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이성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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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신앙과 지성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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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0-08-27 11:3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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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덕 편, “존 웨슬리, 나의 삶이 되다.”(신앙과 지성사 간)를 읽고 금년 초에 대한 기독교나사렛 성결교단으로 트랜스퍼를 했다. 11년간의 독립 교회 연합회 사역을 마치고 내 신앙의 정서적 고향인 성결교회 목사로 돌아가기 위해 나성으로의 가입을 결단했다. 타 교단 목사의 교단 편입을 위한 교단 편목 과정의 커리를 지난 주간, 은혜 중에 마쳤다. 교단 헌법과 교단 교회사를 이수하는 것은 한 교단의 멤버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마땅한 과정이지만, 편목 과정의 커리 중에 하나의 과목인 성결신학(웨슬리 신학)을 이수하라는 지침은 의아했다. 이제 약 40년이 되어가는 아주 오래 전, 모교에서 소위 조 웨슬리(?)라고 호칭되던 조종남 박사께 웨슬리 신학을 수강한 뼛속까지 알미니안-웨슬리주의자인 나에게 성결신학까지 이수하라는 요구가 조금 불편했던 것이 사실이기에 말이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이니 당연히 교단에서 요구하는 과목 이수를 기피할 수 없어 이왕 하는 것인데 기쁨으로 감당하자는 마음으로 웨슬리 신학의 세 번 세션을 수강했다. 40년 전, 은사이신 조종남 박사께 웨슬리 신학을 수강하면서, 젊은 시절 갖고 있었던 객기가 있었다. 추억해 보니 왠지 모르게 당시 신학교에서 법(?)으로 군림하셨던 조 박사님의 무소불위의 그 힘에 반감의식이 있어서 교단 신학이었던 웨슬리 신학을 비평적으로 성찰하려고 했던 객기가 분명 있었기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공부하려고 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그랬던 웨슬리 신학을 근 40년 만에 다시 접하면서 내가 얼마나 교만했던 신학생이었는가를 절절하게 회개했다. 웨슬리 신학의 새로운 발견이라기보다는 목사로서의 웨슬리의 삶을 다시 보는 안목 때문에 말이다. 웨슬리 신학의 비평적 성찰은 아직도 나에게는 유효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신학적 토로는 서평자가 캘빈주의에 대하여 대단히 비평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그래도 난 신학적으로 웨슬리안임에 틀림없다, 물론 그러니까 다시 성결교회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 아닌가!(ㅎㅎ) 토로하고 싶은 것은 편목 과정 중에 담당 교수가 부과한 TERM PAPER 작성을 위해 다시 서고에서 꺼낸 약 10 여권의 웨슬리 신학에 관련된 서적들을 다시 복기하면서 신학교 시절, 어줍지 않던 웨슬리 신학의 비평적 성찰이 아니라. 웨슬리의 목회적인 삶 그리고 그의 신앙에 필이 꽂히는 바람에 생각지 못한 은혜(?)를 받았다. 1738년 올더스케이트 집회에서의 초기 성결, 이듬해인 1739년 페터레인 철야기도회에서의 온전 성결로 이어지는 그의 구원 과정의 경험이 목사로서 그가 18세기 무너져 내리는 영국의 靈界를 바로 세우는 결정적인 견인차의 도구가 되었다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내용보다, 이번 공부 중에 평자에게 집요하게 임했던 감동은 사회적 성결의 실천자로서의 웨슬리였다. “나는 기독교가 사회적 종교이며, 따라서 기독교를 고립시킬 때 죽고 만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또한 기독교는 사회적 종교이므로 사회를 떠나서는, 즉 다른 사람과 같이 대화함이 없이는 잘 유지될 수 없을뿐더러 전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웨슬리 설교집 Ⅳ, 산상설교 24번에서) 이성덕 박사는 웨슬리의 이 대목을 이렇게 지지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명이 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 함께 살지만 구별된 삶, 그 ‘속하지 않음’과 ‘구별됨’으로 때로 세상의 가치관이나 풍조를 거스르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의미다.”