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하나님의 자유2024-06-11 09:47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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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이용호
ㆍ출판사 토비야
ㆍ작성일 2020-08-21 17:15:14

 

이용호 교수의 “하나님의 자유”(토비아 간)를 읽고


“목사에게 주어진 고유한 카리스마를 감당하려면 특별한 수행이 필요하다. 그것은 신학공부다. 목사 공부는 곧 신학공부다.”(정용섭, “목사공부”, 새물결플러스, p,31.)

명쾌했다. 적어도 서평자에게는. 
아주 오래 전, 신학교 4학년 졸업반 때 파주에 있는 모 기도원에 작정 기도(?)라는 거창한 레테르(지금 이 거창한 레테르라도 갖는 치열함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를 갖고 한 주간 그곳으로 올라갔다. 당시 그곳은 모든 목회 후보생들이 찾는 로또(?)의 장소였기에, 나 또한 부스러기라도 건지려는 마음으로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전투적으로 올랐다. 올라간 날 저녁, 머리에 이상한 모자를 쓰고 흰 소복과 같은 복장으로 갈아입은 한 여인이 그 엄청난 기도원 예배당 안에서 두 손을 벌리고 중간 복도를 지나다니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 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명한다. 암환자들의 암덩이들은 사라지고, 사업에 실패한 자들에게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질의 복이 떨어지며, 자녀들은 4대문 안에 있는 대학에 붙을 것이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덩어리로 인하여 방언의 은사가 임할 것이며, 흉악한 귀신들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갈지어다. 여기에 있는 모든 자들은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한 축복이 30, 60, 100배로 임할지어다.”
그녀가 두 팔을 벌리고 지나가는 길목마다 사람들이 픽픽 쓰러지고, 입에서 거품들을 흘리며, 연신 코카콜라 펲시콜라를 외치는 엄청난 광경을 보고서는 신학교 4학년까지 공부한 것이 아깝기는 하지만 목회를 포기할까 고민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가 행한 것이 목회의 능력이라면 나는 빨리 손을 떼는 것이 정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행한 일과는 담 쌓고 있는 나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이 충격은 학교로 돌아와 본회퍼와 마틴 부버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지만, 난 지금도 가끔 그 당시에 목격했던 그 충격을 유쾌하지 않게 꿈에서 만나곤 한다.
이제 로컬 처치에서 사역을 한지 32년째에 접어든다. 산전수전공중전을 다 겪어서 그런지, 가끔 악몽은 꾸지만, 비틀거리지는 않는다. 왜? 신학공부가 그렇게 나를 지탱하게 해 준 효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런 면에서 정용섭 선배가 갈파한 이 문장은 내게는 선생이었음에 틀림없다.
“목사 공부는 곧 신학공부다.”
이용호 박사가 3년 전에 집필한 요나서 연구서인 ‘하나님의 자유’를 아들에게 빼앗겼다. 그러다가 불과 몇 주 전에, 이 책을 아들이 원래 주인인 서평자에게 돌려주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책갈피에 분명히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친구 이강덕 목사에게, 이용호가.”
원래 멋대가리라고는 1도 없는 친구지만, 역시 헌서의 메시지도 멋이라고는 1도 없다. 원래 태생이 그런데 커멘트를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다. (ㅎ)
친구의 책을 읽다가, 두 가지 면에서 박수를 보냈다.
하나, 혀를 내두를 만한 신학자의 집요함이다. 이 박사는 이 책에서 요나서 연구의 결과물을 목회자들이 흔히 자랑스럽게 접근하는 은혜로움(?)에 머물거나, 천착하지 않고, 요나라는 인물을 통해 조명되어지는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하심을 강하게 역설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선택받은 민족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선민이 아닌 이방민족들에게도 구원을 베풀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유’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p.93)
이 박사는 요나서의 집필 연대를 주전 8세기라고 생각하는 전통적 복음주의권의 해석을 뒤집고 적어도 포로 후기의 저작으로 해석했다. 근거로 예루살렘 멸망 이후의 혼란스러운 선민공동체의 사상적 변화가 요나서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p,168)
저자의 말대로 요나서가 포로기 이후의 작품이라는 것을 전제할 때, 이방민족들을 향한 구원의 여백을 유연성 있게 강조한 그 팩트를 ‘하나님의 자유’라는 테제로 선택해 신학적으로 알고리즘화시킨 것은 학자의 기여임에 틀림없다.
어디 이뿐인가? 요나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각종 방법들을 동원한 일들 역시 저자는 은혜로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유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약 신학자가 갖고 있는 지적 자존심의 관철 행위로 보여 서평자는 멋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이 책(요나)은 하나님이 자신의 자유를 이루려고 계획하신 것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고,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선택한 자를 통해 하나님의 자유를 성취하신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중략) 그러므로 무기력에 빠진 요나를 되돌리는 노력도 바로 하나님의 자유이다.”(pp,116-117.)
저자가 말한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커멘트를 하나만 더 다루자.
“하나님의 자유는 인간이 생각하듯이 절대적인 진리를 성취하려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에 있다.” (p,176)
니느웨를 구원하시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그래서 내가 다시스로 도망가려 했던 것이라고 하나님께 도전한 요나에게 박넝쿨의 담론으로 그를 넉-다운 시킨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저자가 일갈한 대목이다.
서평자가 저자의 이 문장에 언더 라인을 한 이유는 하나님의 자유하심의 방법에 대한 해석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무기가 정의라면, 또 한 편의 일하심의 무기로 ‘자비와 연민’을 동원하신다는 그의 부연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같은 책 176.)
나는 저자의 이런 일관된 집요함이 좋았다. 학자들이 사수해야 할 어떤 지적 자존감을 그 무엇 때문에 내려놓고 줄타기하는 몇 몇의 삶들을 종종 보는데 그때마다 분노스러운 것은 물론 가엾기까지 할 때가 있다. 해서 친구의 집요함에 박수를 보냈다.
둘, 저자에게 박수를 보낸 이유는 이렇다.
그가 남겨놓은 text에 대한 철저한 해석학적 분석과 그것을 토대로 한 context의 의미부여하기가 서평자의 목회신학적인 모드와 결이 같았기 때문이다.
 
