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수요 예배] 가인의 족보에 얽힌 이야기2024-03-08 17:07
작성자 Level 10

2021년 5월 26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스물여섯 번째 강해)

 

본문창세기 4:16-24

제목가인의 족보에 얽힌 이야기

 

가인이 에덴동쪽에 거하면서 그의 후손들이 늘어났음을 J기자가 의도적으로 본문에 적시해 놓고 있습니다.

17절을 봅니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놋 땅에 거주하면서 가의 아내와 동침해서 에녹을 낳았다고 17절에서 보고하고 있습니다.

17절을 통해 우리들이 질문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가인의 아내가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의 답을 내놓습니다.

 

① 하와가 낳은 딸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창세기 5:4절을 봅니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이 구절에 근거하여 아담과 하와는 많은 자녀들을 낳았기에 그 중에 한 명인 딸과 결혼했다는 주장입니다.

결국 근친결혼을 했다는 말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근친결혼을 하는 것은 전혀 문화적윤리적인 문제가 아니었기에 가인이 누이 중에 한 명과 결혼을 해서 낳은 아들이 바로 에녹이라는 주장입니다.

 

② 가인의 아내는 창세기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가족의 여인이라는 주장입니다.

 

창세기는 구속사의 본류인 아담 가족을 중심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다른 가족의 이야기는 생략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어떤 것이 맞는 주장인지에 대하여 확실하게 말씀들 수 없습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더 중요한 것은 이 스토리의 핵심적인 가치입니다.

J기자는 가인의 족보 소개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기에 가인의 아내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소상히 밝히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메시지는 가인의 족보에 얽힌 신학적 메시지입니다.

이제 이것을 살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17절 후반절-19절을 읽겠습니다.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가인이 낳은 아들은 에녹입니다.

이 에녹은 이랏을 낳았다고 했고이랏은 무후야엘을 낳았습니다.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습니다.

라멕은 두 여인을 아내로 취하였는데 아다와 씰라였습니다.

아다를 통해서는 야발과 유발을 낳았음을 밝히고 있고씰라를 통해서는 아들 두발가인을 낳았고딸로는 나아마를 낳았다고 본문에 보고하고 있습니다.

조금 정리를 하겠습니다.

가인에녹이랏므후야엘므드사엘라멕야발유발두발가인나아마로 이어지는 가인의 족보를 열거한 이유는 신학적 조명 때문입니다.

가인이 낳은 에녹이 무엇을 남겼습니까?

17절 후반절을 봅니다.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이 구절은 번역이 잘못되어 있어 바로 잡습니다.

에녹은 성을 쌓았으며 그 자신의 이름을 따라 그 도시의 이름을 에녹이라 하였더라

그렇다면 에녹이 남긴 것은 도시 건설입니다.

도시 건설이라는 문명의 시작이 에녹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창세기 기자는 알립니다.

이제 본문 20-2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보고된 것만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다가 낳은 야발은 가축을 치는 목축업의 조상이 되었음을 밝히고유발은 음악인의 조상되었다고 보고하고 있으며두발가인은 기계를 만드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는 보고입니다.

왜 이 내용을 소상히 소개했을까요?

에녹에 의해 시작된 문명 도시에서 문명의 발전이 시작되었음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살피고 나니 결론이 나옵니다.

이 땅에 문명을 발전시킨 자들의 원류가 가인의 후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보고를 통해 후손들인 우리가 직시해야하는 두 가지의 신학적 조망이 있습니다.

 

1) 이 땅에 주어진 문명의 이기는 하나님의 피조물은 인간이 만들었다는 조망입니다.

 

문명은 하나님의 피조 존재인 인간이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든 문명이 안전할 수 있는 전제는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농업을 예로 들겠습니다.

이 땅에 심어진 모든 곡식은 하나님이 돌보셔야 됩니다.

때를 따라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셔야 합니다.

적당한 햇빛도 주셔야 합니다.

또 어떤 때는 바람도 적절하게 비추셔야 합니다.

광합성이 너무 많아도 분제고적어도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키우셔야 합니다.

저는 인문학에 대단히 관심이 많습니다.

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음악이라는 도구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군들을 너무 많이 압니다.

문화의 영역에서 철저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적절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는 참 많은 주의 백성들이 있음을 압니다.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이세상은 오직 나 한사람과

내가 아닌 수많은 너로 되어 있다

왜 그걸 일찍 알지 못했을까?

가장 좋은 인생은

나한테보다는 너에게 잘하며 사는 인생이다

왜 또 그걸 진즉 알지 못했까?

그래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살자.

나태주 시인이 쓴 너 하나만 보고 싶었다라는 시집에 실린 지금이라도 알았으니라는 시입니다.

글을 읽다가 왜 사람이 인문학적인 소양이 있어야 하는지왜 사람이 시를 읽어야 하는지왜 사람이 문학을 소홀히 하면 안 되는지를 다시 한 번 절감했습니다.

인문학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듭니다.

인문학은 사람을 아름답게 합니다.

이런 인문학적인 소양을 갖고 있는 시인으로 참 많은 선한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나태주님은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어떤 영역이든 이 땅에 존재하는 일체의 문명은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있을 때 안전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현실이 어떻습니까?

그렇습니까?

이제 후자를 살피겠습니다.

 

2) 문명은 하나님의 피조물이 만들었지만 인간 스스로의 작품이라는 조망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이 없이도 우리들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삽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방해자라는 착각을 범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문명은 방자하고 교만하며 결국은 바벨탑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통제하지 않는 문명의 이기는 대단히 위험할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것이 산업이든(목축), 그것이 음악(문화)이든그것이 기계문명(과학)이든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통제하지 않는 산업 전반이 무너질 때 어떤 위기가 우리 인간에게 자초되는지를 지금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어떤 괴물입니까?

