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3월 31일 주간 사역2024-04-23 16:58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당신의 기질은 어떤 기질입니까? (다혈질, 우울질, 담즙질, 점액질 등등)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340장 – 어지러운 세상 중에   
●  복음성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병행이 정답입니다.
● 본문 : 갈라디아서 3:15-22
1)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구원의 복)이 ‘그 자손’에게 이어진다는 16절의 해석을 구체적으로 나누자.

⓵ 먼저 창세기 15:6절과 본문 16절을 읽자.
⓶ ‘그 자손’은 누구인가?
⓷ 의미는 무엇인가?
  

2) 그렇다면 19절과 21절에 언급된 율법은 무엇인가? 에 대하여 답해 보자.
⓵ 먼저 19절, 21절을 읽자.
⓶ 율법은 무엇인가?  

3) 적용하기
⓵ 설교자가 주고자 한 오늘의 영적 메시지는 무엇인가? - 테마를 참고하자. 
⓶ 율법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사실과의 상관관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⓷ 내가 갖고 있는 극단주의의 요소를 성령의 불로 소멸하도록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기도

1) 사순절을 영성 훈련의 기회로 삼아 더 성장하게 하옵소서. 
2) 춘계 대 심방 사역이 승리할 수 있도록
3) 4월의 사역을 위해 (월삭예배, 고난주간 특별 집회, 부활절 예배 등등)
4) 군에 있는 아들들을 위해 (김진현, 이장규, 신요한)
5) 지역 셀이 섬기는 태신자 구원을 위하여 


셀 사역

1) 4월 월삭예배 독려하고 집중하도록 오늘사역 이후에 권면하기
2) 특별 집회를 상고하고 사역에 누락되지 않도록 미리스케줄 점검시키기
3) 4월 한 달 사역 내용대로 잘 실천하여 부활의 기쁨을 전하는 주인공 되기
4) 춘계 대심방 사역 준비하고 중보하기
5) 사순절 피정에 소홀하지 않기 
  