“나의 삶을 통해 성경을 읽고 성경을 통해 나의 삶을 해석한다.” (강영안, “읽는다는 것”, IVP, p,159)
크리스천 철학자 강영안 교수의 글에서 읽은 촌철살인이다. 김기석 목사도 자기의 책에서 이렇게 독자들에게 비수를 던졌던 글이 있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신앙고백은 공허한 말놀이에 지나지 않는다.”(김기석, “청년 편지”,성서유니온,P,52.)
잊지 말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강령들이다.
이 박사는 총 6장으로 이루어진 요나 연구서에서 요나서 안에 기록된 성서언어를 중심으로 한 구조주의적인 비평과 요나서와 관련된 성서 밖의 상황들을 면밀히 관찰한 뒤에 진행한 편집 및 사회학적인 비평에 소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정판으로 매 장마다, 한국교회와 연관하여 날카로운 비평적 성찰을 내놓는다. 물론 신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한국교회의 정황이 현장에서 지체들과 함께 울고, 웃는 목회자와 같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박사가 요나서와 관련하여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에 내 던진 쓴 소리는 무시할 만큼 가볍지 않다. 눈여겨 본 문장이 있다.
“니느웨의 방향 전환” (p,141)
전대미문의 이 엄청난 혁명적 사건을 소개한 저자는 한국교회에도 진정성이 있는 이런 방향전환을 요청한다. 거부할 수 없는 큰 울림이다.
이제 글을 마쳐야 할 것 같다. 친구가 쓴 ‘하나님의 자유’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줄인다. 긴 글을 쓰는데 은사가 탁월하다는 등의 핍박을 너무 많이 받아 여기서 멈추는 게 좋겠다 싶어서 말이다.
친구가 참 좋은 책을 냈는데 아들놈 때문에 3년이나 늦게 만났다. 억울하다. 웬수가 구약을 전공하는 탓에 서재에 있는 구약학 도서들을 많이 강탈당한다. 호시탐탐 노리는 아들의 손놀림을 이제는 매의 눈으로 지켜보아야 한다. 아직은 에비가 현역 목사인데.
코로나 19가 좋은 점이 하나있다. 젊은 아이들 말대로 서재에 더 짱 박히게 만드는 것 말이다. 아들놈 때문에 늦게 만났지만 친구의 책 때문에 행복했다. 
  

용호야, 수고했다. 박수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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