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6:1-4
제목: 난해 구절을 만날 때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학습되어진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근본주의적인 성경 무오설에 대한 확신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무오하다는 학설에 대해 접근할 때 전제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축자 영감적인 성경 무오설에 대한 비판적 성찰입니다.
성경은 약 40여명의 저자들이 길게는 4,000년, 그리고 짧게는 2.000년이라는 역사를 통해 기록된 편집물입니다.
그러다보니 시대에 따라 저자가 갖고 있었던 삶의 정황들이 다르다보니 사건에 이해나 기록에 있어서 판이하게 해석을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데 이미 오래 전에서 근본주의적인 학자들이나 목사들이 가르쳐 왔던 그대로 하나님께서 저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셔서 이제 내가 불러주는 대로 기록하라고 명령하셨고, 저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입어 불러주는 데로 기록하였기에 성경은 한 자도 틀리지 않는 완벽한 책이라고 우기는 일이 거의 정설로 굳혀져 있기에 한 발자국도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진보하는 성장을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성경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 심지어는 서로 배치되는 본문들이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서로 맞지 않는 본문의 대표적인 그 실례가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노아 홍수에 대한 기사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살피겠지만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6장부터 9장까지에 걸쳐 기록된 노아의 홍수 기사는 편집자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임을 알려주는 내용들로 넘쳐납니다.
그 한 명은 J기자(주전 950년 경 남 왕국 유다출신의 역사가)이고, 또 한 명은 P기자(주전550-450년 경 이스라엘의 초대 대제사장이었던 아론 계열의 여러 명의 제사장들)입니다.
이들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본 노아의 홍수라는 기사들이 6-9장에 편집되어 있기에 편집된 내용이 노아의 홍수 사건은 서로 맞지 않는 내용들로 넘쳐납니다.
굵직굵직한 내용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J기자가 본 방주에 들어간 동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창세기 7:2-3절입니다.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분명히 J기자는 방주 안으로 들어간 동물을 정결한 짐승 암수 7쌍, 부정한 짐승 암수 2쌍이라고 적시했습니다.
그러나 P문서 기자는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창세기 6:19-20절입니다.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P기자는 방주 안으로 들어간 동물이 모든 짐승의 암수 한 쌍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J 기자는 창세기 7:12절에서 비가 쏟아진 총일 수는 40일이라고 했습니다.
창세기 8:6-7절을 보면 비가 쏟아진 40일이 지난 뒤에 방주의 문을 열어 까마귀를 날려 보냈는데 온통 물로 뒤덮여 7일 만에 앉을 자리가 없음을 안 까마귀가 방주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이윽고 창세기 8:10-11절을 읽어보면 노아가 이후 7일을 기다렸다가 비둘기를 다시 방주에서 내보냈는데 곧 저녁때에 감람나무 잎사귀를 물고 왔다고 보고합니다.
즉 J기자는 노아의 홍수 기간이 총 94일임을 보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P기자는 전혀 다른 보고를 합니다.
창세기 7:11절과 창세기 8:13-14절을 동시에 읽어보겠습니다.
먼저 창세기 7:11절입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노아의 홍수는 노아의 나이 600세 2월 17일에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어 창세기 8:13-14절을 소개합니다.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둘째 달 스무 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노아의 홍수가 끝난 날이 노아의 나이 601세 2월 27일이라고 보고합니다.
그렇다면 노아의 홍수가 존재했던 총 날수는 1년 11일간이라는 말입니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차이가 있습니까?
같은 창세기 안에서 왜 이런 앞뒤가 맞지 않는 보고가 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노아의 홍수라는 연대기적인 사건의 해석자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 두 편집자가 살았던 시대로 달랐습니다.
그러니 구전으로 전수되어 온 창세기 기사들이 서로 다른 시대의 역사관을 갖고 있었고, 그러니 기록자들에 의해 다르게 해석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며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성경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적인 정황에 따라 말씀하시고자 하는 성경의 레마를 이해하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정황에 맞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해석하게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의 저자들의 해석인 다를 수밖에 없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직한 성경 이해 방법인 것입니다.
