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4월 7일 주간사역2024-04-23 16:58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신앙생활 후에 가장 많이 변화되고 있는 것을 나누어보자.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425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  복음성가: 주님이 주신 땅으로  

 
말씀읽기와 적용 (WORD)
3.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구원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삶의 기로에서
● 본문 : 갈라디아서 3:23-25
1) 믿음이 오기 전에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⓵ 23, 24절을 읽어보자.
⓶ 율법이 우리를 ‘묶고, 가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23절)
⓷ 율법이 우리를 ‘묶고, 가두는’ 효과는 무엇인가?(24절)  

2) 믿음이 온 후에 율법과 우리의 관계는 무엇인가?
⓵ 25절을 읽어보자.
⓶ 율법을 부르는 특별한 비유를 통해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설명해보자.  

3) 적용하기
⓵ 설교자가 주고자 한 오늘의 영적 메시지는 무엇인가?
⓶ 믿음이 온 후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변화는 무엇인가?
⓷ 변화를 멈추게 만드는 율법에 매인 요소들을 버리도록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기도

1) 사순절을 영성 훈련의 기회로 삼아 더 성장하게    하옵소서. 
2) 춘계 대 심방 사역이 승리할 수 있도록
3) 4월의 사역을 위해 (월삭예배, 고난주간 특별 집회, 부활절 예배, 제 10주년 창립 기념주일 예배    등등)
4) 군에 있는 아들들을 위해 (김진현, 이장규, 신요한)
5) 지역 셀이 섬기는 태신자 구원을 위하여   

 
셀 사역
1) 4월 월삭예배 독려하고 집중하도록 오늘사역 이후에  권면하기
2) 특별 집회를 상고하고 사역에 누락되지 않도록 미리  스케줄 점검시키기
3) 4월 한 달 사역 내용대로 잘 실천하여 부활의 기쁨을  전하는 주인공 되기
4) 춘계 대심방 사역 준비하고 중보하기
5) 사순절 피정에 소홀하지 않기   

 
설교요약 (SUMMARY)

본문: 갈라디아서 3:23-25
제목: 구원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의 기로에서

서론)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시작하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때 어떻습니까? 성숙과 성장입니까? 아니면 정체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후퇴이며 침체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에베소 교회의 지체들에게 권고했습니다. 에베소서 4:13-15절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 교우들 거의 대부분이 읽은 카일 아이들먼의 ‘NOT A FAN’에 기록된 에필로그의 글 때문에 우리는 한 동안 은혜를 나누었던 글이 있습니다. 억만장자였고, 명문대 출신의 장래가 촉망되는 수재였고, 수십억 달러의 가치가 나가는 낙농 회사 상속자였지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후 미련 없이 이슬람교도들이 있는 위험한 땅으로 가서 그곳을 복음화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25세의 아까운 나이로 척수막염에 걸려 세상을 떠나 그토록 본인이 복음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원했던 이슬람의 땅인 카이로에 묻히게 된 하나님의 사람 말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성경책 속에서 발견된 세 개의 문장은 지금도 나는 성장하고 있는가를 물으며 영적으로 흥분하게 합니다.“NO RESERVES/NO REGRESS/NO RETREATS” (pp,288-291) “남김없이, 후회 없이, 후퇴 없이”. 모두가 은혜로운 흔적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 우리 교우들과 세 번째의 문장을 질문하고자 합니다. 세인의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후퇴하지 않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장하여 앞으로 나가고 있습니까?
   
본론)   
 오늘 본문을 저는 23-25절까지 만으로 한정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번역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성숙해져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믿음으로 흔쾌히 응답하기까지, 우리는 모세의 율법에 세심하게 둘려 쌓여 보호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율법은 여러분이 잘 아는 그리스도의 가정교사와 같습니다. 아이들을 학교까지 바래다주고, 아이들이 위험에 빠지거나 산만해지지 않도록 지켜 주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하도록 도와주는 가정교사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목적지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직접 사귀게 되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헬라어 ‘파이다고고스’를 ‘가정교사’라고 번역했습니다.  단어는 개역판에서는 ‘몽학 선생’이라고 번역했고, 이 단어가 한자라 조금 어려워 쉬운 단어로 개역개정판이 번역했는데 바로 우리가 오늘 읽은 ‘초등선생’입니다.
  그렇다면 초등교사의 역할, 가정교사의 역할, 몽학선생의 역할을 했던 것이 무엇이라고 바울이 본문에서 비유로 말합니까? 율법입니다. 저는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지난 강해들을 통해 계속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존재해야 하며 지난주에는 심지어 믿음과 병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까지 선포했습니다. 율법을 통해 우리들이 범법하는 죄인임을 인식하여 도무지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알고 율법은 십자가로 우리들을 초대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율법으로 인하여 우리들은 막 살지 않게 된다는 것도 나누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설교의 적용은 대단히 용이해지고 쉬워집니다. 어떻게 적용하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율법은 몽학선생이고, 가정교사이고, 초등선생이라는 말입니다. 초등학교 교사는 초등학생들에게 필요하지 장년에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을 향해 선언합니다. “우리들이 율법에 매인 것은 믿음이 오기 전이었다고.”(23절) 더불어 25절에서 아주 단호하게 이렇게 바울은 적시했습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 초등교사에게 인도를 받았던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후, 결코 초등교사의 지도 아래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무엇을 전제한 바울의 발언입니까? 성장을 전제한 발언입니다. 성숙을 전제한 발업니다. 키가 자랐기 때문도 아니요, 몸무게 많이 나가는 성장을 경험했기 때문도 아니라 바울은 믿음 이전과 믿음 이후의 분명한 구분으로 초등선생의 지도 역할을 구분하고 있음에 오늘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오시기 이전까지의 신앙인들의 삶의 바로미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들에게 믿음을 주셨기에 이제는 예수께서 우리들에 보여주신 복음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적 삶의 바로미터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시대인 지금도 율법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이제는 복음의 능력을 무기삼아 율법을 지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짧은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들이 받아야 하는 영적 교훈을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의 레마로 받겠습니다. 

