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수요 예배] 충돌할 때는 충돌하라2024-03-08 17:05
작성자 Level 10

2020년 9월 30일 수요 기도회 설교 (고린도후서 스물다섯 번째 강해)

 

제목충돌할 때는 충돌하라

본문고린도후서 6:14-7:1

 

서론)

 

한자 단어로 역()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한자는 거스를 ’ 혹은 거꾸로 이라고 풀이됩니다.

해서 이 단어는 곧장 부정적인 단어로 그 용도가 사용되곤 합니다.

역적역모역경반역 등등이 그 예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이 단어의 쓰임새가 아주 부정적인 단어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긍정의 단어로도 종종 사용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역전역발상역공역설역습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이 逆 자가 들어간 단어 중에 긍정적인 경우거의 모든 단어의 공통적인 특징이 상투적이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어떤 의미로 볼 때이 점은 신앙의 여정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같은 맥락에서 적용해도 꽤 괜찮은 시도라고 여겨집니다.

특히 2020년 들어 신앙의 분투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 세인지체들에게 있어서 더 더욱 상투성과 치열하게 싸우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우리들의 영적 노정이라고 저는 강하게 역설하고 싶습니다.

실례로 이런 경우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이렇게 강하게 요구합니다.

대세를 따르라

튀지 말라

기득권에 순종하라

중간에 서라.”

그러나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한 영적 태도는 이런 대체적인 요구에 대하여 역발상의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大勢를 따르지 말고小勢에 주목하라

튀지는 말아야 하지만 불의에 잠잠하지는 말라

기득권인 주류의 삶이 아닌 소수의 비주류의 삶을 추구하라

중간과도 같은 회색지대에 머물지 말고 분명한 자기의 색깔을 유지하라

제 이사야 예언자의 권면을 들어 보십시다.

이사야 8:11절을 읽겠습니다.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려 주시며 이 백성의 길로 가지 말 것을 내게 깨우쳐 이르시되

주전 8세기 남 유다의 주류들의 삶을 따라가는 것은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겠다는 선전포고와 같습니다.

주전 8세기 제 이사야가 활동하던 남쪽 유다에서 대세에 따른다는 것은 불편하고 거북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아닌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평안한 길을 선택하겠다는 결의였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기에 급진적인 길을 선택하지 않음으로 모두의 마음이 동()하는 쪽으로 나도 동의하는 삶을 택하겠다는 영적 무너짐의 용인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주 강하게 내게 말씀하시면서 일러 주셨다지금 남 유다의 주류들이 걷고 있는 그 길로 걷지 말고 그 길 반대편으로 돌아서 걸어라

무슨 말입니까?

세상과 충돌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聖徒가 왜 성도입니까?

거룩한 무리이기에 거룩하지 않은 무리와는 충돌하기 때문에 성도입니다.

거룩한 무리이기에 거룩하지 않은 무리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성도입니다.

성도는 세상과 같지 않기 때문에 충돌합니다.

세상과의 충돌을 두려워한다면 이미 그는 성도 즉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다.

충돌할 때는 반드시 충돌해야 합니다.

그게 성도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고린도후서의 텍스트 중에 가장 많은 논란을 낳고 있는 본문입니다.

논란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논쟁거리들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① 본문에는 고린도전후서 뿐만이 아니라 신약성경 27권 중에 단 한 번만 등장하는 단어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바울이 쓴 본문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의해서 삽입된 본문이라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그 단어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4절에 기록되어 있는 멍에를 함께 메다.’, ‘사귐’, 15절의 조화’, ‘벨리알’, 16절의 일치’ 그리고 7:1절의 더러운 것이 그렇습니다.

또 하나의 예는 16절에 등장하는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라는 인용형식의 구절이 신약성경에 바로 이곳 말고는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논쟁의 내용은 6:13절의 말씀과 6:14-7:1절의 말씀이 문맥상 맞지 않고 도리어 6:13 다음에 7:2절이 나와야 자연스럽다는 것을 그 증거로 제시합니다.

고린도후서 6:13절을 읽어 보십시다.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고린도후서 7:2절을 마저 읽습니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이렇게 틀이 맞추어져야 자연스럽다는 주장입니다.

교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라고 기록된 고린도후서 6:14절이 고린도전서 6:13절 뒤에 나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고린도후서 6:14절부터 7:1절까지를 자세히 읽다보면 분명히 껄끄럽지 않은 문맥의 구조가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입장정리를 하고 오늘 설교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직접 쓴 고린도후서의 원 내용에 존재한 글이 아니라 바울의 신학적 사상과 그의 사도적인 권위를 인정하던 어떤 바울의 제자가 고린도후서라는 편지를 정리하면서 본문 단락을 편집하여 첨가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석입니다.

이 주석적 정리는 위험한 작업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 중에 분명한 사실은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책임을 믿기에 바울의 사상을 따르던 제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이 단락을 바로 이곳에 삽입했다고 저 역시 확신합니다.

