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박일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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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도서 출판 동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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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9-03-01 12:4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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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준의 “인공지능 시대, 인간을 묻다.”(도서 출판 동연 간)를 읽고
기대했던 북미 정상회담이 좋은 결과물을 내지 못한 채로 종료되었다는 씁쓸한 소식을 들으면서 2월을 마무리하게 되어 못내 아쉽다. 70년이라는 세월동안 각기 다른 사상과 관점을 갖고 살아온 저들이 1박 2일 동안의 만남을 통해 무언가를 이룰 것이라고 기대했던 내가 더 어리석은 자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대단히 아쉽고 또 유감스러운 감정을 숨길 수가 없다. 제천 하늘을 온 종일 뿌옇게 덮고 있었던 미세먼지만큼이나 내 조국이 걸어가야 할 평화로 가는 지난 한 길이 분단의 아픔만큼이나 내 마음 깊이 똬리를 틀고 있는 듯하다. 그래도 힘을 내야지 싶다. 이 길을 다른 누가 대신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니. 마음을 다잡기 위해 묵혀 놨던 책 한 권 소개하기를 한다. 종교철학자인 박일준 박사가 ‘인공지능시대, 인간의 길을 묻다’(동연 간, 2018년)에서 도발한 포스트휴먼과 트랜스휴먼 시대를 정의한다. 읽다가 기독교 신앙을 갖고 한평생 달려온 필자에게 던진 제 질문들 앞에 섰다. 그리고는 3년 전 부족한 사람의 첫 번째 졸저인 ‘시골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동연 간, 2016년)에 수록한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서평 내용을 무색하게 하는 것 같아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왜? 필자는 당시 책에서 이렇게 이세돌을 응원했기에.
“이세돌이여!, 졌다고 기죽지 마라. 생각은 이겼으니까?”(이강덕, “시골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 p,31)라고 부제를 붙인 난 기고만장하게 이렇게 표현했다.
“사유와 성찰 그리고 고민은 온라인상이 아닌 오프라인 상에 하는 거니까….”(위의 책, p,40)
박일준은 본 書에서 포스트 휴먼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색채는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데우스’로의 변환이라고 말한 히브리대학교의 유발 노아 하리리가 ‘미래 역사 브리핑’에서 말한 주장을 주저 없이 동의한다.
“영원한 행복과 불멸을 추구하면서 인간들은 ‘실상 자신들을 신들(gods)로 항상 향상(upgrade)시키고자 한다. 즉 호모 사피엔스로부터 호모 데우스로 업그레이드되는 일이다.”(인공지능, p,128)
저자는 인간이 신의 반열에 들어선 이 가공할만하고 재앙적인 무시무시한 패러다임의 변환은 역설적으로 곧바로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고 에두른다. 그 근거는 이렇다.
“호모 데우스의 시대란 인간들이 초능력들을 여러 발달하는 기술들의 도움으로 실현한다는 뜻이기에 이는 곧 ‘신’이 혹은 ‘신성’이 말 그대로 세속화된다는 말이기도 하다.”(p,130)
기막힌 성찰이지 않은가? 이렇게 신의 자리로 업그레이드 된 인간은 그들이 도구로 사용하는 기계들(인간이지 않은 일체의 수단)에게 기계적인 생각과 감성을 집어넣는 고도의 기술 집약에 성공한 포스트휴먼 시대인 오늘, 인간과 로봇과 컴퓨터는 하나가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을 저자는 예단한다. 로봇과 컴퓨터가 하나가 되는 것이 가능할까? 과학적으로는 충분한 여지가 있으리라. 다만 기계가 인간과 하나가 되기를 거부하는 의지를 소유하게 된다면(물론 이것은 기계가 인간의 지식을 뛰어넘는 것을 전제할 때이다.) 그야말로 재앙이 될 것이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이다. 기계는 스스로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윤리의 극점이 존재하기에 말이다. 그러기에 3년 전 사유와 성찰은 오프라인 상에서만 가능하다고 정의한 필자에게 카운터펀치를 날렸지만 그때의 필자의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럼에도 소름끼치는 두려움은 공존한다. 인간이 갖고 있는 비윤리적인 한 구석이 기계에게 얼마든지 접목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서늘한 두려움이 필자만의 기우였으면 좋겠지만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이것을 알았는지 저자 박일준은 조심스럽게 이런 희망담긴 자신의 입장을 내놓았다.
