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5월 5일 주간 사역2024-04-23 16:58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당신이 확신에 차서 행동할 때는 언제인가?  

 
경배와 찬양 (WORSHOP) 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복음성가: 내가 처음 주를 만났을 때
● 제목 : 신념이 아닌 신앙으로
● 본문 : 욥기 18:1-21  

 
말씀읽기와 적용 (WORD)
1) 신념과 신앙을 구분해보자.
⓵ trust란?
⓶ believe란?
⓷ 차이점을 설명하라.  

2) 신앙의 대상과 신념을 구분하여 설명해보라.
⓵ 마태복음 13장 24-30절:
⓶ 시편 109:7-15절:  

3) 적용하기
⓵ 설교자가 주고자 한 오늘의 영적 메시지는 무엇인가?
⓶ 당신은 어떤 경우에 신앙이 아니라 신념에 사로잡히는가?
⓷ 신앙에 천착하도록 애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역하기 (WORK)
셀 사역

1) 야외 예배 준비하기
2) 셀 원들의 범사 파악하여 중보하기
3) 공 예배 참석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기
4)  태신자 명단 매 시간마다 불러 기도하기
5) 학생과 청년들 위해 기도하기
6) 담임목사 사역 위해 기도하기



주간 중보기도

1) 5월 사역을 위하여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 교    사주일, 전교인 야외 예배 등등)
2) 환우들을 위해
3) 지역 셀이 섬기는 태신자 구원을 위하여
4) 피선교지를 위해
5) 군에 있는 자녀들을 위해(이장규, 신요한, 김진현)
6)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설교요약 (SUMMARY)
본문 : 욥기 18:1-21
제목 : 신념이 아닌 신앙으로     