조금도 고린도후서의 정경성(正經性)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글에 성도의 태도는 고린도교회의 일부 사람들 중에 바울을 집요하게 괴롭혔던 바울의 적대자들을 경성하게 하고 바른 길로 돌아서도록 만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또 다른 일하심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바른 신앙적신학적 태도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사상을 따르던 제자라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기를 바라며 본문을 해석하고자 합니다.본문 14-15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이 구절을 보면 네 가지의 충돌에 동의하라고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은 물론 오늘 우리들에게도 종용하는 말씀으로 강하게 다가옵니다.

Ⓐ 의와 불법의 충돌

Ⓑ 빛과 어둠의 충돌

Ⓒ 그리스도와 벨리알의 충돌

Ⓓ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충돌

이 네 가지의 충돌을 말한 편집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분명히 전합니다.

믿지 않는 자와는 멍에를 함께 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의를 발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빛을 발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불법을 자행하는 자들은 사탄에게 속한 자들이다.

어둠의 자식들은 사탄에게 속한 자들이다.

벨리알은 사탄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와 반드시 충돌할 수밖에 없음을 본문의 저자가 천명한 것입니다.

조금 더 본문의 외연을 확장해 보십시다.

본문 16-18절입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이미 고린도전서를 공부할 때 대단히 중요한 신약적인 의미의 교회관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한 번 그 중요한 텍스트를 복기해 보십시다.

고린도전서 3:16-17절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사실 바울의 이 선언은 당시 정황으로 볼 때 엄청난 파격이자 혁명과도 같은 선언이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가 작성되었던 주후 55 년경은 헤롯 성전이 보무도 당당하게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던 때였고그 성전을 도굴 삼아 강도의 짓거리들을 하고 있었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보이는 성전 종교 치장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였기에 진짜 성전은 헤롯 성전이 아니라 우리들의 몸이라고 외쳤던 바울은 극도의 불순분자요요주의 인물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스승의 교회론 사상을 감격적으로 받아들인 본문의 편집자 역시 스승의 마음을 그대로 읽었기에 이렇게 강하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역설뿐만 아니라 스승의 입지를 더 강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한 사람은 하나님이 거하시고 행동하시고 일하시는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더불어 그 성전 된 삶을 영위하는 나에게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역설합니다.

이렇게 역설한 본문 저자는 고린도교회의 회색주의자들그리고 세상과 양다리 걸친 자들심지어 바울을 심히 괴롭히고 있는 적대자들을 경계하면서 주저하지 않고 거침없이 고린도교회의 믿는 자들에게 다음의 결단을 이렇게 촉구합니다.

본문 17절을 다시 읽어드립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저는 이 구절에서 오늘 본문 설교의 힌트를 찾았습니다.

벨리알과의 충돌이 무엇입니까?

믿지 않는 자와의 충돌이 무엇입니까?

불법을 행하는 자들과의 충돌이 무엇입니까?

어둠에 거하는 자들과의 충돌이 무엇입니까?

 

※ 거룩한 분리(HOLY SEPARATION)입니다즉 성별(聖別)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저는 이 구절을 교우들에게 전하면서 한 가지 노파심을 갖고 있음을 솔직하게 토로합니다.

무엇일까요?

혹시나 이 단어에 대한 경홀히 여기면 어떻게 할까하는 노파심입니다.

너무 많이 들었던 이야기이기에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 단어의 무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기에 거룩한 분리 즉 성별이라는 해제에 대하여 가볍게 여기지 않기를 교우들에게 부탁합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적극적이고 과감한 시도는 세속적 가치와 충돌하지 않으려는 무뎌짐과 맞서는 것입니다.

치열하게 충돌하는 것입니다.

코로나 19를 통한 펜데믹 상황으로 인해 교회 공동체에 밀어닥친 가공할만한 괴물은 가능하면 그리스도인을 밝히지 말아야 한다는 위기의식이라는 괴물입니다.

2020년 오늘 어느 장소어느 시간어느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인임을 밝히는 것이 공동체 사회에서 나를 내치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는 우울한 분위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레테르 자체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세속적 가치와 맞장 뜨지 않으려는 영적 무기력이 엄습한 게 사실입니다.

마치 1992년 이장림 일파가 휴거소동을 벌인 이후재림을 설교하는 목사는 같은 부류라고 낙인이 찍혀 이것을 두려워했던 수많은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감히 재림 설교를 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며 주저앉았던 것처럼 지금은 숨고르기를 할 때라고 생각하는 괴물에게 포로되어 있습니다.

해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세상 사람들과 타협하고같은 행동을 하며 같이 섞이려고 안달이 난 모습과 행태들을 보면서 유감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거룩한 분리 즉 성별은 바리새인처럼 외식주의적인 구별을 하라는 종용이 아닙니다.