(본 책, p,149) 감리교단의 웨슬리 신학자인 김홍기 교수는 웨슬리의 사회적 성결(성화)을 조금은 진보적 개념으로 외연을 확장시켰다. “웨슬리의 성육신적, 사회 참여적 사랑의 행위는 자유와 해방의 차원까지 나아간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화(성결)는 사랑을 전할 뿐 아니라 자유와 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 (김홍기, “존 웨슬리 신학의 재발견”, 대한기독교서회, 2017,p,122.) 웨슬리는 18세기 영국의 불평등의 원인으로 시장경제에 의한 거대한 자본의 독과점을 지목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돈과 음식을 공정하게 재분배해야 한다는 당시로는 대단히 혁명적인 선언을 주저하지 않았다. (김홍기, 위의 책, p,124) 해서 김 교수는 웨슬리 신학을 해방신학의 입장으로 적용하는 대단히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서평자는 김 교수의 이런 진보적인 웨슬리 신학의 재해석에 대하여 정서적으로는 부분적으로 공감하지만, 전적으로 지지하거나 동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서평자의 관심은 웨슬리가 18세기 영국의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인 ‘삶의 정황’의 불평등을 인지하고 본인의 신학적 구도를 사회적 성결로의 교리적 확장을 꾀하였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 웨슬리가 취했던 삶에 긍정적인 지지를 보내고 싶다. 吉 예언의 길을 걷던 영국 국교회의 비성서적 일탈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판하며, 약한 자와 함께 하며 그들에게 삶으로 목회자로서의 자화상을 보여준 웨슬리의 사회적 성결은 오늘 이 땅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교회의 일탈과 목회자들을 향하여서도 너무나도 중요한 울림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성덕 교수의 ‘존 웨슬리, 나의 삶이 되다’를 편목과정의 페이퍼 작성의 위한 10여개의 참고 도서 중에 독자들에게 천거하는 이유는 이 책의 내용이 웨슬리의 신학화 (theologization) 작업보다는 웨슬리의 목회적인 삶에 더 큰 방점을 주었기 때문이다. 얄팍한 신학의 지식으로 우쭐대던 20대 시절, 그의 신학에 대하여 냉정한 평가를 내렸던 평자는 너무 교만하고 무지했다. 타의에 의해서 60대에 다시 손에 든 웨슬리를 공부하면서 오늘은 그의 이론적 신학이 아닌 그의 삶의 신학, 목사로서의 올곧음, 그리고 기득권주의자들의 편에 서서 세속적 안락을 누리려는 일체의 비성서적 괴물들과 분연히 싸웠던 목사 선배로서의 큰 거목을 마시 만난 것 같아 감사했고 행복했다. “오늘은 내 생일이며, 72세가 되는 날이다. 왜 내가 30년 전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중략) 좋은 방법이 있었다면, 40년 간 계속해서 새벽 4시에 기상한 일, 대체로 아침 5시에 설교한 일인데, 이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건강법이다. 그리고 바다와 육지로 1년에 적어도 45,000마일 이상 선교 여행한 일 등이다.” (1774, 6,28, 웨슬리의 일기에서) 1791년 3월 1일, 웨슬리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 전날 침상에서 둘러 모여 있는 제자들과 지인들에게 임종 인사를 다음과 같이 했다. “The best thing is that God is with us .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 (p,229) 전 아무개 괴물로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가 초토화되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는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내 사랑하는 교회가 회복되기를 기도한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세워온 교회는 주님의 것이기에 말이다.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에 제 2의 웨슬리, 제 3의 웨슬리들이 후배 목회자들 중에 쏟아져 나오기를 간절히 중보 해 본다.
2020년 8월 27일, 제천세인 교회 서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