서론)   
  저는 오늘 본문에서 신앙과 신념에 대한 분명한 구분을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IN GOD WE TRUST” 미국 1달러 지폐에 새겨져 있는 문구입니다. 그러나 맘몬이라는 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미국은 1달러 지폐에 쓰여 있는 그들의 문구가 얼마나 허울 좋은 선전 문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영어단어 ‘TRUST’라는 단어는 번역하면 ‘신뢰하다.’ 혹은 ‘맡긴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BELIEVE’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믿는다.’는 전형적인 단어입니다.
  그러나 TRUST 와 BELIEVE는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TRUST’는 ‘사상’이나 ‘신념’의 문제를 대상으로 하는 동사입니다. 그러나 신념은 엄격하게 신앙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개념은 사상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영적인 면을 온전히 드릴 수 있는 대상에게 표현하는 신앙적 행위이며 믿음의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표현해야 합니다. “I TRUST IN GOD.” 가 아니라 “I BELIEVE IN GOD.”라고 말해야 합니다.
  ‘BELIEVE’는 다음의 세 가지를 포함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크로스웨이 성경 공부 교재의 저자인 해리 웬트 목사는 적어도 BELIEVE’라는 단어를 사용하려면 세 가지의 필요충분조건이 있어야 함을 강조했는데 동의했습니다. ‘⓵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지식 (KNOWLEDGE) ⓶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동의 (AGREEMENT) ⓷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확신 (CONVICTION)’ 그렇다면 신념이 아닌 신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면 그 신앙의 대상이 원하는 삶에 대하여 세 가지를 전제하면 그 삶을 바르게 살아내야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 욥기 18장은 욥의 친구 빌닷이 욥이 말한 내용에 대하여 반격하는 두 번째의 담론입니다. 엘리바스가 욥에게 회개하지 않는 너로 인하여 하나님이 계속해서 너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고통이라는 굴에서 머물게 될 것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성토를 15장에서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조금도 물러섬이 없이 엘리바스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16장에서는 거기에 따른 반론을 제시했지만 17장에서는 갑자기 그와의 설전도 피곤하다는 듯이 대꾸하지 않고 하나님과 담판을 지으려고 했음을 지난강해를 통해 살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무서움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 대들던 욥의 무기는 죽여 달라는 생떼였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기에 차라리 이 고통을 안긴 분이 하나님이니 죽이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나님께 내놓았음을 17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대들던 욥을 보면서 친구 빌닷은 욥이 괘씸해졌습니다. 본문 1-4절을 읽겠습니다. 2절에 기록된 대명사는 ‘너희’입니다. 빌닷은 욥이 끈질기게 친구들의 말을 무시하는 것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엘리바스와 소발 두 명의 친구들을 가리키며 말한 것입니다. “너희들은 이제 욥에 대하여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친구가 우리들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태도라는 성토를 먼저 꺼낸 것입니다. 그러면서 직접적으로 상당한 감정의 분을 포함하여 3절에서 이렇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짐승으로 보는가?” 이 빌닷의 말은 12:7절에서 욥이 언급한 말에 대한 공세적 반응입니다.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소발의 첫 번째 고발에 대하여 욥이 항변하여 던진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빌닷의 재 반응인 셈입니다.
  그러면서 빌닷은 아주 교묘하게 욥에게 역전 펀치를 날립니다. 4절을 다시 봅니다.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 그러니까 욥이 대단히 분노하여 친구들에게 눈살을 찌푸리며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자기 몸을 찢었다고. 흔히 구약성경에서 참담한 일을 경험하면 자기의 옷을 찢는 행위로 본인의 감정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빌닷은 욥의 상태가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태임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옷이 아닌 몸을 찢었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몸을 찢는 일은 짐승들이나 하는 일이기에 우리가 짐승이 아니라 너 욥이 짐승이라는 빌닷 본인 딴에는 대단히 통쾌한 반격이었습니다.
  이렇게 욥에게 카운터펀치를 날린 빌닷은 이어지는 본문 5절 이하에서 설교자인 제가 보기에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을 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바로 욥에게 앞으로 임할 저주에 가까운 예언입니다. 본문 5-19절까지입니다. “빛이 꺼지는 것, 스스로의 꾀에 빠지는 것, 올가미에 걸려드는 것, 덫에 치이고 몸이 올무에 얽히는 것, 함정이 길목에 있는 것, 무서운 것이 사방에 존재하는 것, 재앙이 기다리는 것, 피부에 질병이 떠나지 않는 것, 의지하던 것들이 뽑히는 것, 밑으로 그의 뿌리가 마르고 위로는 그의 가지가 시드는 것, 이름이 지워지는 것, 세상에서 쫓겨나는 것,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는 것 그리고 남은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것” 등등입니다.
  왜 이 많은 것을 일부러 열거했는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빌닷이 욥에게 퍼부은 저주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고 있지만 빌닷의 말은 전혀 신앙과는 관계없는 본인의 신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욥기 강해를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은 신앙이 아니라 신념에 불과하다는 교훈입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이 퍼부은 저주시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시가 109편입니다. 시편 109:7-1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무시무시한 저주기도입니다.  다윗이 드린 이 기도에 맹목적으로 아멘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저주는 자신의 주관적인 신념이지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저주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저주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확고한 신념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성향에 따른 고집이지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속성입니다.
  마태복음 13:24-30절을 소개합니다. 가라지와 알곡을 끝까지 같이 놔두라는 것입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이 같이 상할까에 대한 염려 때문입니다. 또 하나,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얻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누가복음 13:6-9절입니다. 한 해만 기회를 더 주는 것이 주님의 마음이며 그 마음을 갖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제는 우리는 본문 마지막 부분인 20-21절을 읽을 차례가 왔습니다. “그의 운명에 서쪽에서 오는 자와 동쪽에서 오는 자가 깜짝 놀라리라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 욥에게 철저하게 저주를 퍼부은 빌닷의 마지막 모습은 서늘하기까지 합니다. 어느새 빌닷은 하나님이 해야 할 말씀을 본인이 주저 없이 전하는 월권을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꿰찬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떤 사람이 알고 모르고는 하나님 판단의 몫이지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를 위해 중보 할 따름이자 옥석을 가릴 위치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왜요? 나도 하나님을 모르는 자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을 알고 구원의 은혜까지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우리는 신념대로 살면 안 됩니다. 왜 신념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하나 본 뒤에 설교를 맺겠습니다. 카라바조의 대표작인 ‘의심 많은 도마’입니다. 신념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흉터 자국에 손을 집어넣은 뒤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그러나 신앙은 무엇입니까? 보지 않고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경우에 따라 최고의 불신앙이 될 수 있는 확고한 신념이 아닌 확고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