거룩한 분리 즉 성별은 세속과 완전히 결별하여 도피주의적인 삶을 유지하라고 윽박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성별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는 성전 된 자로서 세속화와 타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처럼 여겨지는 그 어떤 유사(類似하나님과 같이 동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양육 과정에서 나누었던 20세기의 선지자라고 지칭되는 아이든 토저는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한때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고 했다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오늘날 교회는 제발우리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지 마십시오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면에서 당신들과 똑같다고 말한다오늘날 기독교가 그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 세상에 전하는 것은 무엇인가성경적 기독교와 세상을 섞어 놓은 기독교즉 혼혈의 기독교를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명심하라십자가의 기독교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아첨하지 않는다과거의 교회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우리가 여기 있나이다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이오니 우리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했다.” (아이든 토저, “세상과 충돌하라”, 규장,pp,29-30.)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벼락과 같은 예언자의 음성입니다.

적어도 이 정신을 갖는 것이 성별입니다.

적어도 이 충돌을 각오하는 것이 거룩한 분리입니다.

성경을 우연히 읽다가 심장이 뜨거워지는 구절을 만났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소개하고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여호수아 24:29-33절입니다.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이었더라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그들이 그를 그의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에 장사하였더라

어떤 감동이 숨어 있습니까?

여호수아 110세에 사망했습니다.

헌데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그를 딤낫 세라에 장사했다고 보고하는 기사입니다.

또 하나의 기사는 요셉의 뼈를 애굽에서 세겜으로 옮겨와 장사했다는 보고도 곁들이고 있습니다.

혹시 아무런 느낌이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대단히 유감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정복과 입성을 완성했습니다.

그의 활동 무대는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사가가 그의 장사처(葬事處)를 어디라고 보고합니까?

딤낫 세라라고 보고합니다.

딤낫 세라가 어디입니까?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주어졌던 기업의 땅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지체로서 성별된 하나님의 그루터기로 훈련 받던 장소입니다.

여호수아는 이곳에서 성별된 히브리 사람으로 영적 자존감을 키웠습니다.

그랬던 그는 죽어서도 자기에게 하나님이 맡기셨던 그 땅에 묻히기를 소망했고결국 그는 다른 이방 땅에 묻히지 않고 자기를 자기로 세운 그 땅에서 영면에 들어갔다고 역사가는 보고합니다.

거룩한 분리를 죽어서도 지키려했던 여호수아를 보며오늘 목사의 신분으로 사는 저는 거룩한 오기를 다지게 됩니다

또 한 사람요셉은 애굽에서 죽었습니다.

애굽은 요셉에게 기회의 땅이었고요즈음의 언어로 말하면 인생 대박의 터인 포인트가 된 곳이었습니다.

애굽은 요셉에게 잊지 못할 행운의 땅이었습 니다.

그런데 후손들은 요셉의 뼈를 애굽 땅에 묻지 않고 세겜으로 가지고 왔다고 전합니다.

세겜이 어디입니까?

그의 고조부 아브라함이 맨 처음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하나님께 단을 쌓았던 영적 고향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에게도 세겜은 영적 본향입니다.

요셉은 그의 뼈마저도 이방의 땅에서 분리되기를 소원했고그의 후손들은 그 분리를 이루어내어 영적 본향으로 요셉의 뼈를 이거했다고 역사가를 통해 후대의 독자들에게 보고합니다.

우연으로 기록했습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명심합시다.

그리스도인들은 끝까지 세속화의 영역에서 분리된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입니다.

한 순간만 분리되는 자들이 아니라경우에 따라 유익이 된다고 판단될 때만 세속과 충돌하는 자들이 아니라 끝까지 세속의 가치와 맞서 싸우는 자들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 주간조금은 어려운 책인 프랑스가 낳은 걸출한 철학자인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지은 시간과 타자를 읽었습니다.

많이 난해한 책이라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지만 곱씹다가 아주 의미 있는 그의 성찰을 만났습니다.

홀로서기의 사건이것은 현재이다현재는 자기로부터 출발한다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로부터의 출발이 현재다현재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존재의 씨줄에 생겨난 하나의 균열(찢음)이다현재는 찢어내고 다시 맺는다그렇게 현재는 시작한다.” (엠마누엘 레베나스, “시간과 타자”, 문예출판사,p,47.)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레비나스가 이렇게 말한 대목이 가슴을 뛰게 했습니다.

현재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존재의 씨줄에 생겨난 하나의 균열(찢음)이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나를 찢는 찢음은 고통이고 아픔입니다.

그러나 그 찢음 속에서 나는 존재하고 나의 시간도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나를 찢는 것은 혁명이자 진보입니다.

하나님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일체의 것들과 투쟁하고 충돌하는 것은 나를 찢는 행위입니다.

그 행위는 거룩한 행위인 분리요 성별입니다.

우리 세인 지체들이 이 충돌을 회피하지 말고 성별한 그리스도인을 다시 거듭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