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6:9-13
제목: 그 때에
오늘부터 우리는 노아의 홍수 사건을 몇 주 동안 살피게 될 것입니다.
너무 잘 아는 성경의 기사가 노아의 홍수라고 생각하여 가볍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경홀히 여기는 교만함이 없기를 바라며 겸손하게 교우들과 창세기 6-8장에 걸쳐 기록된 노아의 홍수 메시지를 나누기를 기대합니다.
9-10절 본문을 읽겠습니다.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우리는 이미 노아의 계보가 이러했음을 살폈습니다.
창세기 5:21-29절입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오늘 설교의 주인공 노아의 아버지는 라멕입니다.
라멕의 아버지는 그 유명한 장수 인물 므두셀라입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할아버지인 셈입니다.
므두셀라의 아버지는 또 그 유명한 에녹입니다.
결국 에녹은 노아의 고조할아버지가 됩니다.
어떻습니까?
그래도 나름 노아의 족보를 뼈대 있는 가문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설마 뼈대 있는 가문임을 천명하기 위해서 노아의 조상을 복기했겠습니까?
무엇을 창세기 5:21-29절이 알려줍니까?
노아는 구속사적인 하나님의 일하심의 도구임을 창세기 기자가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속사의 계보에서 태어난 노아를 본문 9절에서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그 대에 완전한 자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증조할아버지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노아의 족보를 거론한 이유는 노아가 활동하게 된 동기를 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의인’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에노쉬 짜디크’는 이런 경우에 붙이는 단어입니다.
“원래 사회의 법과 질서, 그리고 규범을 모범적으로 지킨 자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사회 규칙과 법을 잘 준수하는 무죄한 사람이며,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정직한 사람이다.” (이희학,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행동” 대한기독교서회, 219)
‘완전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타밈’도 문자적으로는 ‘도덕적인 흠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왜 편집자(P:제사장 문서 기자)노아의 영적 정체성을 이렇게 극찬하고 있을까요?
이어지는 11-13절과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이 구절을 보면 왜 노아를 택하시면서 그의 영적 정체성이 ‘완전한 자’, ‘의인’,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는지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 때에’의 영적 상태 때문입니다.
11절에서는 그 때를 ‘하나님 앞에서 부패하여 포악함이 가득한 시대’라고 고발했고, 12절에서는 ‘부패한 시대’라고 했으며, 13절에서는 ‘포악함이 가득한 때’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패하여 포악이 넘쳐난 시대가 바로 그때였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보고를 통하여 노아의 시대의 영적 기상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너무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사사기 18장에 있는 말씀 한 구절을 인용하겠습니다.
18:1-6절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 단 자손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부터 그들의 가족 가운데 용맹스런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정탐하고 살피게 하며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가서 땅을 살펴보라 하매 그들이 에브라임 산지에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유숙하니라 그들이 미가의 집에 있을 때에 그 레위 청년의 음성을 알아듣고 그리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하니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미가가 이러이러하게 나를 대접하고 나를 고용하여 나를 자기의 제사장으로 삼았느니라 하니라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 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하니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하니라”
사사기 18장은 마지막 기록 사사인 삼손 이후 시대를 그리고 있습니다.
삼손 이후 시대라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가나안 정복 이후 약 30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임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이해하지 못할 한 문장이 보입니다.
단 지파가 거주할 땅을 찾고 있다는 18:1절 하반절의 기록입니다.
12지파의 땅 분배는 이미 끝난 시점인 본문인데 단 지파가 땅이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19:40-48절을 보면 여호수아로부터 할당 받은 지역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요약하면 베냐민 지파의 서쪽 지역을 그들의 거주지로 허락받았다는 것입니다.
서쪽 지역이 어디입니까?
