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16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스물여덟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5:1-32 제목: 아담의 계보 마태복음 1장은 족보로 시작합니다. 우스갯소리이지만 신약성경 맨 첫 장이 족보로 시작된다는 점은 매우 유감입니다. 세상에 족보처럼 읽기 싫은 책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려서 전주 이 씨 익양군 파인 저의 가정 족보 책을 보다가 그냥 선친과 우리 가족에 대한 계보만 찾고 덮었습니다. 정말, 재미없는 책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 중에 역대상을 보면 짜증이 날 정도로 지루한 사람이야기가 연이어 나옵니다. 읽기 자체가 어려운 단어들로 구성된 족보를 정말 읽기 어려운 책입니다. 역대기라는 성경은 포로에서 돌아온 히브리 공동체가 다윗 왕조인 우리들이 왜 멸망을 당했는가를 곱씹다가 그것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와해되었기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해서 시급하게 Who am I? (나는 누구인가?) 와 What is Israel?(이스라엘은 무엇인가?)를 질문했고 이 물음에 답해야 했기에 그들이 족보를 찾아야 했습니다. 정체성 파악을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기록한 역사서가 역대기 역사서이다 보니 계속 사람 이름을 반복하고 있어 여하튼 읽기가 쉽지 않은 책입니다. 이렇게 어렵게, 어렵게 구약을 통과했는데 마태복음 1장은 정말 왕 짜증입니다. 1장 밖에는 안 되는 짧은 지면이기는 하지만 신약성경에 첫 장을 장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그 지긋지긋한 악몽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마태복음 1장을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구속사의 족보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태의 보고에 의하면 이 장에서 시작된 계보(톨레도트)가 아브라함이라는 데에 방점을 찍고 있기에 아브라함이라는 족장에서부터 히브리 공동체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결코 그렇게 이해하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태가 소개한 족보보다 더 세밀하게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하고 보고가 있는데 누가복음 3:23-38절입니다. 두 구절만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3:23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누가는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였던 요셉으로부터 거꾸로 족보를 계수합니다. 누가복음 3:34-38절을 읽어드립니다. “그 위는 야곱이요 그 위는 이삭이요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 그 위는 데라요 그 위는 나홀이 그 위는 스룩이요 그 위는 르우요 그 위는 벨렉이요 그 위는 헤버요 그 위는 살라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아박삿이요 그 위는 셈이요 그 위는 노아요 그 위는 레멕이요 그 위는 므두셀라요 그 위는 에녹이요 그 위는 야렛이요 그 위는 마할랄렐이요 그 위는 가이난이요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이 구절을 보면 주목할 것이 보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아담까지의 계보로 등장하는 인물이 21명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태복음 1장에서 언급한 아브라함의 그 위로 21대가 있다는 말입니다. 다만 오늘 본문 4-32절을 살펴보면 21대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노아까지 7대까지만 소개하고 있다는 점을 선지식으로 갖고 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제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계보의 이름들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셋→에노스→게난→마할랄렐→야렛→에녹→므두셀라→라멕→노아 이 족보의 열거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의 중요한 영적 교훈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인간은 반드시 죽는 존재임을 다시 한 번 알려줍니다. 추적해 보십시다. 셋의 향수는 930세입니다. 에노스의 향수는 912세였습니다. 게난은 905세, 마할랄렐은 910세, 야렛은 895세, 에녹은 365세, 므두셀라는 969년, 라멕은 595년, 노아는 950세였다고 창세기 기자는 보고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수명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장수를 한 셈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900여 년을 살았다고는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때가 되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담의 계보를 통해 우리들에게 창세기 기자가 알려주는 영적 보고는 인간은 에노쉬 임을 알려준 것입니다. 수명의 짧고 김은 사람마다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아들이었던 므두셀라는 969년이라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가장 장수한 사람인 반면, 그의 아버지였던 에녹은 365세라는 당시의 수명으로는 가장 단명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 존재임을 다시 한 번 뼛속까지 느끼게 해주는 텍스트입니다. ‘메멘토모리’라는 라틴어가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군인들이 참전하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당연히 승전하고 오는 로마의 장군들을 향해 로마 시민들은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때 승리의 주역인 로마의 장군이 노예를 시켜 큰 소리로 외치게 한 문구입니다. 번역하면 ‘나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지금은 내가 승리했지만, 언젠가는 내가 패배자가 되어 즉음을 맞이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방자하지 말자는 의미 있는 다짐을 한 것이지요. 이 정신이 로마를 그래도 오랜 시간 버텨오게 한 정신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교훈을 주었습니다. 누가복음 12:16-21절입니다.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아담을 비롯하여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간 사람은 에녹 말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자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2) 장수하는 것이 곧 잘 산 인생이 아님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앞에서 잡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노아로 지칭되는 10대 동안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거의 900년 가까이 장수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잣대로 생각할 때 장수가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900세를 향유하고 죽었다는 점은 대단한 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기자는 이런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 역설의 내용을 본문에 적시해 놓았습니다. 