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류호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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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두란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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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0-07-31 11:3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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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호준 박사의 “교회에게 하고픈 말”(두란노 간, 2020년)을 읽고 “이 우주에 중립적인 것이라곤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 뼘의 땅, 1초의 시간도 다 하나님의 소유이며 사탄은 그것을 공격하고 있다,”
20세기 최고의 변증학자인 C.S 루이스가 한 말이다. 그의 말에 가만히 침잠(沈潛)해 보면 아멘이다. 이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일진대, 왜 이렇게 교회가 어둑어둑한 대명사가 되었고, 신자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무자비한 공격의 대상이 되었을까는 아이러니다. 다시 루이스의 말로 돌아가면 교회도, 성도도 그가 말한 대로의 믿음을 갖고 있지 않아서는 아닐까! 하는 가슴 아픈 진단이 스멀대고 올라온다. 작금의 시대적 비판에 겸허히 교회와 신자가 귀를 기울이려면 교회가 교회로서, 성도가 성도로서 마땅히 살아가야 하는 방법을 다시 회복해야 하며 살아야 한다. ‘ad fontes’(근본으로)로. 백석대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치며 후학 양성에 최선을 다한 뒤에 현직에서 은퇴한 老 학자의 글을 처음으로 손에 들었다. 그의 책을 처음으로 손에 들은 것은 그의 이력 때문이다. 백석이라는 신학교가 나하고는 별로 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교편생활을 한 학자는 성향 자체가 균형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관에 그가 쓴 책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번에 그가 퇴직을 하고 쓴 책을 지인에게 소개 받아 시답지 않게 읽었다. 선입관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신학자이자 목회자였던 노학자는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거침없는 한국교회를 향해 던진 비수들은 나를 비롯한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론적인 치유의 언사(言詞)들이었다. 교회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에서 저자의 필설은 글이 아니라 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적시한 교회와 신앙의 적폐 목록을 57개(pp,16-17)를 읽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백석에서 버텼지? 하나하나의 목록은 마치 루터가 비텐베르크에 내건 95개 조항을 방불하게 하는 현대판 종교개혁의 맞상대 내용이었는데. 이 목록을 보다가 앞으로 펼쳐질 저자의 글이 가히 어떤 내용이 될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자기중심주의와 자기연민주의로 대변되는 미-제너레이션(me-generation)의 시대에 교회가 시급히 회복해야 것이 공교회성이라는 자문이 큰 활자로 다가왔다. 모두가 ‘나’의 원칙이 통하는 시대가 오늘이라 이것을 막아야 하는 보루가 교회인데 도리어 교회 역시 유유상종이라는 데에 아픔이 있음을 저자는 역설한다. 이런 자들이 횡행하는 이유는 ‘실천적 무신론자들’(p,17)이 득세하고 있기 때문임을 지적하고 있는데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지난 주간에 읽었던 ‘믿는다는 것’에서 강영안 교수는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물음을 묻는 것은 사유의 경건이다.”(강영안, “믿는다는 것”, 복 있는 사람, p,37)
이것을 전제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누구인가? 를 중단하지 말고 물어야 함을 강 교수는 역설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또 적시했다.
“굳건한 믿음은 물음에서, 그리고 물음에서 비롯된 열망에서 시작된다. 찾아 나서지 않고서는 찾을 수 없다.”(위의 책,p,56)
류 박사도 본서에서 강영안 교수의 지론과 동일한 테제를 기록했다. 한국교회가 무너진 이유가 두 가지를 제시하고 있는데 하나는 진실말하기에 실패한 것이고, 그 다음이 반-지성주의라고 뼈아프게 찌른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의 상실 말이다.
“제발 덮어놓고 믿으라고 강요하지 마십시오. 물론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믿음이 최종 목적입니다. 그러나 알지 못하면 믿지도 못합니다.”(p,31)
켄터베리의 대주교였던 안셀무스의 그 유명한 어록을 되새겨 보자.
“faith seeking understanding” “fides quaerens intellectum”
‘앎을 추구하는 믿음’이 교회에서 회복되어야 함을 저자는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 우리 교회의 금년 표어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지성적 교회’다. 지성적 교회라는 말 자체가 극도의 거부를 당하는 아픔이 있다. 하지만 성령이 기름 부으시는 지성이 없는 교회는 천박해진다. 세상 사람들이 대화 자체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말 그대로 우리들만의 리그를 여는 꼴이 된다. 앎을 추구하는 믿음이 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INFORMATION)로 만족하지 않는다. 오히려 형성(FORMATION)에 더 천착한다. 맞다. 이게 교회다. 주군이 원하시는 교회 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또 하나, 피를 토하는 화두를 던진다.
“한국교회는 더 이상 ‘소비자가 이끄는 교회(consumer-driven-church)’가 아니라, ‘그리스도 이끄시는 교회’(Christ-driven-church)가 되어야 할 것이다.”(p,131)
평신도(이 말을 쓰기 싫어하지만 저자가 표현했으니까 그대로 인용) 그리스도인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립 서비스에 혈안이 된 목회자, 또 그 말도 안 되는 달콤한 말이 아니면 교회가 이 교회가 아니면 없냐고 볼멘소리를 하며 심령을 마비시키는 마약 주사를 주입해 주는 교회를 찾아 그 마약을 맞으러 다니는 불쌍하다 못해 애처로운 종교인들이 벌떼처럼 생산되는 교회를 향한 저자의 직격탄은 쓸어 담아야 하는 명약이다. 너무 많은 글을 소개하고 싶지만 마지막으로 아프지만 한 가지만 더 담자.
“본연의 임무에서 일탈한 목회자들, 종로 5가를 배회하며 뷔페 식사에 영혼을 판 정치꾼 목사들, 삼삼오오 모여 먹을거리와 볼거리에 탁월한 지각을 갖고 있는 목회자들, 진지하게 설교 준비를 하는 대신 인터넷 서핑의 신공력을 가지고 표절에 능란함을 보여주는 목사, 성서 문자주의의 근본주의적 신앙으로 독선적 설교를 자행하는 설교자들, 교세와 교단을 발판 삼아 개인의 명예와 영리영달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지도자들이 소위 하나님의 도성을 알려진 예루살렘과 우리 교회와 교단 안에 널려 있다는 것입니다.” (pp,117-118)
이 글을 맨 처음 접할 때 ‘종로 5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이윽고 곧 종로 5가의 의미를 알아차린 나는 저자의 이 표현이 갖고 있는 알레고리의 웃픈 현실에 화들짝했다. 누구라고 지적하지 말고, 이렇게 또 다짐해 본다. 종로 5가에서는 절대로 내리지 않으리라. 목사 아닌 먹사는 되지 않으리라. 좌의정으로 네이버를, 우의정으로 다음을, 영의정으로 구글을 삼는 목사는 되지 않으리라. 그래도 목사라는 자존심이 있지 쪽팔리게, 본회퍼의 말대로 값싸게 복음을 파는 장사꾼 목사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아들에게 남기는 독서 후기를 아주 짧게 이렇게 남겼다.
“아픈 은혜를 받았다. 아주 매우 아픈 은혜를. 2020년 5월 16일 오후 3시 40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