여호수아 19:40-4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일곱째로 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들의 기업의 지역은 소라와 에스다올과 이르세메스와”
‘소라와 에스다올, 이스세메스’라는 땅을 단 지파는 여호수아를 통해 할당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분명한 거주 지역을 할당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사 시대 말년까지 거주할 곳을 얻지 못해서 땅을 찾고 있다고 사사기 18:1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단은 땅을 찾고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의 단서는 사사기 1:34-36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주하였더니 요셉의 가문의 힘이 강성하매 아모리 족속이 마침내는 노역을 하였으며 아모리 족속의 경계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부터 윗쪽이었더라”
단 지파에게 할당 된 가나안에 살고 있었던 거민은 아모리 족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여호수아를 통해 기업으로 준 땅은 다른 지파들처럼 그냥 차려진 내놓은 음식과 같은 땅이 아니었습니다.
올라가 차지해야 하는 땅이었습니다.
다른 지파 공동체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올라가 땅을 차지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갈렙은 유다지파의 사람이었는데 그가 아낙이라는 엄청난 군사력으로 무장한 거민들에게 겁에 질려 아무도 나아가지 않으려는 헤브론을 차지하기 위해 85세의 노구를 이끌고 나아가 그 땅을 차지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은 여호수아가 준 땅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아모리 족속에게 쫓겨나는 수모를 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고 싸우러 나아갔다면 비록 철기를 갖고 있었던 강력한 아모리 거민들이었지만 그 땅을 차지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은 그 싸움을 포기했습니다.
싸움을 포기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차지할 믿음이 없었다는 말로 다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단 지파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지 않았던 유일한 지파였습니다.
땅을 차지하지 못한 단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산악 지대에서 일부가 살았고 또 일부는 에브라임 지파에 속해 있는 소렉 계곡 근처에서 빌붙어 살아야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을 포기한 단 지파는 엉뚱한 짓을 꾸미게 됩니다.
자기들의 힘으로 차지할 수 있는 약한 동족의 땅을 호시탐탐 엿보는 것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그런 곳이 있으면 그들을 물리적으로 쫓아내고 집단적으로 이주할 생각으로 그들은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해서 단 지파는 용맹스러운 용사 5명을 선발해서 자신들이 영구히 거주할 만한 땅이 있는지를 정탐하라는 명령을 주고 근처 지역으로 파송하기에 이릅니다.
무장한 이 5명의 단 지파 정탐꾼들은 에브라임 산지 쪽으로 이동 동선을 잡고 정탐을 나갔는데 그들이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이 미가의 집이었습니다.
미가의 집에서 유숙을 하게 된 5명의 정탐꾼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미가에게 고용된 사설 제사장 보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종교적인 제의를 드리고 있는 청년 제사장을 본 것으로 추측됩니다.
5명의 정탐꾼은 이 청년 제사장을 보고 종교적인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사장을 압박하며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너의 신분을 밝히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받은 레위 출신의 청년이 무장한 정탐꾼들의 질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자초지종을 밝힙니다.
떠돌다가 여기에 정착한 사설 제사장이라고.
그 청년의 신분이 제사장이라는 것을 알아낸 단 정탐꾼들은 가뜩이나 본인들의 출정에 대하여 불안하고 불확실한 안전의 문제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던 바였기에 다시 재차 강압적인 질문을 던지기에 이릅니다.
“우리들이 가는 길이 안전하고 형통할 것인가?”(삿 18:5)에 대해 말해 보라는 압력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받은 청년 제사장이 무엇이라고 답을 주었습니까?
사사기 18:6절을 소개합니다.
“그 제사장이 그들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하니라”
레위 출신의 제사장의 이 답은 전혀 하나님과는 관계없는 그의 생각대로 내뱉은 전형적인 종교적 멘트였고 말 그대로 요즈음 시쳇말로 말하면 영혼 없는 답변이었습니다.
18:5-6절을 조금 더 주술적으로 적용해 보겠습니다.
단 지파의 5명 정탐꾼들은 ‘우리들이 가는 길을 네가 종교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형통하게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유구무언입니다.
누군가가 목사인 저에게 이렇게 요구한 것입니다.
“목사님, 내가 오늘 누구를 사기 칠 터이니 잘 속아 넘어가게 기도해 주세요.”