10대에 걸친 아담의 족보 중에 가장 짧은 수명을 살았던 에녹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에녹의 수명은 365년이었습니다. 여타 다른 선조와 후손들의 면면을 생각해 볼 때 에녹의 인생은 차라리 저주라고 말해도 될 정도로 단명했습니다. 365년이니 아니 그렇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반전이 무엇입니까?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 에녹을 뺀 나머지 인물의 이력서는 이렇게 소개됩니다. 몇 세에 아들을 낳았고, 몇 세에 죽었더라. 심지어 에녹의 아들의 이력은 정말로 웃픕니다. 본문 25-2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세기 기자가 말한 므두셀라의 이력 보고는 헛헛하기 그지없습니다. 풀면 이런 말입니다. “징글맞게 오래 사면서 한 일이라고는 자식만 낳고 영향력이 있는 일이라고는 1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쌀만 축내다 갔다.” 그런 반면 비록 365세를 살았던 그의 아버지 에녹을 보십시다. 본문 21-24절을 복기하겠습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저는 이 구절이 주는 영적인 감동이 너무 크다고 생각합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65세에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런 뒤,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보고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의 편협적인 해석으로 이렇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합니다. 에녹은 자식을 낳기까지는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았다가 아들을 낳은 후에 회심하여 하나님과 드디어 동행하기 시작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트집 잡기에 가까운 해석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365년이라는 에녹의 연대기를 통해 우리들이 적용해야 하는 은혜는 그는 삶의 매 1년도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은 해가 없었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21-24절이라는 단 네 절밖에 안 되는 짧은 구절에 ‘봐이트할렉 하녹 에트-엘로힘’ 즉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다.’는 문장이 두 번이나 연속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구는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에녹의 전 생애의 습관이자 삶이었음을 강조하는 대목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창세기 기자의 이 보고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교훈을 줍니다. 관련하여 글을 쓴 왕대일 교수의 주석을 소개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이 에녹을 찾아오셨다는 말로 새겨야 합니다. 쓰기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쓰고, 읽기는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하였다.’라고 읽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찾으십니다.” (왕대일, “창조신앙의 복음, 창조신앙의 영성”, 대한기독교서회, p,151) 기막힌 통찰입니다. 왕 교수의 신학적 해제를 수용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오래 산 것이 잘 산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에 합당한 대답을 하는 것이 잘 산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동행(에트-엘로힘)하는 삶이 잘 산 삶인 것입니다. 3) 영향력이 있는 삶을 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24절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에녹이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데리고 가셨다는 성경적 근거입니다. 여기에 기록된 ‘세상에 있지 않게 되었다’는 히브리어 ‘에이넨누’는 원어적으로 표현하면 사라졌다는 의미보다는 있지 않았다가 더 가까운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왜 에녹이 있지 않았을까? 복음적으로 해석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땅에서 당신이 있는 처소로 데리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이 ‘에이넨누’를 훗날 믿음의 후손인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히브리서 11:5절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그렇습니다. 에녹이 이 땅에서 살면서 믿음의 후손들에게 남긴 믿음의 영향력이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영향력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하용조 목사께서 지은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매일 에녹을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산보하시면서 행복해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중에 하나는 에녹과 거니시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그날도 하나님은 에녹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에녹아, 나다 우리 산보가자. 그리고 함께 거니셨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하나님께서 에녹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셨는데 너무 좋으셨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렇게 거니셨는데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줄을 모르시고 에녹을 보내주시는 시간을 잃어버리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에녹아. 기왕지사 이렇게 되었으니 그냥 우리 집으로 가자.” 동화 같은 메시지를 읽다가 심쿵했습니다.“ 만들어낸 이야기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에녹과 함께 있을 때 너무 좋으셨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한 에녹이라고. 나는 지금, 그리고 오늘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까? 훗날 내 후손들이 나를 보면서 회상할 때, 참 선한 영향력을 내게 남긴 분이셨어! 라고 추억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아담의 족보를 들추어 보면서 내 심령을 뒤흔들어 놓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중에 누구입니까? 우리는 물론 노아를 앞으로 살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만 상정하고 해석할 때 므두셀라의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그의 아버지 에녹의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아담의 계보를 통한 설교는 이 질문에 답하게 해줍니다. 답을 내는 당사자는 바로 여기에 있는 여러분입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