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28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서른두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6:14-22 제목: 테바(1) 하나님께서 땅이 부패한 시대, 포악함이 가득한 시대였던 노아의 시대에 결심하신 것은 당신이 만든 인간들을 멸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결심은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는데 본문 14절이 알려줍니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모두가 악했던 시대,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 하나님과 동행했던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하셨습니다. ‘방주’로 번역된 히브리어 ‘테바’는 ‘나무 상자’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 ‘테바’를 출애굽기 2:3절에서 다시 한 번 만납니다.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렇습니다. 모세를 담아 나일 강으로 흘러 보냈던 갈대 상자의 상자가 바로 테바입니다.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상자는 분명히 작은 갈대 상자였을 것입니다. 반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테바 즉 노아에게 명령하여 만들라고 한 테바는 그 규모가 작지 않았습니다. 본문 15-16절입니다.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일반적으로 1 규빗은 45cm정도입니다. 그렇다면 300 규빗 이라면 길이가 135m 정도가 됩니다. 폭은 50 규빗이니 22m정도가 될 것이고, 높이는 30 규빗이니 13m 정도가 된다고 보면 적절합니다. 그리고 3층 구조의 직육면체로 제작된 무동력 나무배가 테바였습니다. (16절) 또 하나 살펴 볼 것은 이 테바의 재료입니다. 다시 14절을 보면 방주의 재료는 ‘코페르’입니다. 코페르는 정확하게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성경의 번역을 소개한다면 이렇습니다. 개역판 성경은 잣나무로, 공동번역은 전나무로, 70인 역(헬라어 구약성경)은 네모난 목재로, 불가타(라틴어 구약성경) 성경은 매끄러운 목재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한 공통점이 하나 보입니다. 테바는 나무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테바를 연구해 보십시다. 본문 16절입니다.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무슨 말입니까? 테바는 아주 특별하게 유일한 창문을 하나 만들었는데 그 창문은 좌우에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늘이 보이는 위로 만들었다는 독특성이 있습니다. 동시에 좌우에는 밖을 볼 수 없는 문을 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훗날 홍수가 끝났을 때, 나갈 수 있는 문이지만 홍수 동안에는 밖을 볼 수 없는 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방주 안에서 밖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하늘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이제 본문 18-21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양식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먹을 것이 되리라” 방주 안에는 사람 8명과 모든 생물의 암수 한 쌍을 들였기에 동물과의 생존하는 장소였습니다. 자세히 살피지는 않았지만 이상으로 방주의 제작과 상황에 대하여 선 이해를 나누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살핀 테바에 얽힌 내용 4가지를 살필 것인데 오늘 수요 예배에서 두 가지를, 다음 주 수요 예배에서 나머지 2가지를 나누며 영적인 레마를 찾겠습니다. 1) 테바는 하나님의 통제 안에서 움직이는 배였습니다. 테바는 나무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조금 더 부연한다면 이 테바는 그냥 나무로 만든 큰 상자와 같은 배였다는 점입니다. 이 배의 특징은 무동력선이었다는 점입니다. 어떤 물리적인 방법으로 인해 가고자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도록 제작된 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동시에 이 테바 제작에 관한 기자의 보고에 돛이나 닻이 만들어졌다는 보고가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위적으로 멈추고 싶어도 배 안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멈춰질 수 있는 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17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여기에 기록된 ‘홍수’라는 히브리어 ‘맙불 마임’은 건조한 날씨를 해갈해 주는 단비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이 단어를 직역하면 ‘하늘바다의 물’입니다. 상징적으로 기억되고 연상되는 것이 있으면 다행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만드셨던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기억하십니까? 그렇다면 홍수는 어마무시하게 하늘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일 것입니다. 파주에서 목회를 할 때 홍수가 한 번 있었습니다. 당시 사택은 15층이었기에 잠기지 않았지만 제가 거주하던 파주시의 저지대는 거의 잠겼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로 인해 서울 홍수의 가능성이 있어서 당시 정권이 임진강 지역을 일부러 터뜨려 파주는 물론, 일산 지역까지 홍수 피해를 보게 하는 악수(惡手)까지 두었는데 그때의 일을 생각하며 지금도 오금이 저리는 무시무시한 악몽이 되살아납니다. 그때 15층에서 하늘을 보며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 바로 이것입니다. ‘맙불 마임’ 즉 ‘홍수’는 이렇게 비가 내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테바는 하늘물이 쏟아져 온 천지에 물이 찼을 때,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떠오른 테바는 목적이 있는 곳으로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정처 없이 물 위를 떠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노아의 일행과 생물들의 암수 한 쌍이 승선한 테바는 하나님의 전적인 이끌림이라는 안전함 속에 있었다는 점 말입니다. 무동력은 비극이 아닙니다. 도리어 은혜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사고, 계산함, 머리 굴림, 심지어 일체의 인본주의적인 생각으로 나를 이끌고 가면 실패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하지만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에 나를 맡기면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십니다. 내 힘을 빼면 하나님의 힘이 나를 견인합니다. 다시 출애굽기 2:3-6절을 목도하겠습니다.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악어들이 넘실거리는 나일 강에서 아주 자그마한 테바에 실린 모세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0%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기자는 선명히 테바를 나일 강에 흘려보낸 이후의 기사를 싣고 있습니다. Ⓐ 고센의 어떤 나일 지역에서 흘려보낸 모세를 담은 테바가 수많은 파도와 위험을 피하면서 도착한 장소가 애굽의 공주가 목욕하던 장소였습니다. Ⓑ 바로의 딸이 테바를 발견했고, 더불어 외면하지 않았으며 그 테바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 테바를 열었더니 히브리 출신의 아이가 들어 있음을 직시한 애굽의 공주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테바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십니까? 