 없는 종교적 행위와 상징에 불과한 객체들에게 집중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신앙은 항상 주객이 전도되는 비극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주체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객체인 종교적인 행위에게 떠밀려가기 때문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신앙, 고민하지 않는 신앙,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사유하지 않는 신앙은 언제든지 이런 천박한 아류의 집단으로 급전직하할 수 있다는 교훈을 말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 안에서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회심했던 자들이 할례 논쟁에 휘말려 다시 배교하며 유대 율법적 종교로 그렇게 속히 (빠르게) 돌아선 이유의 배경을 추적하면 바울이 떠난 이후 그들을 생각하는 신앙으로 성숙시킬 영적 지도자의 부재 그리고 연이은 트레이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에서 착념하고 지속적으로 이어나가야할 사역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신앙의 주체라는 사실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훈련이며 생각하게 하는 신앙의 훈련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아프게 다가오는 현장 목회의 쓰라림이 있다면 그것은 목사는 물론 성도들이 언제부터인지 생각을 멈추었다는 절망감입니다. 생각하는 자는 자기를 성찰합니다. 자기를 성찰하는 자는 나를 성숙한 자로 만들어 나갑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신앙의 성찰은 신앙의 주체이신 주군께 향하는 목적을 견고하게 할 것이며, 결코 신앙의 비본질적인 양태에 눈을 돌리지 않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본문에 기록된 대로 속히 혹은 재빠르게 자기의 유익을 따라가는 얍삽한 믿음을 갖지 않고 든든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것입니다.
로마서 8:18절을 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은 고난의 사람이었습니다. 죽을 고비를 얼마나 넘겼는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당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본인에게 나타날 영광을 생각해 보니 그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것을 바울이 본인에게 주어질 ‘영광’(헬라어 ‘독사’의 번역)과 고난의 상관관계를 ‘믿습니다.’가 아닌 대단히 중요한 것의 결과물로 고백한 산물이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생각해 본 결과라는 점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는 감정적인 산물이 아니었습니다. 영광의 도래는 ‘로기조마이’ 즉 ‘이성적으로 신중하게 심사숙고’한 결과였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소망하고 또 소망합니다.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생각하는 신앙이 멈추면 내 신앙의 성장도 멈춥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신앙의 주군이신 예수님 그리고 그 분을 주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