 
설교요약 (SUMMARY)
본문: 갈라디아서 3:15-22
제목: 병행이 정답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본문입니다.
해서 존 스토트목사도 19-20절은 해석하기가 어렵다고 정평이 난 구절(존 스토트, “갈라디아서 강해”, p,109)이라고 정의할 정도로 오늘 본문 해석은 설교자인 저에게도 적지 않게 곤혹스러운 텍스트였습니다.
강해 설교의 단점 중에 하나가 본문을 뛰어 넘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본문 해석은 저에게도 정말로 힘이 들었다는 고백을 드립니다.
오늘 본문을 해석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땅에 살다가 때가 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영향력이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가 남긴 유언이 무엇인가? 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변호사가 유족을 불러서 고인의 유언 내용을 공개했습니다. 그러면서 변호사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고인의 유언을 유족들 개개인의 뜻에 맞지 않는 유언이라고 해서 뜯어 고치거나 무언가의 내용을 삽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고인의 뜻을 저버리는 불법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시작하면서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율법 교사들에게 바로 이 점을 부각시키면서 본문을 전개한 것입니다. 율법 교사들인 너희들이 하나님에게 아브라함에게 약속으로 주신 유언과도 같은 것을 너희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뜯어고치려고 한다는 질타를 말입니다. 본문 16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에 주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5:6절을 소개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그렇습니다. 아브라함 여호와를 믿으니 그것을 의로 여기시고 복을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복의 근거는 율법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해서 바울은 지난 설교에서 살핀 것처럼 갈라디아서 3:14절에서 지금 유언을 변질시키려는 예루살렘에 내려오는 율법주의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쐐기를 박는 듯한 선포를 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이방인들에게도 미치게 하는 것인데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받는 복이라는 약속입니다. 왜 바울이 이렇게 강하게 아브라함의 복을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확대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 약속은 앞에서 말한 변질되게 하면 안 되는 유언장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안중에도 없었던 이방인들에게까지 아브라함의 복이 언급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유대인들이 유언장을 조작하려고 하기 때문에 바울은 본문에서 강한 표현으로 그 다음의 표현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언급한 뒤에 16절에서 아주 특별한 단어를 인용합니다. ‘그 자손’입니다. 이 단어는 오늘 설교를 이해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단서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이 이어지는 대상을 ‘그 자손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하지 않고 ‘그 자손’이라고 단수로 표현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 기록된 ‘그 자손’이라는 단어는 메시아이신 예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어진 복은 후대에 단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게 편입된 자에게 임하는 복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복이 임하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 속하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핀 것입니다. 그러나 16절에 기록된 대로 바울은 그런 망언을 입에 담지 말라고 율법주의자들을 몰아 세웠습니다. 왜? 아브라함에게 임한 복은 아브라함에 속한 자가 받는 복이 아니라 그 자손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편입된 자가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편입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가능한 것이기에 이방인들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도 율법이 없었던 시기에 존재했기에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처럼 이방인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논리가 바울의 주장이자 논리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유대인들은 청천벽력과 같은 궤변으로 도저히 바울의 말을 수용할 수 없는 신성모독에 가까운 소리로 들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목숨을 걸고 있는 율법 무용론처럼 들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미리 짐작한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논리를 한층 강화합니다. 본문 17-20절에 연이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공동번역 성경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맺어주신 계약이 사백삼십 년 후에 율법이 생겼다 해서 소멸되거나 그 약속이 무효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법을 근거로 해서 상속을 받는 것이라면 그것은 벌써 약속된 것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약속에 따라 아브라함에게 상속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약속된 그 후손이 오실 때까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덧붙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중재자의 손을 거쳐 제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약속은 중재자를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 한 분의 생각으로 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잘라 17-20절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율법은 구원을 받게 해 주는 기능이 아니라 구원이 필요함을 알게 해 주는 기능의 역할이라는 말입니다. 분명히 바울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무엇 때문에 있게 되었습니까? 자문하고 이렇게 자답합니다. 그것은 약속된 그 후손이 오실 때까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덧붙여주신 것입니다. 바울의 논리는 기막히게 논리 정연했습니다. 조금도 유대인들에게 틈을 주지 않은 바울은 오늘 본문을 마무리하는 21-22절에서 언 해피엔딩이 아니라 해피엔딩으로 유대인들의 마음을 달래는 아량까지 보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저는 이 구절의 해석을 오늘 설교 제목을 만든 텍스트로 여겼습니다. 율법의 기능은 하나님의 약속들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대 명제와 대치되는 것인가? 바울의 말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은 구원을 받게 하는 요소가 아니지만 나의 죗성을 깨닫게 함으로서 구원의 요소인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영적인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믿음은 배치되는 것이 병행되어야 하는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이상의 본문 주해를 통해 우리들이 함께 나누어야 할 오늘의 은혜를 접목하겠습니다.

※ 신앙의 극단주의는 언제나 경계해야 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빈틈없는 공격을 가했지만 그렇다고 극단의 빠지지 않는 감동적인 멘트를 21절 전반절에서 남깁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이 무용하다는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밝힙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선포했던 것처럼 율법은 존재해야 합니다. 왜입니까? 율법이 있음으로 범법의 사실을 알게 되고 이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극단으로 치달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가? 율법의 조명으로 날마다 민감하게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나는 율법을 지켜 구원의 반열에 들어서면 된다는 행위 구원론의 유혹을 느낄 때마다 뼈저리게 그럴 수 없음을 또한 율법을 통해 깨달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값없이 받는 은혜 때문에 감사하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군가가 어느 한쪽으로 나를 강제하면 경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율법은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구원 받은 자가 날마다 자신의 연약함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로 삼아야 할 파트너입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주의는 더 경계해야 합니다. 전혀 성서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나는 율법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교만함은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율법은 나를 은혜로 이끄는 선생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믿음은 병행해야 관계이지 유리해야 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율법과 믿음은 병행이 정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