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10월 28일셀 사역2024-04-23 16:53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가 좋아하는 노래 불러보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복음성가: 아무도 예배하지 않는 (예배자)
● 찬송가 457장: 겟세마네 동산의  

 
말씀읽기와 적용 (WORD)
1) 벨릭스 총독의 사설 감옥에 구금되어 있었던 바울을 고소한 산헤드린 공회의 고소 내용은?
본문 5-6절 참고 :  ① ② ③ ④   

2) 공회가 바울을 두려워했던 영적인 이유는?
① 사도행전 9:21절 참고
② 사도행전 9:5절 참고  

3) 적용하기
① 내가 신앙인으로 가지고 있는 최고의 가치를 점검하자.
② 타협자인가? 역행자인가?
③ 위의 내용들을 점검하고 주군이 원하는 가치를 위해 합심하여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교회 주간 중보기도 제목

1) 조민지 자매의 수술을 비롯하여 육체적인 나약함이 있는 교우들의 치유를 위해.
2) 대학입시를 앞두고 있는 수험생들을 위해 (장종호, 장종훈, 홍수민, 서동혁)
3) 11월 18일 추수감사주일에 실시될 2018년 영혼 추수 축제에 각 지역 셀에서 섬기고 있는 태신자들의 영혼 추수를 위해
4) 남은 추계 목장 대심방 사역의 승리를 위하여
5) 하나님이 예비하신 신실한 부교역자 청빙을 위해
6) 가나안 성도들을 위하여, 이타적 사역을 위해서
7) 담임목사의 건강과 사역을 위해

주중 사역

1) 영혼 추수 축제 두 번째 주간 사역 인지하고 최선을 다하기.
Ⓐ 21일 주간: 태신자 모두를 정리하여 기도 리스트에 올려 파악하여 기도하기
Ⓑ 28일 주간: 정해진 태신자들과 따뜻한 식사하기 
Ⓒ 11월 4일 주간: 정해진 태신자들에게 사랑의 품앗이하기
Ⓓ 11월 11일 주간: 정해진 태신자들에게 복음의 메시지 전하기
Ⓔ 11월 18일 : 교회 예배 동행하기   
2) 대심방 사역 점검하고 기도로 준비하기
3) 피선교지를 위해 중보하기
4) 공 예배 빠지지 않기   

