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다비드 그로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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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문학동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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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9-05-09 16:46: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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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그로스만의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를 읽고 (문학동네, 2018년) 위안부 어르신들을 모시고 있는 나눔의 집에 다녀오면서 치를 떨었던 것은 일본에 대한 폭력이 아니었다. 인간다워야 그리고 조금이라도 사람 같아야 그래도 대우를 하는 법인데 필자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나라로 보지 않고 동물 같은 수준으로 보기에 대화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해서 괴물 집단에 대한 관심을 끊은 지 이미 오래다. 도리어 필자가 어르신들을 뵐 때마다 느끼는 참을 수 없는 분노는 당시 이 땅의 권력자들에 대한 것이다. 얼마나 무능력했고, 무지했으며 대책이 없는 나리들이었으면 자국민들에게 이런 고통을 당하게 만들었는가? 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격정과 솟구치는 분노다. 힘이 없는 민족이었기에 당해야만했던 치욕이 고스란히 여성과 민초들만의 아픔으로 적용되게 했던 그 허울 좋은 이조 말 위정자들을 보면서 끓어오르는 노기가 필자를 휘감아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나눔의 집에 기부를 하고 올 때마다 쓰라리고 아프다. 객기 하나, 그런데도 대한민국에는 친일의 잔재들이 여전하고 그것을 응원하는 정치하는 종자들이 있으니 유감스럽기 그지없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나름 기쁨이 있다. 동시에 독서를 마치고 평을 하는 글을 쓸 때 평자만이 아는 기쁨이 용솟음친다. 허나 본서는 독서도 그렇지만 서평을 쓰는 시간도 유쾌하지만 않다. 왜 그럴까? 아마도 저자의 글이 그렇게 필자를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글 자체가 이해하기가 난해한 부분이 있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글이 주는 감(感)이 무겁고 또 우울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스라엘 출신의 문학가로 명망이 높은 작가다. 더불어 본서는 2017년 저자에게 맨부커 상 을 받게 해 주었던 수작이다. 그런데도 필자는 이 책을 무겁게 읽었다. 그 이유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경험해야 했던 역사의 흐름 속에서 겪었던 아픔과 굴곡이 마치 나눔의 집에 만난 어르신들이 당해야 했고, 겪어야 했던 끔찍한 상흔으로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스탠드 업 개그맨으로 살아가던 주인공 도발레는 네타니아라는 아주 작은 도시의 클럽에서 공연을 한다. 이 코미디 공연에 얼떨결에 참석부탁을 부탁을 받고 관객으로 찾아온 그의 어색한 친구인 아비샤의 입을 빌려 진행되는 서술형식의 내레이션은 참 많은 것을 필자에게 알려주었다. 도발레는 지정학적인 위치에서 파란만장한 역사를 경험해야 했던 유대인으로 태어났기에 그가 경험해야 했던 얽히고설킨 과거의 일들과 현재 본인이 처해 있는 일까지 의미 있게 토로하는 진솔함이 우울했지만 동변상련의 공감으로 나를 휘감았다.
“엄마는 열차의 그 쪼그마한 칸에서 거의 여섯 달을 갇혀 있었다는 거야. 페인트나 기름을 보관하는 아주 작은 방 같은 곳에. 심지어 서거나 앉을 수도 없는 곳에.”(P,166)
주인공의 어머니가 경험했던 홀로코스트의 악몽을 떠올릴 때 위안부 어르신들이 생각나 충혈 되었다.
“요즘 세상에 영혼을 유지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어? 그건 사치야. 농담이 아니라니까. 계산을 해보면 마그네슘 휠보다 돈이 더 들어간다는 걸 알게 될 거야.”(p,57)
지금 나와 내 교회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혹시 나 때문에, 교회라는 구조 때문에 영혼의 가치가 더욱 보잘 것이 없는 가치로 전락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발레는 단지 개그맨이 아니다. 그가 던지는 농담 같은 진실 게임이 시사 하는 메시지는 오늘 공중파에 나와 웃음을 던지는 개그맨들의 메시지와는 판이 달랐다. 이와 관련한 본서에 등장하는 여러 등장인물들과 주인공과의 인과관계 역시 그리 밝은 고기압 기상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작가의 글 전개에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해학으로 포장되어 있는 금언들 때문이었다.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얼마든지 완전해 질 수 있다.”(P,316)
스위스와 같은 영구 중립국의 혜택을 누렸던 자의 독백이 아니다. 베네룩스 삼국처럼 천혜의 혜택을 받아 전쟁의 공포가 무엇인지 모르는 국가에 살았던 팔자 좋은 자의 멋있는 독백도 아니다. ‘홀로코스트’라는 인간이라면 다시는 겪어서는 안 되는 비극의 산물을 경험했던 부모들의 피를 물려받은 자가 토해낸 곡성(哭聲)이다, 1M 60CM가 채 안 되고, 깡마른 체구와 특별히 뛰어난 무언가를 갖추지 못해 내세울 것이 없는 그래서 왕따가 되는 것이 너무 두렵고 무서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길이 거꾸로 물구나무로 서서 걷는 것 밖에 없어서 위기 때마다 그렇게 살아야 했던 슬픈 상처를 갖고 있는 자와 그를 바라보는 친구의 독백 역시 왠지 필자의 가슴 깊은 곳을 강타했다. 이유 없는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과거와 역사 없는 민족이나 개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허나 그로스만의 책 독서를 마치고 한 가지 소회를 숨길 수 없다. 아픈 역사, 숨기고 싶은 상처를 되짚는 것까지는 고무적이라는 것에 필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지만 다만 다시는 되풀이하고 싶지도 않다는 느낌말이다. 읽을 때는 날이 참 흐렸지만 읽고 난 뒤에는 왠지 화창하게 날이 갠 느낌이 들었다면 비약일까 싶지만 적어도 필자에게는 그랬다. 서평을 쓰면서 그래야 할 것 같아 턴테이블에 양희은씨의 골든 디스크 LP를 올려놓고 그녀의 노래를 듣기로 했다. 첫 트랙에서 가사가 들린다. “긴 밤 지 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양희은 젊은 시절의 목소리가 이렇게 맑아나 싶어 갑자기 행복해졌다. 나라다운 나라가 되어 적어도 민초들이 울지 않는 나라가 되기를 두 손 모아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