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 ● 복음성가: 다시 일어섭니다. ● 찬송가 588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백업(backup) ● 제목 : 갈라디아서 1:1-3 1)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율법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부화뇌동시킨 일과 바울의 반론은? 다음의 구절들을 통해 유추해 보자. ① 갈라디아서 1:1 ② 갈라디아서 1:11-12 바울의 반론 – 사도행전 9:15절 참고 |
2) 기드온과 다윗의 일대기를 통해 조명해 본 백업의 은혜를 나누어 보자. ① 시편 18편 ② 역대상 21장 ③ 사사기 8장 |
3) 적용하기 ① 나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② 나는 얼마나 주님을 나의 배경을 삼고 있습니까? ③ 주님이 나의 백업 되어 주심을 놓고 기도합시다. | 사역하기 (WORK)교회 주간 중보기도 제목
1) 육체적인 나약함이 있는 교우들의 치유를 위해. (김경옥, 김춘란, 조민지외 교우들) 2) 다음 세대 사역과 행정적인 사역을 돕는 평신도 사역자들을 위해 3) 12월 사역과 제11회 사무총회(2019년 1월 6일)를 위해 4) 담임목사의 목양과 대학원 강의 사역을 위해 5) 대학수업능력 시험을 마친 학생들의 순조로운 입학을 위해 주중 사역
1) 지역 셀을 맡고 있는 리더와 인턴을 위해 중보 2) 12월의 사역준비 – 각 기관 총회. 사무총회 3) 교회 봉사 사역에 자원하여 임할 것. 4) 예배에 소홀함이 없기를. 5) 태신자 추스르기 | 설교요약 (SUMMARY)제목: 백업 (backup) 본문: 갈라디아서 1:1-3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작품입니다. 그가 제 1차 전도여행을 통해 세운 터키 중남부 지역에 있었던 교회들 즉 비시디아 안디옥 교회를 비롯하여 루가오니아,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 세운 교회들에게 편지한 글입니다. 후에 더 자세히 살피겠지만 바울의 이 편지는 다른 편지들에 비해 상당히 과격해 보이는 단어들이 사용되었습니다. 동시에 이 편지는 헬라어 문법 중에 명령법이 제일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또 하나 눈에 띠는 것은 바울의 보낸 여타 다른 편지 서간에 나타난 수신자에 대한 정중한 인사 표현은 대체적으로 1:1절에 소개되어 있는 반면, 이 편지는 1:3절에 기록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바울은 이 편지를 쓸 때 수신자들에게 상당히 격해 있는 감정의 여운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이렇게 감정적으로 격해 있는 것일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① 다른 복음(할례 강요)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강력한 성토와 그 다른 복음을 따르는 갈라디아서 성도들에 대한 서운함이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② 바울의 사도권이 도마 위에 올리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 울은 제일 먼저 사도권에 대한 변호와 변증을 편지 시작과 함께 1절에서 증언합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이 구절에서 정말로 각인하고 주목해야 할 문구가 보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갖게 된 사도권의 주체를 명시한 내용입니다. 그것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토설입니다. 내가 사도가 된 것은 사람들에게 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나의 사도됨의 출처를 그는 분명히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라고. 재 강조하지만 할례를 주장하며 다른 복음을 전하였던 유대 율법주의로 무장한 거짓교사들이 바울에 대하여 또 하나 공격적인 포문을 연 것이 바로 사도 권의 부인이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사도로 부름 받은 자가 아니라고 그들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즉 그는 가짜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아는 것처럼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이방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도였습니다. 후에 살필 1:11-12절을 먼저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이보다 더 분명한 사도의 권위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바울 스스로의 고백보다 더 권위가 있는 주님의 선언이 사도행전 9: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바울은 적어도 이 소명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다른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향해 강력하게 자신을 변호하며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이렇게 편지의 시작부터 격앙된 어조로 선포한 것입니다. 다시 1절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저는 이 구절을 읽다가 오늘 설교의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BACKUP. 그렇습니다. 바울의 사도성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백업해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주군이셨습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든든한 배경이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갈라디아서 2번째 강해의 교훈을 이렇게 설정해도 큰 무리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뿐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든든한 백업(backup)이심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주군이 나의 백업의 기초라는 사실을 믿는 자는 당연히 그 분으로 인해 좌절하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신앙적인 내 삶을 살아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이 왜 주저앉습니까?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삽니까? 주군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내 뒷 배경되심을 인정하지 않거나 아니면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7년이나 이스라엘을 아주 악랄한 방법으로 괴롭혔던 미디안을 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말로 자격도 안 되는 기드온에게 전적인 은혜를 베푸셔서 미디안과의 전투에서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미디안 전투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개입하심으로 승리를 거둔 기드온 세력은 기쁨도 잠시 내홍에 휩싸입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딴지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의 막판에 가세하여 이미 전투력을 상실한 미디안의 두 방백이었던 오렙과 스엡을 체포하여 그들의 머리를 잘라 기세등등하게 기드온에게 가지고 온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강하게 항의하면서 시작된 내홍 때문이었습니다. 