 
설교요약 (SUMMARY)
제목: 그럴 수 있다면
본문: 사도행전 24:1-9
바울은 제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이방 교회의 형제들의 사랑이 담긴 구제헌금을 직접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모험을 감행합니다. 모험이라 말씀드린 이유는 예루살렘에는 바울이 유대교 신앙을 버리고 예수의 복음을 증거 하는 자로 변질된 것에 분노하여 바울을 죽이지 않으면 먹지도 않겠다고 결의했던 바울 살해 결사대원 40명이 기다리고 있었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은 기다리고 있던 유대인들의 집단적인 고소로 인해 사도행전 23장에서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막강한 유대 종교적인 힘을 갖고 있었던 산헤드린 공회로 끌려가 종교 재판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가야바의 법정으로 끌려가신 것처럼 심문을 당하면서 바울도 마땅히 죽어야 하는 자로 종교 재판의 결과를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태어난 자였기에 유대인들의 직접적인 살해위협에서 벗어나 이스라엘 지역에서 로마인들을 구금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던 가이사랴에 있었던 총독 관저의 사설 감옥으로 우여곡절 끝에 옮겨져서 그곳에서 2년이라는 세월동안 구금 생활을 하게 됩니다. 나름 로마로 빨라 넘어가고 싶었던 바울이었지만 유대인들의 방해와 같이 상황이 녹록하지 않아 그곳에서 묶여 있으면서 이모저모의 심문을 받아야 하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 24장은 바로 그 장소였던 벨릭스 총독의 관저 감옥에서 벌어진 유대인 고소자와 벨릭스 총독의 관리들과 바울 사이에 일어난 재판 과정의 한 단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 그리고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던 바울과는 상대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로마의 법통이었던 변호사 더둘로를 대동하고 가이사랴까지 와서 바울을 고소한 뒤에 모사꾼이었던 더둘로가 벨릭스 총독에게 언급하고 있는 고소 내용을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우리에게 그 정보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더둘로는 로마인이었기 때문에 로마의 시민권을 갖고 있었던 바울을 고소하는데 최적임자였습니다. 이것을 알았던 유대 종교의 금권을 가지고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고 있는 제사장 그룹은 그를 돈으로 매수하여 바울을 죽이는 데에 앞장을 서게 하는 비열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음을 본문에서 누가는 고발하고 있습니다. 뇌물에 매수된 상업적인 변사인 더둘로는 바울을 다음의 이유로 고발하고 있습니다. 본문 5-6절을 주목합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
더둘로가 말하는 바울의 죄목이 무엇이었습니까?
① 전염병 같은 자. ② 유대인들을 소요케 하는 자. ③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 ④ 성전을 더럽히는 자.
이 중에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주목해야 하는 내용은 첫 번째입니다.
전염병 같은 자라는 죄목입니다. 오늘 개역개정판 본문에서는 '전염병'이라는 단어로 번역을 했지만 우리가 먼저 보던 개역 판에서는 '염병'이라고 번역을 해놓았습니다. 전염병으로 번역한 헬라어 ‘로이모스’ 는 흑사병과도 같은 악성 바이러스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마치 설교의 서두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의 바이러스와 같은 영향을 주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염병과도 같은 부정적인 자가 바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이 하면 안 되는 아주 위험천만의 인물로 바울에게 누명을 씌우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 새벽에 교우들과 함께 통독한 본문 5-6절을 읽다가 묘한 느낌이 저에게 들었습니다. 더둘로가 덮어씌운 죄목이 정답이라는 묘한 생각이었습니다. 왜요? 더둘로가 바울을 공격했던 악질적인 누명 씌우기의 메시지가 바울에게 너무나도 걸 맞는 바울의 신앙적 정체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전염병과 같은 존재가 맞습니다. 그가 발걸음을 옮겼던 일체의 지역에는 바울로 인해 예수라는 복음의 균이 매우 맹렬하게 그리고 빠르게 급한 속도로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전한 예수의 바이러스는 개인의 육체를 완전히 사로잡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사람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을 복음으로 초토화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대변하던 더둘로가 인식한 전염병과 같은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 바울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 정도로 세상이 두려워하였을까요?
1) 그는 오직 예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집중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에 집중한 것이었습니다. 더둘로를 대변인으로 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은 바울이 범죄자라는 우격다짐이었습니다. 이렇게 공격을 당하는 바울에게 벨릭스 총독은 항변하라는 기회를 줍니다. 그 기회를 받아 바울은 오늘 본문이 이어지는 10-21절에서 본인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는 변증을 이어나갑니다.
① 나는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온 지 12일 밖에 되지 않았다. (11절) ② 그러므로 누구를 선동할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다. (12-13절) ③ 내가 예루살렘에 온 것은 내 사랑하는 형제 교회에 구제비를 전달하기 위해 온 것이다.(17-18절) ④ 동시에 나는 나를 고소한 사람들이 믿는 조상의 하나님, 율법서와 예언서도 다 믿는 자다. (14절)
이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는 유대인들을 소동하게 하기 위해 온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들 말대로 성전을 더럽히려는 것은 더 더욱 말도 안 된다는 지론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선언하면서 유대인들이 없는 한 가지, 그것을 강력하게 선포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24:21절을 읽겠습니다.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만 있을 따름이니이다 하니” 그렇습니다. 아무리 고소한 자들의 비난과 반대와 서슬이 시퍼런 공격이 있다고 하더라도 바울이 포기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본질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가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 믿음은 포기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부활 사건이었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이 구절을 ‘메시지’에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저들이 나에게 대하여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내가 의회에서 외친 ‘내가 부활을 믿기 때문이라는 것’ 이 한 문장뿐입니다. 이게 어찌 형사 사건의 근거가 된다고 보십니까?” 더둘로를 비롯한 유대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바울이 아니라, 바울이 전하고 있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셨기에 가능했던 부활의 복음이었습니다.
부활의 신앙, 부활의 복음, 이것은 오늘 우리 세인교회의 지체들이 501주년 종교개혁주일 아침에 결심하고 또 결단해야 할 은혜와 결단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면서 정말로 두렵고 또 두려워하는 것은 교회의 성장, 교회에 몰려드는 많은 성도들의 숫자, 교회가 그로 인하여 정치적인 집단이 되어 세상보다 더 큰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교회가 복음의 본질에서 비껴가지 않고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라는 강력한 무기로 무장하여 세속적인 일체의 사탄적인 내용들을 초토화시킬 것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를 죽게 했던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던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었던 바울의 그 예수의 주되심의 선포와 신앙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의 사람입니까?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의 도를 이루신 예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누가 세상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위력적인 자입니까?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과 이적에 열광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 그 분에게 열광하는 자입니다. 예수께서 수많은 사람들의 구원자이신 것에 감격해 하는 자가 아니라 그 분이 바로 나의 인격적인 구주라는 사실에 눈물겨워 하는 자입니다. 주님을 내가 알고 그 분을 믿고 선택하고 그를 따랐다고 말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먼저 아셔서 나를 지명하여 부르셨고, 마치 나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처럼 나를 오늘도 인격적으로 사랑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인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 믿음 위에 서 있는 자를 사탄의 일체 세력들이 범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시대의 흐름과 타협하지 않았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을 다시 봅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유대인을 소요하게 하는 자’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헬라어 단어 ‘스타시스’는 반란을 일으키게 한다는 원래의 뜻이 강하지만 어떤 특정한 곳에서는 이렇게도 쓰이는 단어입니다. “뜻을 갖고 세우게 하다,” 이 뜻으로 바울에 대한 스토리를 적용한다면 더둘로는 오늘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바울을 공격한 것입니다. “바울, 이놈은 도대체 시대가 흐르고 있는 대세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고 자꾸만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려고 하는 자야, 거꾸로!”
더둘로가 이렇게 바울을 공격했다면 우리는 역발상의 은혜를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정말로 그리스도인으로 세속적인 흐름에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주님이 걸으셨던 길을 잘 달려갔던 신앙의 선배였다는 은혜입니다. 세상이 깔보고 우습게 여기는 자들은 시대에 순응하며 타협하면서 같이 가는 명목적인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교훈입니다.
반면 세상이 두려워하는 자들은 작금의 비성서적이고 반 그리스도적인 일체의 것들에 역행하는 삶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가 누구를 두려워합니까? 세속적인 가치로 무장한 속옷을 입고 무늬만 그리스도인의 겉옷을 입은 자들이 겉은 이방인이지만 예수의 정신이라는 속옷을 입고 있는 진짜 그리스도인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자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우리는 절박한 심정으로 충격 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셨던 길과 방법은 세상이 추구하는 방법과 같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에 하나 내가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셨던 길을 걸으려면 반드시 대중적인 인기몰이가 있는 길과는 정 반대의 길로 역행해야 합니다. 이 길 가가는 무척이나 고독하고 힘이 든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 길이 아니라 너무나도 적은 사람들이 간 길이기에 척박하기 그지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