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12월 2일 주간 사역2024-04-23 16:54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가 세속적인 영역에 존재하는 것 중에 정말로 주님과 대적할 만큼 좋아하는 세상의 복음은 무엇인가?  

 
경배와 찬양 (WORSHOP)

● 복음성가: 우리 보좌 앞에 모였네
● 찬송가 459장: 누가 주를 따라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다른 복음은 매력적입니다.
● 제목 : 갈라디아서 1:6-9
1) 할례 논쟁에 대한 초대 교회사적인 흐름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나누어 보자.
①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할례 논쟁: 성서적 근거- 사도행전 15장, 갈라디아서 2장, 연대- 주후 47-48
② 갈라디아 교회의 할례 논쟁: 성서적 근거 – 본문 중심으로, 연대- 주후 53-55년 즈음 
③ 결론 – 할례는 구원의 조건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율법, 혹은 다른 복음   

2) 왜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이 할례의 유혹에 빠졌는가? (본문 설교의 주제와 관련하여)
① 획일성과 다양성에 대한 신학적인 조망을 해 보자.
② 성서적인 내증으로 : 마태복음 5:13-16절
③ 상황에 따른 신학적 정황으로: 달라스 윌라드, 김영봉 목사의 갈파와 연관하여  

3) 적용하기
① 다른 복음에 대한 단호함.
② 타협하지 말라.
③ 합리화하지 말라.  

 
사역하기 (WORK)
교회 주간 중보기도 제목

1) 12월 교회사역을 위해
2) 부교역자 청빙이 12월 중에 이루어지도록
3) 환우들을 위하여
4) 교회학교를 위하여
5) 한 주간 설교 사역을 돕는 이요한 전도사를 위하여
6) 담임목사 기도 주간의 중보

주중 사역

1) 재정 장부 확인하고 감사 준비
2) 이월금이 없도록 하고 남은 재정은 건축연보로.
3) 교회 행정적인 사역과 봉사에 모두가 협력할 것.
4) 사고 가정 파악하고 중보 할 것.
5) 사무총회 준비에 최선을 다해 합력할 것.
   