미디안 전투에 우리 에브라임 지파를 늦게 불러 승리의 전과를 평가절하시킴으로 전투 이후에 얻게 될 여러 가지의 이익에서 우리 지파를 소외시키려고 했다는 것이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의 불만 제기의 이유였습니다.(삿 8:1) 그러나 이런 불만을 제기하는 에브라임 지파의 공격은 너무 얍삽한 짓이었습니다. 정말로 그래서가 아니라 자칫하다가는 자기들이 선조로부터 획득해온 기득권의 혜택들을 므낫세 지파에게 상실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선수를 친 것입니다. 7년 동안이나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시기동안 에브라임은 잠잠했습니다. 그 역사의 귀퉁이 어느 한 곳이라도 미디안에 대한 항거와 저항을 했다는 보고가 사사기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미 전세가 기울고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 그룹의 오렙과 스엡을 손쉽게 거머쥐고 그들을 죽였다는 한 가지 이유로 갖은 생색내기에 혈안이 없는 에브라임을 보면서 대단히 유감스러운 생각이 저에게 스며들었습니다. 사사기 8:2-3절의 내용은 에브라임의 딴지걸기에 비해 손색이 없는 전형적인 인본주의적 타협을 보게 합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니라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 므낫세보다 에브라임이 훨씬 위대하다는 겉치레입니다. 그러자 어떤 결론이 났습니까?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 여기까지 보면 기드온과 에브라임 지파의 에피소드는 해피엔딩입니다. 그런데 몹시 찝찝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탈락된 그들만의 리그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기드온과 에브라임 지파의 그 어느 한 구석도 하나님이 배경되고 있음을 교훈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얄팍한 계산과 비굴한 야합에서 어디 주군의 모습이 보입니까?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시편 18편은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다윗의 찬양이자 신앙고백입니다. 시편 18:1-6절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중략) 다윗의 이 고백이 은혜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설교 제목과 관련하여 다윗은 시편 18편에서 하나님은 본인의 영원한 백업이심을 찬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찬양시를 고백했을 때 다윗은 삶의 여정 중에 가장 혹독한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시편 18편의 부제가 이렇게 기록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와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가장 혹독한 고난의 시기, 다윗은 백업이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조금 더 정확한 표현으로 백업이신 하나님만 보았습니다. 그러하기에 다윗은 이런 엄청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유감스럽지만 다윗의 또 다른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역대상 21:1-4절을 읽어드립니다.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다윗이 요압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단까지 이스라엘을 계수하고 돌아와 내게 보고하여 그 수효를 알게 하라 하니 요압이 아뢰되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보다 백 배나 더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이 백성이 다 내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령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하시나이까 하나 왕의 명령이 요압을 재촉한지라 드디어 요압이 떠나 이스라엘 땅에 두루 다닌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다윗의 인구 조사 스토리입니다. 이 시기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다윗의 치세 중 가장 강력했던 전성기였습니다. 그는 전무했던 다윗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누구도 주변 국가에서 이스라엘을 범접하거나 넘볼 수 없는 무소불휘의 권력을 갖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다윗은 말 그대로 절대 권력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그 권력을 보이고 싶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실력자임을 공표하고 싶었습니다. 그 마음은 사탄이 알게 되었습니다. 사탄의 계교는 다윗이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방법으로 택한 것이 인구조사였습니다. 인구조사는 단순한 인구 조사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이룬 다윗 왕국의 물리적인 힘을 드러내는 세속적 포장이자 시위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무모한 일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의 수하에 있던 요압도 알만한 너무나도 자명한 영적 범죄였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럴까요? 다윗의 백업이셨던 하나님이 다윗의 무대에서 다윗에 의해서 탈락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존재라는 교훈입니다. 내 인생의 여정이 너무나도 잘 나갈 때 영적으로 흐트러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지금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면 영적으로 긴장하십시다. 여러분의 백업이신 하나님을 탈락시키지 마십시다. 바울은 오늘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의 사도됨은 내 개인의 사사로운 일로 채워진 우연의 사건이 아니라고. 그는 확신했습니다. 나의 사도됨의 역사는 철저한 하나님의 백업으로 이루어진 필연의 결과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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