노아의 방주는 무동력 선이었습니다. 스스로 어디를 목적하여 갈 수 있는 배가 아닙니다. 노아의 방주가 물에 떠 있었던 기간은 1년 17일간이었습니다. 600세 2월 10일부터 601세 2월 27일까지 방주는 물에 떠 있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그냥 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방주는 그냥 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철저한 인도하심이 이끌려 항해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왕대일 교수의 해석을 들어보십시다. “노아의 방주는 그냥 3층을 세워진 나무상자입니다. 가려고 하기보다는 떠 있습니다. 하늘 물이 쏟아져 내린 홍수로 인해 온 땅이 잠기게 되자 방주는 그냥 물 위를 떠 다녔습니다. 방주는 내 힘으로는 가지 못하고 물결을 따라 떠내려갑니다. 하나님의 그 물결의 조타수 역할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방주의 물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왕대일, “창조신앙의 복음, 창조신앙의 영성”, 대한기독교서회, p,233-234) 성도가 경험하는 가장 큰 은혜와 복은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인 교회와 지체들이 이런 은혜를 절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테바는 당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습니다. 본문 17-20절을 봅니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이 펼치신 마스터플랜은 생명이 있는 육체의 멸절이었습니다. 죄의 삯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구원의 여백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테바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테바 안에 들어가야 살게 된다는 대 전제를 하나님이 세웠다는 점입니다. 이 테바 안에 들어간 8명의 인간과 암수 한 쌍 동물들은 살았습니다. 테바는 말 그대로 구원의 방주였습니다. 18절에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은 언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언약이라는 히브리어 ‘베리트’는 동물을 잡아 그 사체의 반을 쪼개 양 옆에 세우고 약속의 당사자 A와 B가 그 사이로 지나가는 의식을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약속의 파기는 죽은 동물의 사체와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는 엄중한 상징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 ‘베리트’를 노아에게는 사체가 아닌 테바로 정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행위는 단순했습니다. 테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언약이 시작되는 체결의 스타트라인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들이 일상에서 가끔 경험하는 일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새로운 물건을 샀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구들이 새겨진 것을 곧잘 봅니다. “이 태그를 뜯는 순간 반품은 되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물건을 사용하겠다는 허락의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노아와 맺은 언약은 테바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제가 아주 예민하게 고민하는 영적 성찰이 하나 있습니다. 신자들이 교회라는 방주를 나를 구원해 준 언약 공동체로 진정성을 갖고 인정하는가에 대한 성찰 말입니다. 마태복음 16:18절에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땅에 존재하는 공동체 중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도록 분명하게 정의를 내린 공동체가 교회 외에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가 세상 보다 못한 곳으로 전락되었다고. 조금 더 심하게 표현하면 이런 치욕스러운 표현까지 교회가 당하는 기막힌 지금입니다. “교회는 세상이 염려하는 골칫거리” 이런 소리를 들을 때, 부끄럽기도 하고, 수치스러워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하는 홍역을 앓으며 아파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목사인 저는 고개를 젓고 싶은 것이 다반사이지만 인정해야 하는 분모가 있기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교우들에게 전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왜?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유일하게 이기지 못하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교회를 비판하되 그 교회의 정체성을 무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세상 보다 못한 곳으로 정죄하는 세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교회는 이 땅에 남아 있는 유일한 테바입니다. 테바 안에 있어야 합니다. 디베랴에서 거라사로 이동하시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배로 갈릴리 호수를 이동하던 중에 파도 때문에 배가 파선직전에 몰렸음을 마가복음 5:35절 이하가 보도합니다. 상당수 많은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에 이골이 난 어부들인데 그날의 파도를 이기지 못하였다고 마가는 보고합니다. 급해진 제자들이 피곤하여 주무시고 있는 주님을 깨워 구원을 요청합니다. 주님은 바람과 파도를 꾸짖으셨고 배는 평온을 찾았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기사를 목도할 때마다 제게 오는 감동은 이것입니다. “배 안에 주님이 계시면 된다.” 이 말을 이렇게 거꾸로 해석하겠습니다. “주님이 계신 배 안에 내가 있으면 된다.”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여러 차례 설교를 통해 말씀드린 예화이지만 오늘 설교에 적합해서 다시 한 번 책에서 읽은 글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교회가 밥값을 못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지만 아시시의 성인 역시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프란체스코야, 내 집을 고쳐 다오. 너도 보듯이 다 망가졌단다.’ 하는 음성을 들었단다. 그러자 앗시시의 프란체스코가 십자가의 눈물과 한숨 사이사이에서 손과 발과 옆구리의 상처에 입 맞추며 불렀던 노래가 이렇게 전해진다. “나의 교회야, 나의 교회야/네가 아무리 못생겼어도/너는 언제나 나의 교회지”(손석춘, 김기석 공저,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 꽃자리,p,342.)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 역시 성 프란체스코의 노래에 화답하고 싶습니다. 저는 교회가 2021년의 테바가 되기를 기대하고 소망하는 목사입니다. 저는 우리 세인 교회가 테바인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대하는 목사입니다. 주여, 세인교회가 테바 되게 하옵소서!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