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6:14-22
제목: 테바(2)
우리는 지난 강해 설교를 통해 테바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동력으로 움직이는 무동력의 상자 같은 배였음을 살폈습니다.
더불어 노아 당시, 죄악이 관영한 바로 그때 유일한 구원의 도구였음도 살폈습니다.
오늘은 테바에 대한 또 다른 신학적 의미를 교우들과 나누기를 원합니다.
3) 테바는 교회였습니다.
본문 18-20절을 봅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창세기 기자에 의하면 노아의 식솔들이 테바 안에서 생활을 한 총 일 수가 1년 17일이라고 보고합니다.
P 문서의 편집자에 의하면 노아가 그의 식솔들과 테바 안으로 들어간 날은 600세 되는 해의 2월 10일이었습니다. (창 7:10-11)
그리고 그가 식솔들과 테바 안에서 나온 날을 601세 되는 해의 2월 27일이라고 8:16절은 보고합니다.
1년 17일 동안 노아는 식솔들하고만 삼층 구조로 되어 있는 테바에서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노아의 골칫거리는 테바 안에 있는 동물들이었을 것이 자명합니다.
그냥 일반적인 상상력을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당시 유일한 구원 도구였던 테바는 구원선임은 분명했지만 노아에게 테바는 생지옥과 같은 것 그 자체였을 것이 자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과 동물과의 공존이 쉽습니까?
반려 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이제는 반려 동물을 같은 식구로 여기는 사람들이 꽤 많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물애호가들이 느끼는 부분적 일이지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동물과의 공존 자체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게 현실입니다.
이유는 인간과 동물은 다른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 본능들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과장된 비약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펜데믹의 서막도 그렇습니다.
아마존의 1/3이 파괴되었다는 우울한 보도를 접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존은 지구의 허파라고 하는데 이 지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염려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인간이 동물들이 살아야 하는 지역까지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마구 파헤치고 훼손하여 동물들이 살아야 하는 영역을 침범하여 급기야는 동물이 자구책으로 인간이 살아야 하는 영역으로 습격한 것이 코로나 19의 공격입니다.
동물들은 인간과 다른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테바는 이렇게 본능적으로 다른 생리를 갖고 있는 인간과 동물이 한시적이기는 했지만 불가피하게 공존할 수밖에 없었던 장소였습니다.이런 환경이 정말로 고통스러웠을 것은 마땅히 노아였을 것입니다.
매일 마다 들어야 하는 동물들의 소리는 1년 동안 엄청난 고통의 소음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아 그 방법을 설명드릴 수는 없지만 동물들의 배설물 처리는 아마도 노아에게 있어서 최대의 난제였을 것입니다.
동물들의 돌봄, 먹이를 주어야 하는 일, 위생 관리 등등은 상상만 해도 너무 끔찍한 공간이 테바였습니다.
노아에게 있어서 인간에게 해로운 동물들과의 공존은 말 그대로 악몽이었을 것이며, 지옥 그 자체를 경험하는 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노아는 테바의 문이 열리는 날까지 묵묵히 버텼습니다.
더불어 동물들과 공존하며 미래를 기대했습니다.
테바가 무엇이었습니까?
교회라는 공동체였습니다.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정말로 어떻게 이런 조합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다양하며, 천차만별이며, 개성이 갖가지인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념, 문화, 지역, 성별, 학력의 격차, 뭐 하나 같은 것이 없는 그리 흔하지 않은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옛날, 신학교를 다닐 때, 실천신학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 또렷이 기억납니다.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이올린, 피아노, 큰 북, 플루트 등등의 현악기, 건반악기, 타악기, 관악기 등등의 조화는 물론, 별로 존재감이 없는 피콜로 같은 아주 작은 악기의 소리도 존중해야 하는 것이 오케스트라입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콘트라베이스와 같은 메머드 악기도 전체 악기들과 화합하는 소리를 내도록 이끌어야 하는 사람이 지휘자인 것처럼 교회 목사는 교회라는 유기적 공동체를 누구 하나 편향되지 않게 견인하고 이끌어가야 하는 총체적인 리더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에서 목사는 노아와 같은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너무 당연합니다.
같은 맥락으로 테바 안에 있었던 사람들과 동물들을 노아는 잘 인도해야 했을 것입니다.
1년 17일이라는 기간 동안 노아는 테바 안에 있는 동물과 인간의 공존을 위해 분명한 리더십을 발휘했을 것이고 그 결과 사람과 동물들이 공존하는데 성공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주군의 전적인 간섭하심이 있었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교회는 다양한 것이 공존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다양성의 일치라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교회는 그런 곳이어야 합니다.