“목사님, 내가 오늘 한 건을 해서 잘 되면 왕창 헌금할 터이니 빡세게 기도해 주세요.”
이해가 되십니까?
그런데 더 엄청난 일이 본문에 있습니다.
청년 제사장의 반응입니다.
그들의 이런 요구에 아멘 한 것입니다.
“너희들이 가는 길에 하나님이 먼저 앞서 가셔서 그 싸움을 이겨놓으실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가라.”
“이 싸움은 이긴 싸움이니 걱정은 붙들어 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싸움을 하나님의 이름을 빗대어 종교적인 멘트를 하는 청년 제사장과 그걸 위안 삼는 단 지파의 뭇 정탐꾼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합니까?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없이 단순히 종교의 이름으로 망가진 종교적 장사꾼과 장사꾼인지 진실한 성직자인지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나의 길만을 축복해 주는 성직자면 된다는 단 지파의 정탐꾼들을 보면서 반면교사의 은혜를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왜 사사 말기 시대를 끔찍한 시대로 정의하는지.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이 사는 것이 너무 정상적인 시대는 비극이요 참극이자 저주 받은 시대라는 교훈입니다.
왜 사사 후기 시대를 예로 들었습니까?
오늘 노아가 살았던 바로 그때가 바로 이런 시대였음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온 땅이 하나님 앞에서 부패한 때, 포악함이 가득한 때, 모든 자의 행위가 부패한 때가 노아가 살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어느 때입니까?
너무 직설적이라고 여러분이 에두를지는 모르겠지만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때가 바로 그 때입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랍스터와 같은 생명체를 우리는 갑각류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학자들에 의하면 랍스터는 거듭 껍질을 벗으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성질을 갖고 있는데 껍질이 너무 두꺼워져 탈피를 못하거나 탈각을 하자 못하면 결국 죽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참담한 비극은 죄의 껍질이 두꺼워져 그 죄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무감각해짐으로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삶으로 굳어질 때입니다.
바로 이런 시기를 빗대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밀어내 버리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하나님 앞에서 흉포한 자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그 분의 조명을 업신여깁니다.
반면 노아처럼 살려는 사람은 경성하려고 합니다.
민감하게 살려고 합니다.
오늘 새벽예배를 마치고 서재에서 수요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권미숙 집사에게 질문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목사님, 지난 주일예배 후에 정은영집사와 나눔을 가지면서 좀 생뚱맞은 의문이 생겼습니다. 서로 자료를 찾아보면서 머리로는 해석이 되지만 가슴으로는 와 닿지 않은 부분들이 있어서 질문해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죽음의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자신의 죽음조차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던 예수님의 마지막 말이 자꾸 가슴에 와 닿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다 받아들이셨으면서 왜 당신을 버리셨나이까라고 울부짖으셨을까요? 예수님의 고통스러웠던 마음에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울부짖음이 오늘 새벽 말씀 중 다윗의 탄원 시에 주여 어느 때까지오리이까라는 말과 오버랩 되어서 자꾸 가슴에 맴돕니다. 목사님의 영적인 해석이 궁금합니다.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예수님의 아픔이 느껴져서, 그 고통이 느껴져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건지 알겠는데 예수님의 마지막 한마디의 심경이 어떤 해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궁금했습니다. 좀 생뚱맞은 질문이겠지만 궁금증이 생겨서 여쭤봅니다.
질문을 접하고 집사님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했습니다.
답변을 한 뒤에 그 글을 제 블로그와 개인 sns에 기쁘게 공유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족을 달았습니다.
“오늘 새벽예배를 마쳤는데 섬기는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질문을 SNS로 보냈다. 질문하는 신앙이 귀해 진정성이 있게 답했다. 이런 교우가 동역자라 행복하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시대가 노아가 살고 있는 그 때를 연상하게 합니다.
특히 영적인 필드에서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노아의 시대, 바로 그때에 있었던 자들처럼 그냥 무감각한 영적인 상태로 인해 포악과 부패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영적으로 민감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