저는 지금 노아의 홍수에 국한하여 설명을 드렸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여럿 난해구절들을 접할 때마다 억지춘향으로 뜯어 맞추려는 촌스러움이 아니라,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성경 시대와 저자들의 삶의 정황들을 종합하여 본문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교우들에게 먼저 전제하며 오늘 창세기의 난해 구절을 해석해 보려고 합니다.
본문 1-2절을 읽겠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이 구절은 전통적인 성경 난해 구절 중에 대표적인 예입니다.
본문은 앞서 말씀드린 주전 950년 경 남 유다에 살고 있었던 어떤 지식층의 사람이 편집하며 기록한 문서인 J문서에 속한 구절입니다.
J문서의 특징은 선지자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윤리적, 도덕적, 신학적 이슈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기에 이런 사상적인 기반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신학적 이슈에 대해서 거론하는 것이 특징이었기에 본문도 바로 이런 J기자의 사상적 배경을 무시할 수 없음을 전제하며 본문 이해를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할 때’라고
여기에 기록된 ‘사람’은 히브리어 원어로 ‘아담’입니다.
‘아담’이라는 표현에 주목해 보십시다.
아담은 ‘사람’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만들어진 원료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땅’이라고 번역된 ‘아다마’ 즉 ‘흙’이었음을 우리는 창세기 2:7절에서 살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렇다면 흙으로 만들어진 아담이 그 흙으로 이루어진 땅에서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지극히 단순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전반절까지는 그런 대로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1절 후반절입니다.
‘그들에게서 딸들이 났다.’
우리나라 번역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는데 원어 성경은 어순이 조금 다릅니다.
‘딸들이 그들에게서 태어났다’(우바노트 율레두 라헴)로 번역해야 맞습니다.
다시 말하면 딸이 주어라는 말입니다.
말장난이 아니라 의미부여에 다른 관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해석의 의미는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하던 그 시기에 사람들이 주목하던 관점이 ‘딸’(여성)이라고 하는 대상으로 바뀌었음을 시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대단히 긍정적으로 딸 즉 여성에 대한 주목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지만 본문은 유감스럽게도 그 반대입니다.
J기자 보았던 원시 히브리 공동체의 타락의 시초는 여성에게 관심을 갖는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해석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본문 2절을 읽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이제 우리는 이 어렵고 어려운 본문을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본문 해석의 중요한 열쇠입니다.
대체적인 학자들의 견해를 세 가지로 소개하겠습니다.
① ‘하나님의 아들들’은 경건한 셋의 후손들이며 ‘사람의 딸들’은 경건하지 못한 가인의 후손으로 이해하는 견해입니다.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해석자들이 주장하는 학설입니다.
②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회적으로 남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특권층(왕이나 통치자)을 가리키며, ‘사람의 딸들’은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지칭한다는 견해입니다.
이 해석은 본문이 고대 근동에 죄악 된 인간상을 그리고 있는 홍수 이전 사건을 너무 비약한 면이 있어 부분적으로만 수용하는 학설입니다.
③ ‘하나님의 아들들’은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높은 천상의 존재(천사 혹은 악마)들이며, ‘사람의 딸들’은 지상의 존재들로 보는 해석입니다.
이 학설은 고대 근동에서 널리 알려진 거인족 신화를 의존하고 있는 학설입니다.
진보적인 성향의 학자들은 민수기 13:33절을 근거하여 이 주장에 대해 많이 지지하는 편입니다.
첫 번째 학설은 가인의 후손들과 셋의 후손을 대립의 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기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셋의 후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가인의 후손을 ‘사람의 딸들’로 성경이 한 번도 언급하고 있지 않기에 이런 영적인 해석에 대해 시선이 곱지 않은 학자들도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앞서 해석한 1절을 전제하여 이 세 가지 학설 중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① 번 학설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주지했다시피 성서적인 지원 구절이 많이 않아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1절에 기록된 여성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여 ①번 주장에 대해 접근해 보려고 합니다.