그런 복잡 다양한 공동체인 교회는 테바의 문이 열리는 것처럼 주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 공존하며 서로를 배려하고 살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4) 테바는 하나님의 식으로 만들어진 상자였습니다.
본문 14-15절 전반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의 설계도를 제시하셨습니다.
본문만 살피면 재료는 코페르 나무로 만들고, 그 안에 칸들마다 역청으로 칠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 뒤에 15절 하반절부터 21절 본문에 장황하게 그 배에 크기를 비롯하여, 구조, 모양 등을 설명하시면서 자세한 설계까지 노아에게 하명하셨습니다.
동시에 그 테바 안에 들여야 할 대상까지 정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에 노아의 식이 반영된 것은 1%도 없다는 점입니다.
100%가 하나님의 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식, 그리고 하나님의 마스터플랜만이 존재한 것이 바로 테바였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테바가 교회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렇다면 더 정확해 집니다.
교회가 왜 교회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식이 통하기에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식에 의해 통치되기 때문에 교회입니다.
테바 위에 창을 내라고 해서 그렇게 냈습니다.
하나님의 식이기 때문입니다.
삼층 구조로 만들라고 했기에 삼층 구조로 만들었습니다.
삼층 구조는 노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식이었습니다.
모든 생물 한 쌍식 들이는 것도 주님의 식이었습니다.
노아의 의견은 조금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식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든 토저의 책에서 이 글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종속된다는 것은 그분과 반대되는 것들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아이든 토저, “철저한 십자가”, 규장, 64.)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제는 하나님의 식이 아닌 것들을 거부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만에 하나, 내가 그리스도인이기를 고집하면서도 하나님의 식을 거부하고 내 식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본말전도요, 주객전도를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갖고 있었던 ‘내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꾸는 혁명,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출발하는 시작입니다.
테바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식이 운영되는 일체의 것을 수용하고 동의한다는 의미합니다.
사무엘상 17:45-47절을 기억하십시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칼과 단창은 테바 밖의 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전쟁 승리의 원인이며, 구원하심의 근거라고 선포한 다윗의 고백은 테바 안의 방식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교회와 성도들이 하나님의 식을 인정하고 그 식으로 승부를 거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그리고 교우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5) 테바 안에는 자의든 타의든 순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순종이라는 기초가 있는 공동체입니다.
본문 2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완전한 자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것이라고 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본문을 들여다보면 노아의 순종은 그렇게 쉽게 이해하고 지나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일 먼저 살펴볼 구절이 창세기 5:32절입니다.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노아의 나이 500세 이후에 세 아들을 낳았다고 보고합니다.
노아의 나이 600세에 홍수가 시작되었으니 적어도 홍수가 진행되던 해에 노아의 아들들의 나이는 100세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세 아들들은 아내가 있는 기혼자들이었습니다.전제하여 잘 생각해 보십시다.
100세가 된 아들들,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들인 아들들은 이미 아버지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을 것입니다.
친구 목사의 아들이 이요한 전도사와 동갑입니다.
이제 결혼을 해야 할 시기가 지났습니다.
헌데 아들이 결혼할 기미가 보이지를 않아서 때때로 잔소리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선언한 것은 독립이었습니다.
부모로부터의 독립은 어떤 이야기든 자기의지로 일체의 일을 할 테니 간섭하지 말라는 일종의 선전포고인 셈입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그렇지 않겠습니다.
32세나 된 아들을 부모 마음대로 무언가를 강요한다는 것이 그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본문에 기록된 노아의 아들들은 아내들을 두고 있는 100세 이상의 아들들입니다.
그들이 아버지가 짓고 있는 방주로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멀쩡한 하늘, 좋아도 너무 화창한 날씨에 방주를 짓고 있는 아버지를 흔쾌히 이해하고 수용할 아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설상가상으로 본문 18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하나님이 노아와 맺은 언약을 아들들에게 고지한다고 해서 그 방주로 들어갈 아들이 있겠느냐를 다시 한 번 질문해 보십시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2절은 단 한 문장으로 이런 의구심을 불식시킵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이 문장의 위대함은 노아의 순종으로 인하여 오는 감동 때문이 아니라 노아의 식솔들이 행한 순종 때문에 오는 감동을 배태하고 있습니다.
방주 안에 7명이 들어왔다는 것을 전제한 피력입니다.