※ ‘구원 그 이전의 삶’에서 ‘구원 그 이후의 삶’으로 성장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율법은 구원 그 이전의 삶을 지배했던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초등선생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런 은혜를 받았다면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초등학교 교사의 인솔에서 벗어나 그 이상의 인솔을 받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을 의미하고 상징하는 초등선생의 테두리 아래에서 벗어나는 삶은 율법을 무시하는 삶이 아니라 더 율법에 민감한 긴장감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가장 값비싼 은혜인데 현대 교회는 이 은혜를 가장 값싼 은혜로 전락시키는 죄를 범했다고 본회퍼는 지적했습니다. “믿음의 결핍에 대한 불만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언제나 불순종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목회자는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만은 값싼 은혜의 위로와 너무 잘 맞아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본회퍼, “나를 따르라”,p,67) 우리들이 은혜로 값비싼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율법이 조명하는 성숙한 삶을 살아내도록 조금은 과격하고 억센 표현 같지만 심비에 새겨야 합니다.
  지난 주간 새벽예배 시간에 교우들과 함께 성경을 통독하면서 읽었던 역대하 13장에서 가슴을 뜨겁게 하는 감동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남 유다의 초대 왕이었던 르흐보암은 백번을 양보해서 역사의 평가로 보면 그냥 있어도 괜찮고 없어도 괜찮았던 그런저런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아비야가 유다의 제 2대 왕으로 등극한 뒤, 판세는 전혀 다르게 변화되었습니다. 아버지 르호보암이 뜨뜨미지근 한 상태로 걸어갔던 유다의 영적 상태를 정비하고 나라를 곧추 세우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바로 그 때 군사력이나 경제력 그리고 인구 밀도로 비추어 볼 때 강대국이라고 할 수 있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이 800,00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합니다. 당시 아비야에게는 그 군사력의 반 밖에 되지 않는 400,000만 명이 고작이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이 전쟁은 게임이 안 되는 전쟁이었습니다.그런데 아비야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고 전쟁이 막 시작되기 직전 양국의 군사들이 서로 마주보며 일촉즉발의 일전을 앞두고 있는 바로 장소인 스마라임 산 위에 올라가 아비야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인 여로보암과 그의 부하들을 향하여 소리칩니다.
  역대하 13:7-12절입니다. 여러분은 나에게는 나의 하나님이 시퍼렇게 살아계신다고 선언할 성숙함이 있으십니까?
나에게는 나를 위해 중보하고 있는 분명한 목회자가 있기에 두렵지 않다고 확신하며 믿음으로 세상에 나아가 선포할 믿음의 성숙함이 여러분에게 있으십니까? 나는 매일 저녁에 불을 켜서 주님께 예배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도우실 것이라는 믿음의 성숙함이 있습니까?

결론)
  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인 노명우 박사가 ‘세상 물정의 사회학’에서 이런 글을 기록했습니다. “분유로 시작한 인생, 상조회사의 고객으로 끝맺는다.”(p,251) 이 문장에서 자유로운 인생이 있습니까? 저는 분유로 시작하고 상조회사 고객으로 끝을 맺는 평범한 우리 인간의 자화상 속에,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만큼 위대한 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태어나고 죽어가는 내 삶의 현장에 개입하셔서 나를 주님의 자녀 삼아주셨다면 우리는 이제 거기에 맞는 ‘구원 그 이후의 삶’을 더 강력하게 살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달라스 윌라드 목사의 말대로 값비싼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더 노력하고 분투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혜의 반대는 공로이지 노력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지식을 바탕으로 적극 행동에 나서지 않는 한 그리스도를 닮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달라스 윌라드,“잊혀진 제자도”,pp,121-122)
  이 촌철살인의 메시지에 아멘하고 사순절 다섯 번째 주간을 살아내는 우리 세인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