 
설교요약 (SUMMARY)
본문: 갈라디아서 1:6-9
제목: 다른 복음은 매력적입니다.
오늘 읽은 4개의 절수에 마치 경쟁이나 하듯 바울이 반복해서 언급한 단어가 눈에 띕니다.
‘다른 복음’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이렇게 같은 단어로 연속해서 매 번 기록된 ‘다른’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 성경을 보면 두 가지의 단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6절에는 ‘변질된 혹은 또 하나의 전혀 다른 ’으로 해석되는 형용사 ‘헤테론’이고 8,9절에서는 ‘반대 편’ 이라고 해석하는 전치사 ‘파라’라는 단어로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다른’이라고 표현한 이 단어들의 또 다른 의미는 ‘변질된 복음’ 혹은 ‘복음과는 정 반대의 거리에 있는 의미’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 개념들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의 ‘메시지’ 번역은 이 단어들을 조금은 더 리얼하고 과격하게 번역하고 있는데 설교에 도움이 되는 해석이라 소개합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의 ‘메시지’ 번역은 이 단어들을 조금은 더 리얼하고 과격하게 번역하고 있는데 설교에 도움이 되는 해석이라 소개합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메시지, 이질적인 메시지, 메시지라고 할 수도 없는 것, 하나님에 관한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메시지, p,510.)
바울보다 더 흥분된 모습으로 유진 피터슨은 다른 복음을 상대할 가치가 없는 메시지로 평가절하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상당히 과격하고 감정적인 표현으로 다른 복음에 대하여 경계하는 선언을 합니다. 이토록 과격한 발언을 하게한 다른 복음이란 정체의 파악입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를 통타했던 다른 복음은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기위해서는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된 내용들을 종합하여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후에 살필 5:2-3절을 먼저 읽어 보겠습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바울의 이 선언을 참고해 본다면 분명한 팩트가 하나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그것은 갈라디아교회에 할례에 대한 시비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전 설교를 통하여 전했던 것처럼 갈라디아는 지금의 터기 중부 지역과 일부 중남부 지역을 가리키는 광활한 지역입니다. 이 땅은 유대인의 관점으로 보면 철저한 이방의 땅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은 유대인들의 생활이나 문화, 관습과는 동떨어져 있거나 아니면 전혀 무관한 지역입니다. 문제는 이곳에 세워진 갈라디아교회에 유대인들이 종교적인 관습으로 행해졌던 할례 논쟁이 불거졌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설명될 수 있는 내증이 하나 있는데 후에 살필 갈라디아서 2:1-10절에 기록된 예루살렘 공회에서 열린 할례논쟁 총회의 증언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을 보면 바울이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일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때의 방문은 약간의 반대 의견이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방문을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이 세 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한 예루살렘 총회의 방문으로 연계하는 데 별 이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디도가 왜 예루살렘 총회에 올라갔습니까? 모든 교회의 모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교회와 이방 교회의모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수리아 안디옥교회 간에 치열한 대립 점에 있었던 할례 논쟁에 대한 끝장 토론을 위해서였습니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의 위클리프 칼리지에서 신약학을 가르치는 리처드 롱 에네커 교수의 주석을 참고하여 다음과 같은 연대기를 소개합니다. ① 통상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주후 30년 즈음으로 추측합니다. ② 바울의 회심은 그로부터 2-3년 정도 뒤인 32-33년 정도로 봅니다. 이 연대기를 전제하면서 갈라디아서 2:1절을 읽겠습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여기에 기록된 14년이라는 산술적인 숫자에 대하여 롱 에네커 교수는 바울이 회심한 시기를 기점으로 한다고 해석합니다. ③ 이 해석을 참고한다면 예루살렘에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할례 논쟁을 불식시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간 시기는 주후 약 46-47년 정도일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교회사적인 팁이 하나 있는데 바울과 바나바가 제 1차 전도여행을 떠난 시기를 주후 44년 정도로 보고 끝난 시기를 넓게 잡아 48년 즈음으로 본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수리아 안디옥 교회라는 이방 교회의 모 교회에서 두 사람이 선교사로 파송된 시기도 44년 즈음일 것입니다. 또 하나 알아야 할 지식은 제 1차 예루살렘 총회 즉 앞서 말씀드린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이 회의는 1차 전도여행이 끝난 뒤에 열린 회의였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약 주후 48년 이후라는 정보입니다. 이 정황을 총 정리하면 이런 도식이 결론적으로 도출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44년 정도에 수리아 안디옥 교회를 떠난 48년 정도까지 사역했던 제 1차 전도여행 시기에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의 제 문제에 대한 답입니다.
이 두 사람이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그들을 파송한 수리아 안디옥교회에 도착하자마자 대단히 분노하며 별로 쉬지도 못하고 약 480KM나 떨어진 예루살렘 교회로 급거 올라가게 된 이유는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이미 사도행전 15장과 갈라디아서 2장의 정보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할례 논쟁의 끝장내기 위해서라는 것을. 그렇다면 이런 정리가 가능합니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 이미 바울과 바나바가 없는 틈을 타 유대율법주의자들이 침투하여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완성한다는 다른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유린하고 있었다는 정보를 말입니다. 왜 제가 수리아 안디옥 교회어서 주후 47-48년 즈음에 일어났던 할례 논쟁을 오늘 이 시간에 소개했습니까? 이 논쟁은 단순히 수리아 안디옥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똑같은 할례 유용론이라는 율법주의와 다른 복음이 갈라디아 교회에도 똑같이 침투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기록 연대는 학자들마다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통상적으로 주후 53-55년 즈음으로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 교회에서 교인들이 술렁이고 또 급기야는 배교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한 할례 논쟁은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정도의 앞선 시기에 이방 교회에서 홍역을 치룬 일이었기에 바울의 분노를 더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총회에서 난 결론은 할례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방 모교회인 수리아 안디옥교회의 승리였고 바울과 바나바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채 10년도 안 지난 시기에 또 갈라디아 지방에 세워진 교회들이 이 일로 곤혹을 치루고 있다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도저히 참을 수 없게 거룩한 분노의 원인이요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분노로 인해 본문에서 대단히 과격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선포했던 것입니다. 본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저는 지금까지 오늘 본문을 자세히 주석했습니다. 왜 할례에 대한 다른 복음이 매력적이었을까요?
※ 획일성보다 다양성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13-16절을 해석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하는 구절은 당연히 이 대목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13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14절) 이 부분만 영어성경 NLT 번역으로 소개합니다.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13절)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14절) 이 선언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엄청난 선언이요 의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빠져 나갈 구멍이 보이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테두리에 가두어놓은 상태로 여유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인간을 획일화시키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담을 줍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 이 구절을 이렇게 바꾸면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이렇게 될 경우 책임 의식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예를 더 들겠습니다.
“죄라는 말이 요즈음에는 ‘기피단어’가 되고 있습니다. 소수자에게 상처가 되는 표현을 피해야 한다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가치 때문에 앞으로 어떤 행동을 ‘죄’라고 부르는 것을 법으로 금지할 날이 올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죄’를 부정하고 ‘죄’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고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과거 ‘죄’라고 부끄러워했던 것을 요즈음은 ‘기호’라고 자랑합니다.”(김영봉, “가장 위험한 기도”, p,163)
죄는 죄입니다. 다른 것으로 대치하지 말아야 합니다. 라고 선포하면 획일화의 음성으로 듣습니다. 그래서 몹시 부담스럽고 거북합니다. 그런데 죄를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잣대로 새겨 기호, 선택사항 등등으로 바꾸어 부릅니다. 그러면 그것은 다양성을 존중해 주는 지성적 성찰로 인정해 줍니다. 그래서 매력적입니다. 목요일에 모이는 소그룹 반에서 택한 교제가 ‘잊혀진 제자도’입니다. 저자인 달라스 윌라드 목사는 세상 말로 아무 것도 아닌 ‘꽝’ 신자로 사는 자들에 대하여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카이 아이들먼 목사의 말대로라면 ‘팬’으로 사는 자들에 대하여 조금도 여유를 주지 않고 이렇게 독설합니다. “차라리 교회 공동체에서 이탈하라” 이런 강한 저자의 글을 읽고 온 지체들의 나눔의 일성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후유, 차라리 알지나 말 걸, 그냥 예수 믿는 것으로 만족할 걸, 심지어는 죽고 싶어요. 등등이었습니다.” 정서적으로 얼마든지 지체들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달라스 윌라드가 이렇게 역설합니다. “한 눈으로는 하나님의 눈치를 보아가며 크게 혼나지 않을 일들을 즐기며 죄를 쌓아갑니다. 이런 것을 ‘죄 관리’(sin management) 라고 합니다.” (위의 책, p,165)
죄 관리의 프로세스는 너무나 매력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에 빠집니다. 반면, 죄 용납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음은 독선이요, 획일화요, 대화가 되지 않는 무식함으로 비난당합니다. 이강덕 목사는 이렇게 정의하면서 오늘 설교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매력적인 것들은 그래서 다른 복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