도대체 100세 된 아들들과 자부들이 노아의 말을 순종했다니 이게 말이 돼!
누구든지 한 번은 던질 법한 질문입니다.
모 정당의 대통령 후보자가 얼마 전에, 가족 모임을 가지면서 모든 식구들이 애국가를 제창하는 사진을 올렸다가 뭇매를 맞았습니다.
이게 전체주의적인 집단이지 정상적인 가족이냐는 뭇매였습니다.
백 번 천 번 양보하여 아내, 자식들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며느리와 사위들이 이 일에 동참한다는 것이 전체주의에서 가능한 일이지 정상 가정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일반 사람들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창세기 6장의 편집자인 P기자가 이렇게 적시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노아의 순종을 소개하면서 너무나 당연히 노아의 아내와 아들들의 순종은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며느리들마저도 시아버지의 말에 순종했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처사일 텐데 P기자는 순종의 대상을 노아를 제외한 7명 전체임을 분명히 암시한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조금 집요하게 살필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노아의 식솔들이 노아의 믿음만큼 전적으로 순종했는지는 찾을 길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자발적 순종이 아니라도 타의에 의해 전언된 경고성 말씀을 그들은 들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테바 안에 있던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이 이해가 되든지, 되지 않든지 혹은 유익이 되든지 그렇지 않든지 관계없이 순종의 결론을 맺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다보면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됩니다.
그것은 ‘순종’에 대한 신학적 힌트입니다.
성경의 대부분 영역에서 믿음이라는 필드는 전적인 믿음을 강조합니다.
‘믿음’의 항목에서는 ‘믿음’ 외의 다른 여백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종의 필드는 조금 다릅니다.
‘순종’이라는 필드는 그 순종이 자의든, 타의든, 혹은 믿음으로 했든, 그렇지 않든 아랑곳 하지 않고 순종의 결과를 놓고 판단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나아만 기사(열왕기하 4장)와 엘리야의 몸종(열왕기상 18:41-46)의 내증이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나아만이 요단강에서 목욕한 것은 자발적인 순종이 아님을 우리는 너무 잘 압니다.
3년 6개월의 가뭄이 북 왕국 이스라엘을 강타했을 때, 때가 되어 엘리야가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는 시간에 기도가 끝나면 바다가 보이는 곳에 가서 먹구름이 몰려오는지 확인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환 즉 몸종이 7번에 걸쳐 엘리야의 명령에 순종한 것도 흔쾌한 순종이 아니었음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여겨 볼 것은 어찌했든 순종했다는 점입니다.
그 순종이 승리로 연결되었다는 점은 순종이 얼마나 믿는 자에게 중요한 승리의 덕목인지를 선명하게 알려줍니다.
테바 안에 있었던 노아의 식솔들이 완전하여 테바 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최선을 다한 정성과 하명에 나름 순종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순전한 순종이든, 순전하지 않은 순종이든 그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결과가 중요한 데 주목하십시다.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구속사의 획을 긋는 주인공들이 된 것입니다.
교회도 매일반입니다.
교회가 완벽해서 항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유기적 지체들이 완벽해서 교회가 천로역정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이모저모 문젯거리 투성인 공동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덧입어 어떤 때는 자발적으로, 또 어떤 때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을 갖고 순종한 자들의 그 순종을 기초로 세워져 가는 곳입니다.
그 순종의 닻을 달고 주님 나라를 향하여 항해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찬양 사역자인 ‘시와 그림’팀이 이 찬양을 불렀습니다.
“나 비로소 이제 깊고 넓은 바다 간다/두려움에 떨고 있는 내 손을 주는 결코 놓치지 않으셨다/나 비로소 이제 폭풍우를 뚫고 간다/비바람에 흔들리는 나약한 나를 잡아 주시는/그분은 나의 주님/주 나를 놓지 마소서/이 깊고 넓은 바다에 홀로/내 삶의 항해의 끝이 되시는 주님이시여/난 의지합니다/날 포기하지 마소서/나 잠시 나를 의지하여도/내 삶의 항해의 방향을 잡아주시옵소서”
나는 우리 세인 교회가 그것이 타의든 자의든 순종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며 지체들이 테바 안에 있는 노아와 식솔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교회는 순종이라는 바람에 의지할 때 성령께서 통치하시며 항해하게 하는 테바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세인교회가 테바이기를 바랍니다.
세인교회 성도들이 노아, 그의 아내, 함, 셈, 야벳 그리고 그의 아내들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