신명기에서 이렇게 명명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7:3-4절입니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이방 여인과 교제하거나 섞이지 말라는 경고성 율법입니다.
이 당시는 가나안 입성 전이었기에 이런 율법적인 제한 조치가 필수적인 때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순수성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정황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합니다.
땅의 사람들이 많아진 노아 홍수 이전의 영적 상태는 대단히 악했던 시기로 이해됩니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요?
왕대일 교수의 해석을 하나 소개합니다.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았다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히브리어 문장은 이렇게 옮길 수 있습니다. ‘보았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왜냐하면 그 여인들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 딸들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보아서 아름다웠던 것이 아니라 아름답기에 보았다는 뜻이다.”(왕대일, “창조 신앙의 복음, 창조 신앙의 영성”, 대한기독교서회, p,183.)
조금 직설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자기 아내로 삼았다는 이 말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보기에 좋은 나무열매를 따먹었다는 말과 닮을 꼴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몸을 보고 마구잡이로 자기들의 아내를 삼았다는 말에서 부정적인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위의 책, 같은 페이지)
딸들이 그들에게서 났다는 본문 1절이 주는 신학적 서사는 죄악이 관영해지기 시작한 때가 사람이 많아진 시대에 여성을 여성의 인격으로 존중하고 본 것이 아니라 여성을 미의 관점에서 상품화시키며 욕망 분출의 대상으로 보기 시작함에 있다는 것을 J 기자가 고발한 셈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육감적인, 세속적인 미를 추구하기에 혈안이 된 시대가 노아 홍수 이전의 영적 상태였다는 의미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렇게 타락을 시작한 사람(아담)에게 하나님이 내리신 경고가 있습니다.
1) 인간이 제한적인 존재로 규명되게 하는 경고가 3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엄위하신 경고성 선언을 나누어 보십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육체적인 탐닉을 목적으로 살자, 하나님은 내가 너희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3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영이 떠난 인간을 ‘바싸르’(육신, 생식기)라고 지칭했습니다.
원래 인간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창세기 2:7절을 다시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아마다)으로 사람(아담)을 지으시고 생기(니쉬마트 하임)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네페쉬 하야)이 되니라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 들어가 내주하는 존재인 ‘네페쉬 하야’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기자는 인간이 ‘네페쉬 하야’ 즉 ‘생령’이 아닌 하나님의 영이 떠날 수 있는 ‘바싸르’에 지나지 않음을 경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존재는 그냥 고깃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이것도 무시무시한 경고인데 또 하나 결정적인 인간의 자화상을 본문 기자가 남깁니다.
인간의 연수가 120년으로 단축될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요셉은 110세, 모세는 120세, 여호수아는 110세, 아론은 123세를 삽니다.
900년을 살 수 있었던 인간의 수명 단축이 본문에서 제시됩니다.
반드시 죽는 존재로 각인시켜주는 것이 본문이 주는 신학적 교훈입니다.
2) 인간은 언제나 네피림(떨어지다:나팔)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4절이 알려줍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네피림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네피림’은 ‘나팔’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나팔’은 떨어지다, 타락하다, 넘어진다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욕정의 결과로 태어난 자들의 자식들이 네피림이라는 말입니다.
영적 결론이 의미심장합니다.
어떤 구약학자는 네피림을 용사로 번역하는 것에 반대하고 ‘깡패, 건달’등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지만 정서적, 신앙적 공감은 합니다.
그러므로 4절에 등장한 명성은 긍정적인 명성이 아니라 부정적인 명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오늘 21세기 인간의 힘은 마치 네피림 그 자체인 것 같습니다.
인간의 이름을 하늘까지 내려는 시도에 모두가 열광합니다.
그 누구도 네피림 인간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 있는 자들은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고 있는 인간이 ‘바싸르’ (육체)로 머물고 있는 한 반드시 넘어지고 쓰러지는 ‘네피림’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시인의 고백은 시의적절합니다.
시편 90:10절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않는 한, 나는 네피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싸르’ 혹은 ‘네피림’을 살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네페쉬 하야’ 즉 생령으로 신앙적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