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스물일곱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4:25-26 제목: 비로소 서론) 나태주 시인의 시를 한 편 낭송하겠습니다. 비단강 (나태주, “풀꽃”, 지혜 간, 153.) 비단강이 비단강임은 많은 강을 돌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겠습디다 그대가 내게 소중한 사람임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겠습디다 백 년을 가는 사람 목숨이 어디 있으며 오십 년을 가는 사람 사랑이 어디 있으랴…… 오늘도 나는 강가를 지나며 되뇌어 봅니다. 시인의 시구를 들여다보다가 이 소절에서 무릎을 쳤습니다. “백 년을 가는/사람 목숨이 어디 있으며/오십 년을 가는/사람 사랑이 어디 있으랴”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는 권사님 중 한 분이 제게 몇 년 전에 이런 기도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 재수 없으면 100살을 산다는 데 절대로 그런 재수가 나한테 있지 않도록 기도해 주세요.” 농 반 진 반으로 하신 말인 줄을 알았지만 듣고 나서 많이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100세를 사는 것은 제가 생각해도 끔찍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인간을 적당히 죽게 만드신 것도 하나님의 참 기막힌 은혜의 프로젝트인 것이 분명합니다. 인간은 아담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담은 통상 ‘사람’이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 명사입니다. 그런데 이 아담의 창조 재료가 창세기 3:19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흙입니다. 흙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명사가 바로 ‘아다마’입니다. 창세기 기자의 대단한 언어유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1,000년, 10,000년을 살 수 있는 영원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다마’에서 왔기에 ‘아담’인 것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을 보면 아담과 같은 어원인 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본문 26절을 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셋의 아들 이름입니다. ‘에노스’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아나쉬가 어원입니다. 풀이하면 ‘깨지기 쉽다.’ 혹은 ‘약하다’라는 뜻입니다. ‘아나쉬’라는 동사가 고유명사로 바뀌면 본문에 기록된 셋의 아들인 ‘에노스’가 됩니다. ‘에노스’는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특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연약한 인간, 깨지기 쉬운 인간, 죽는 인간’등등의 뜻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왜 셋이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요? 설명을 위해서는 셋을 추적해 보아야 합니다. 본문 25절을 읽겠습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이 구절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셋은 아벨의 대체적인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계보를 통해 당신의 구속사를 이루시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이 아들이 어떤 아들인지 창세기 5:3절이 밝힙니다. “아담은 백 삼십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우리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만들어진 피조물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제시한 창세기 기자는 셋이 아버지 아담의 형상을 닮은 채로 태어났음을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셋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라는 말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계보가 가인이 아니라 셋임을 선포한 셈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셋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어 ‘셋’(쉐트)은 ‘기초’, ‘토대’, 혹은 ‘대체자’ 등등의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장신대 교수인 하경택은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그의 이름 ‘쉐트’는 히브리말로 ‘기초, 토대’를 의미한다. 셋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새로운 토대를 이룬 인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인과 라멕으로 이어지는 불행한 ‘죄악의 역사’와 셋과 노아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철저하게 대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하경택,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1”.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111-112.) 이렇게 하나님이 선택했던 구원의 계보가 바로 셋의 계보입니다. 이 셋의 계보를 주목할 때, 우리는 그 다음 절에서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앞에서 소개했던 26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셋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본인이 가인을 대체하는 기초적인 계보라는 것을. 그러기에 그는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었던 것입니다. 그는 아들에게 이것을 교육한 것입니다. 너는 반드시 깨어지고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식하고 사는 아들이 되라고 경종시킨 것입니다. 그 경종은 이렇게 영적인 정리를 이루게 합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에노스가 태어나자 그때부터 사람들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음을 알립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감리교 신학대학교 왕대일 교수의 주석을 소개합니다. “‘리크로 베쉠 야웨’ 즉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셋과 에노스 때부터 하나님을 예배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왕대일, ”창조신앙의 복음, 창조 신앙의 영성“, 대한기독교서회, 141) 그렇습니다.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하나님께 예배하기 시작했다는 해석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의 의견에 저도 동의합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 소절만 소개하겠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엄청난 시인의 갈파입니다. 꽃에게 이름을 불렀다는 말은 화자가 그 꽃을 인격적으로 대우했다는 말입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인격적 활동입니다. 룻기 4:1-2절을 소개합니다.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기업을 무를 일순위의 친족을 부를 때 쓴 명칭이 ‘알모니’ 즉 ‘어떤 사람’ 혹은 ‘such a one' 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아무개’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를 향하여 ‘아무개’라고 불렀습니다. 