생태계의 무너짐생태계 질서의 교란이라는 인간 욕심의 총체로 나타난 괴물이 아닙니까?

음악 즉 문화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통치하지 않는 문화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들이 여기저기에 우후죽순으로 발생했습니다.

음악의 타락표현의 자유를 빙자한 외설적 문화의 도래가 지금 젊은 세대를 병들게 하는 직격탄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게 문명 즉 과학은 어떻습니까?

과학은 이제 신의 자리를 꿰어 찬지 이미 오래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런 이유 때문에 지금을 호모데우스의 시대라고 정의한다 했습니다.

고대인들이 신을 의지한 이유는 순전히 자기네가 살고 있는 세상을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지금은 그런 통제력이 인간에게 있기에 신이 필요 없을뿐더러인간이 곧 신이 될 수 있다는 근거인 셈이다.”(팀 켈러, “부활을 입다,”, 두란노, 2021,pp,18-19)

히브리대학교의 교수인 유발 하라리의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감을 갖고 말한 유발 하라리부터가 하나님의 통제를 무시합니다.

그는 동성애자입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하나님을 거슬리는 일을 할 것을 성경이 이미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2:18-19절입니다.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인간이 만든 문명이 우상의 내용들로 전락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바울도 말했습니다.

로마서 1:21-23절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의 통제를 받기 싫어하는 인간의 문명을 우상화 만드는 작업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성경이 경고하고 있었던 내용입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은 태생적으로 하나님의 통제를 싫어하며 거부하는 존재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치명적인 죄악을 그대로 드러내는 민낯을 보게 됩니다.

이제 본문의 후반부인 23-24절을 읽겠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이 구절을 읽고 있노라면 하나님의 통제를 받지 않으려는 백성들의 극악함을 알게 해 줍니다

라멕이 자기 아내들을 앞에 두고 노래하는 소위 말하는 라멕의 노래를 들어보십시다.

라멕이 무엇이라고 자랑을 떠벌입니까?

나에게 상처를 입힌 자를 내가 죽였다고 말합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나에게 해를 입힌 소년까지 죽였다고 말합니다.

소년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예레드는 소아를 말합니다.

이 구절을 읽다가 라멕 같은 자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힌 미얀마팔레스타인예루살렘의 예레드가 생각났습니다.

예레드를 죽인 것을 보란 듯이 아내들에게 자랑하는 라멕이 기자에 의해 여지없이 소개됩니다.

그리고 압권은 24절입니다.

가인을 죽인 자에게 처해지는 징벌은 7배였지만나를 건드리는 자는 77배의 징벌로 보복하겠다는 무자비함이 그대로 고발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얻어야 할 반면교사의 은혜를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 죄의 흔적은 답습된다는 교훈이자 경고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에 대한 소개는 바로 이 본문이 유일한 본문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구속사의 역사에서 배제된 불행한 계보입니다.

우리가 다음 수요일에 살필 4:25-26절에 등장하는 셋과 에노스가 구속사의 정면 무대에 등장합니다.

가인의 계보는 들러리와 같은 전혀 존재감이 없는 그냥 있으나 마나 했던 계보였고도리어 하나님의 전 역사를 방해한 계보로 성경의 역사에 기록됩니다.

왜 이런 비극의 주체이자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계보일 수밖에 없었을까요?

가인이라는 존재의 죄에 대한 흔적이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해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계보에 흐르는 저주를 끊으라고 말했던 모 목사의 지론에 따라가지 마십시다.

신앙의 맥은 철저히 신앙적인 개인에 의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죄를 답습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특히 라멕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왜 우리가 죄에 대하여 경계해야 합니까?

내 주변에 있는 자들이 보고 배울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보고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라멕은 조상이 저지른 하나님을 무시하던 일을 그대로 답습한 것입니다.

그것도 더 가중된 범죄의 농도로 포장되었다는 데에서 소름이 끼쳐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경종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죄는 흔적을 남겨 그에게 가까이 있는 자들로 하여금 그 죄를 이전보다 더 심하게 답습하게 하는 위험이 있다는 경고 말입니다.

이번에 팔레스타인을 공격하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왠지 모를 격한 분노가 임했습니다.

네타냐후가 우리 이스라엘을 건드리는 경우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인가를 약소한 팔레스타인에게 보여 준 것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은 제 2차 세계대전에 최대 피해국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은 반유대주의라는 히틀러의 조작된 정서에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픔을 경험한 나라가 이제는 힘으로 팔레스타인의 무장해제 된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이런 모순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최대의 피해를 물리적인 힘에 보았던 민족이 그 물리적인 힘으로 보복하고 있습니다.

또 다시 나라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포장된 미끼를 던져서 말입니다.

배운 대로 하는 인간 자학성의 모델을 이번 11전쟁이 보여 주었습니다.

기억하십시다.

인간은 피조 된 존재입니다.

피조 된 존재가 하나님의 통제를 받지 않을 때 그것이 가인의 나라가 된다는 것을.

앞으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무시무시한 가인의 나라가 펼쳐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의 통제는 자유를 빼앗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있을 때 인간은 가장 안전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십시다.

내가 하나님의 품 안에 있을 때까지는 참 안식을 얻을 수 없었다.”는 어거스틴의 고백이 오늘 우리들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시인이 노래합니다.

시편 91:1-2절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