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제럴드 싯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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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성서유니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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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0-08-30 15:00: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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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럴드 L, 싯처의 “하나님의 은혜”(성서유니온 간)를 읽고 아주 오래전, 손아래 처남이 갑작스런 심정지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7살 아들과 8살 먹은 딸이 아무 것도 모르고 상주 복으로 갈아입을 때, 장모님은 실신하셨고 아내 역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이제 30대가 된 생떼 같은 아들과 동생을 먼저 보내야 하는 그 기가 막힘을 어떻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싶다. 그렇게 아들을 먼저 보낸 장모님은 살아계시는 동안 그렇게 막내 아들을 가슴에 품고 사시다가 기다리고 있는 아들 곁으로 가셨다. 불효 중에 불효는 부모보다 먼저 떠나는 것이라는 옛말이 그래서 생겼나보다. 사별은 너무 힘든 과정이다. 신학교 시절, 웨인 오츠가 쓴 글을 읽다가 동의했던 내용이 있다. “사별은 충격의 단계를 지나, 모든 감정을 무디게 하고, 마침내 사랑하는 자의 죽음의 사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일어났던 사건을 생각하면서 거의 이식을 잃은 성태에서 공상하기 시작하고 슬픔의 홍수처럼 폭발하다가 새로운 정신적인 병으로 번진다.”(웨인 오츠, “기독교 목회학”, 생명의 말씀사, 1982,p,21.) 휘트워스 대학의 종교철학교수인 제럴드 L, 싯처는 한 음주 운전자의 폭력적 운전에 의해서 어머니, 아내, 막내딸을 잃었다. 그리고 약 20년 전이 지난 뒤에 이 책을 썼다. 이 책의 원제목은 ‘A grace reveled’이다. 우리나라 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계시된 은혜’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전문 크리스천 서적 번역자인 윤종석씨는 이 문장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번역했다. 졸지에 3대의 모계를 잃은 제럴드 싯처는 자신이 당한 상상하기조차 힘든 불행의 경험을 나를 위해 피 흘려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로 담담히 엮어 나간다. 평자는 섬기는 교회에서 약 2년여 진행한 욥기 강해를 2주 뒤에 마친다. 욥기를 접하면서 두려웠던 것이 있었는데 혹시나 내가 당하는 고난을 욥이 당하는 의인의 고난으로 기막히게 미화할 수 있겠다는 감정이입이었다. 욥이 욥기서 내내 끊임없이 자기의 고난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폭거라고 대들었던 가장 인간적인 시위는 온데 간 데 없이 ‘주신 자도 여호와이시 취하시는 자도 여호와’라는 단절(短節)의 표현을 욥의 대명사인양 부각시키며 욥을 완벽한 의인으로 둔갑시키려는 상투성과 싸우려고 지난 2년 동안 부단히 노력했다. 다시 말해 욥의 가장 나이브한 인간적인 면모를 고발하려는 데에 초점을 맞추며 욥기 여행을 진행했다. 이런 시도는 욥을 폄훼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다. 도리어 욥이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에게 임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여정에서 자신의 믿음의 주체라고 믿고 있는 하나님께 질문하며 영적인 분투를 행했는지를 여지없이 나누고 싶어서였다. 같은 맥락에서 제럴드 싯처는 유수한 신학대학교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는 교수로 자신에게 어느 날 엄습한 기억하기조차 괴로운 교통사고라는 팩트를 피하지 않고, 그 안에서 그 분의 이야기를 구속사로 풀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글을 읽는 내내 저자의 피나는 절제와 절제된 이성적 믿음으로 자기의 아픔을 은혜롭게 승화시켰는지를 이 책에서 멋지게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역설한다. “구속의 뿌리는 하나의 역설에 있다. 이 역설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새사람이지만 지금도 새사람답게 되어가는 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 자체이시자 또한 구속을 이루시는 분이다.” (p,26) 저자의 이 일설은 모친과 아내와 막내딸을 잃은 허망함을 겪은 뒤에 깨달은 은혜라고 부연하는 것을 잃지 않는다. 그가 이렇게 강조한 이유는 세 사람을 잃기 전에도 싯처에게 가정은 스토리였고, 그녀들을 잃고 난 뒤 20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그의 가정은 스토리를 이루어가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다시 말해 싯처는 이렇게 적용한다.“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구속된 한 가정이 구속을 경험한다. 