“인간이 기계와 함께 공생하는 구조로 삶을 모색한다면, 인공 지능 알파고의 시대는 반드시 암울하지만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예감할 수 있다.” (p,152)
저자는 이런 예측을 기대하며 이런 시대에 신학은 무엇인가? 를 질문하면서 세 가지의 제언을 남겼다. 첫째, 교회는 탈 –인간 공동체의 신학을 구현하는 자리에 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왜 이것이 중요한 신학적 제언인가? 사적(史的)으로 부정의(不正義)했던 로마제국 시대에 그 거대한 괴물 앞에 교회가 곧 가장 상식적이고 바람직한 인권이 설정되도록 만드는 유일했던 구심점이었던 것처럼 인공지능 시대라는 포스트휴먼시대 그리고 한 발 다 나아가 트랜스휴먼시대에 돌입한 오늘도 인간의 이기성만을 주장하는 구도에서 벗어나 보편적 공생의 길을 모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유일한 것이 교회 공동체임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이 기계로 취급받던 시대의 이분법적인 논리를 극복하도록 신학이 도와야 한다고 피력했다. 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은 인간과 기계를 대립의 구도로 엮는 방법론이라고 지적한 저자는 이런 이분법적인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도록 신학이 기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기저는 실상 기계와 인간의 대립은 이 양자의 대립이 아니라, 인간과 그 기계를 이용하려는 인간 탐욕과의 대립이기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제언을 만나면서 필자는 조지오웰의 개념으로 저자를 다시 재해석해 보았다. 빅브라더는 빅브라더가 아니라 그 빅브라더를 움직이는 또 다른 인간 탐욕이라는 괴물 그 자체일수 있기에 신학은 그 빅브라더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그 빅브라더의 배후와 충돌하여 쓰러뜨리는 일을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관점에서 저자와 필자는 동지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지지를 믿자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동료-고난자(follow-sufferer)이시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 담론은 참 적절하게 필자에게도 다가왔다. 앞에서 언급한 호모 데우스의 시대로 진입한 포스트휴먼시대 및 트랜스휴먼시대의 비극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신으로 등극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인간이 버림을 받은 시대라는 감추어진 절망이다. 이 해석은 가당한가? 충분히 가당하다. 저자의 마지막 코멘트를 들어보자.
“인간은 언제나 자기 기준으로 인간을 규정하고 그 규정에 맞지 않는 인간들을 비인간화하여 억압하고 권력의 도구로 삼아왔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이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한 형제, 자매’임을 그렇게 비인간화된 존재들에게 선포하면서, 기존의 상식과 도덕과 윤리의 통념을 넘어서며 시대를 바꾸어 나갔다.”(pp,198-199)
어떻게 이 일이 기능했을까? 그것은 기독교 신학만이 갖고 있는 ‘성육신’ 의 개념이라는 가치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성육신의 가치를 동료요, 고난자의 개념으로 확장시켰다. 이것은 곧 위험한 시대로 인지되는 인공지능 시대 역시 하나님이 탐욕과 맞서 싸우는 인간을 지지하신다는 변함없는 전제이기에 말이다.
일본의 몇 안 되는 지성 중에 한 명이었던 오에 겐자부로는 오리엔탈리즘의 작가인 에드워드 사이드의 팬(?)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겐자부로는 ‘읽는 인간’에서 이렇게 사이드의 사이다 발언을 소개한다. “사이드는 ‘자신이 자연인가? 역사인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이분 할둔(모로코 출신의 여행 작가)의 말처럼 ‘우리 인생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하며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 ‘자기형성(self-making)’이 역사의 기본이라고 믿고, 역사는 노동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며 그편에 서겠노라고 말합니다.”(오에 겐자부로, “읽는 인간”, 위즈덤 하우스 간, 2015년,p,225.)
에드워드 사이드나 오에 겐자부로나 그들이 추구했던 지성의 공통분모는 인간의 인간다움은 인간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근사한 접근이자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인공 지능의 시대, 인간을 물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요청이다. 이제 답을 하자. 어떻게? 이렇게. “적어도 하나님이 지지하시는 나와 너는 인간의 인간다움에서 빗겨가지 말자.”
물론 앞에서 소개한 에드워드 사이드나 오에겐자 부로가 말한 ‘자기형성’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겠지만 하나님의 인간되심이라는 대단한 은총의 그날 아래에서 ‘IMAGO-DEI’의 형성을 끈질기게 놓치지 않는 ‘나와 너’ 가 되자. 이것이야 말로 인공지능의 시대에 등장하는 괴물과 맞설 수 있는 최고의 카운터파트이지 않겠는가. 왜? 평론가인 신형철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이면서 또한 타자이니까”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간, 2018년,p,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