무슨 의도입니까? 비인격적 관계임을 폭로한 것입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임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바울이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4:6절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예배가 무엇입니까? 아빠 아버지를 부르는 행위입니다. 예배는 그래서 인격적인 행위입니다. 아빠 아버지를 부르는 일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에노스가 탄생되면서부터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조금은 더 세밀하게 한 가지의 교훈을 더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에노스의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셋입니다. 그는 가인을 대체하는 존재가 자기 자신임을 알았던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26절 본문에 있는 한 단어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설교 제목인 ‘비로소’입니다. 비로소 무엇을 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 즉 야웨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 문장을 앞선 창세기 4:1-4절에 기록된 가인과 아벨의 제사와 관련하여 해석하면 혼돈스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인과 아벨도 하나님께 제사 즉 예배를 드렸는데 왜 굳이 26절에서 비로소 셋과 에노스의 때에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느냐에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고든 웬함이라는 신학자가 이런 해석을 남겼습니다. “이 두 사람(셋과 에노스)은 예배라는 행위에서 기도라는 수단을 통해 처음으로 하나님을 야웨라고 부르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고든 웬함, “WBC-창세기 주석, 솔로몬 간, 256) 웬함의 해석을 조금 쉽게 풀겠습니다. 에노스를 셋이 낳기 전에 주변 사람들도 종교적인 행위들을 행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 소위 말하는 예배를 드릴 때 야웨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예배를 드린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라는 가증한 제사를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제시한 단어가 ‘시작했다’는 히브리어 단어 ‘후할’인데 이 단어가 ‘더럽히다.’라는 단어로 쓰인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에노스가 태어나기 전까지 셋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시했거나 이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인격적으로 야웨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픔을 뼈저리게 느낀 셋은 아들을 낳은 뒤에 이름을 ‘모든 인간은 연약한 존재임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 죽게 되는 존재’라는 에노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그것을 인식했던 그때부터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인격적인 예배자가 되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오늘 수요일 예배를 통해 주시는 레마를 이렇게 받겠습니다. ※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진정성 있게 깨달을 때 우리는 진실한 예배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두 베드로를 살피겠습니다. 누가복음 5:5-8절입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베드로가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을 때까지는 주님을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노력했던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너무 무기력한 것임을 깨닫는 순간, 그는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두 번째 구절을 소개합니다. 요한복음 21:17절입니다.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을 가야바의 법정에서 맹세하며 저주하면서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주님은 세 번째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왜 굳이 세 번입니까? 베드로가 저질렀던 세 번의 부인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의지로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사수한 것이 아니라 부인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의도적으로 베드로에게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세 번에 걸친 집요한 깨우침을 주께서 베드로에게 궁극적으로 부여하신 미션이 무엇입니까? “내 양을 먹이라”였습니다. 전인격적인 예배자로 만들라는 미션이었습니다. 기억하십시다. 베드로와 같은 영적인 부서짐이 없이는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없음을. 우리가 에노스임을 인정할 때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전인격적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내 안에 가득 차 있을 때, 나는 예배자로 설 수 없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20세기의 예언자라고 부르는 아이든 토저의 글에 담긴 메시지입니다. “모세가 떨기나무에 불은 붙었지만 소멸되지 않는 불꽃을 보았을 때, 그는 떨기나무에 예배한 것이 아니라, 그 떨기나무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에 예배한 것입니다.” (아이든 토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짜 예배자”, 생명의 말씀사, 160.)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우리는 아주 가끔 떨기나무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떨기나무를 붙들면 그 떨기나무를 통해 내가 무엇인가를 행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 떨기나무를 붙든 나를 대단한 존재로 여기곤 합니다. 에노스가 탄생하기 이전까지 수많은 사람들은 떨기나무에 열광했습니다. 야웨 하나님은 무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노스가 탄생하자 셋과 에노스는 떨기나무가 아닌 떨기나무에 영광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며 그 분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도 비로소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여러분은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인격적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그러려면 나는 깨지기 쉬운 에노스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반드시 죽는 존재임을 토로해야 합니다. 내가 내 안에 있는 경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에노스임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예배자가 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