그 구속은 고난과 은혜와 성장의 이야기로 이어진다.”p,27)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면 ‘포장된 몸부림’, 혹은 ‘정직하지 않은 종교성’ 등등으로 비난할 수 있겠지만 평자는 물론 저자도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것이 있다. 바로 이것. “내게 주실 은혜를 믿긴 했지만 그것은 슬픔과 고통으로 위장된 은혜였다. 비극과 고난의 신비가 은혜를 가리고 있었다.”(p,29) 이렇게 시작된 제럴드 싯처 박사의 이야기는 ‘GRACE REVEALED’로 그 초점이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내레이션 된다. 저자는 참 재미있는 ‘계시된 은혜’의 알고리즘적인 묶음들을 책에 기록한다. 복원(restore), 개축(rebuild), 되돌아감(return), 재개(resume), 재검토(revisit), 재고(reconsider), 되찾음(reclaim), 재생(renew), 화해(reconcile), 회복(recover), 개혁(recoform), 되살아남(rebirth), 재발견(rediscovery) 등이다.(pp,47-48) 그는 철저한 아픔을 당했다. 도저히 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 있는 충분한 당위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인 당한 고난의 이야기를 그 분이 계획하신 스토리로 잇대었다. “구속의 관건은 해명이나 정당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최선과 최악의 사건을 다 사용하여 그분의 구속 계획을 이루시는 데 있다. 최악의 사건의 전형적인 예를 예수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는 것보다 더 잔인하고 불의한 일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매정하고 비겁한 사람들이 저지른 악한 행위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사건을 통해 세상의 구원을 이루셨다. 행위 자체는 지극히 악했지만 결과는 측량할 수 없이 선했다. 하나님은 변명의 여지없이 극악한 일을 선으로 돌리셨다. 그 결과는 세상의 구속이었다.(p,94) 보이는가? 왜 구속의 뿌리가 역설이라고 저자가 갈파했는지. 평자가 성경 66권 중에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로마서 8:31절이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웹스터 영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다. “What shall we then say to these things? If God is for us, who can be against us?” 정말이지 않은가? 하나님이 나를 위해 구원의 스토리를 계획하셨다면 도대체 이 세상의 어떤 언어로 무슨 다른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를 번역할 수 있단 말인가! 싯처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grace revealed)’ 는 이미 계시된 은혜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저자는 ‘revealed’의 개념을 놀랍게 해석했다. “결정적인 전쟁은 이미 승리로 끝났지만, 전투는 지금도 계속된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삶 전반에 미치게 되고, 이로써 그 분의 통치와 영역이 하나가 될 것이다.”(p,264) 얼마 전, 섬기는 교회의 주일 예배 시간에 교우들에게 전했던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냈던 네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고린도에 보낸 바울의 편지 A,B는 분실됨)에서 강력하게 시사했던 바울의 토로를 나눈 적이 있었다. 고린도후서 1:8-10절이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이 구절을 근거로 언제나 주님의 이야기는 역사라는 시간 속에서 단절이 아닌 이어짐으로 상황화 되어 나의 현재의 사건으로 재조명된다고 전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세인교회 2020년 8월 9일, 고린도후서 22번째 강해 설교에서) 싯처도 그랬다. 본인이 당했던 심각한 고난을 토대로 절망하고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아직도 빚어가고 있는 중이라는 그의 고백은 ‘revealed grace’라고 표현한 그의 고백이 정답이 아닐 수 없다. 달라스 윌라드가 이렇게 말했다. “제자란 그리스도처럼 되겠다는 의지와 그래서 그분의 ‘믿음과 실천’안에 거하겠다는 의지를 품고서, 자신의 일상사를 그 목표에 맞추어 체계적이고, 점진적으로 재조명하는 사람이다.”(달라스 윌라드, “잊혀진 제자도”, 복 있는 사람,p,26.) 달라스 윌라드는 이 책 전반에서 도무지 부인할 수 없는 벼락을 동원하다. “제자가 아닌 크리스천은 부지기수”라고. 하나님은 은혜를 자신의 삶의 스토리에 적용하지 않고 살아가는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오늘 한국교회에 부지기수다. 말씀으로 성육신하심으로 인해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살아가는 자들 천국인 한국교회의 무너짐은 어찌 보면 코로나 괴물 때문도 아니요, 정치 집단화된 교회를 향한 비상식의 행위에 대한 비토의 결과물도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유리되어 산 나 때문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revealed grace’ 없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제럴드 싯처는 적어도 서평자인 나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