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3월 24일주간 사역2024-04-23 16:57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여러분의 인생 여정 중에 가장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시기가 있었다면 언제였습니까?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546장 – 주님 약속하시 말씀 위에서   
●  복음성가: 주만 바라볼찌라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곡해하지 말라
● 본문 : 갈라디아서 3:10-14
1)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지만 율법에 대하여 곡해하지 말아야 하는 두 가지의 이유는?
설교의 테마를 중심으로 이야기 해보자.

  

2) 마태복음 5장, 출애굽기 22장 그리고 로마서 1:17절과 야보고서 2;26절의 상관관계는?
설교를 중심으로 말해보자.
⓵ 마태복음, 출애굽기
⓶ 로마서, 야고보서  

3) 적용하기
⓵ 은혜를 느끼며 체휼하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가? 
⓶ 율법을 곡해하여 막 살고 있지는 않은가?
⓷ 사순절을 의미 있게 보내고 있는가?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기도

1) 사순절을 영성 훈련의 기회로 삼아 더 성장하게 하옵소서 
2) 다니엘 세 이레 기도회의 승리를 위해
3) 대한민국에 공의와 정의가 흘러넘치게 하옵소서.
4) 환우들의 회복과 성도들의 경영체가 승리하도록
5) 그리스도인으로서 언어 사용을 조심하도록
6)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하여
7) 이번 주간부터 있는 대심방 중보



셀 사역

1) 세 이레 기도회 잘 마무리하기 
2) 셀 예배 결석하는 셀 원들 독려하기
3) 셀 예배 책임감을 갖고 진정성이 있게 드리기
4) 태신자 구원을 위해 기도나누기
5) 지역 셀 피선교지 중보하기
6) 리더와 인턴을 위해 중보하기
7) 대심방 준비 잘 하기
  

 
설교요약 (SUMMARY)
본문: 갈라디아서 3:10-14
제목: 곡해(曲解)하지 말라
먼저 출애굽기 21:22-2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으나 다른 해가 없으면 그 남편의 청구대로 반드시 벌금을 내되 재판장의 판결을 따라 낼 것이니라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이 구절은 언약 법전에 들어가 있는 통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라고 부르는 율법입니다. 문자적으로 살피면 대단히 살벌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는 율법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이 동태복수법을 들고 나서서 전혀 다른 말씀을 선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38-4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결국은 예수님께서 동태복수법을 폐기하신 내용처럼 들리는 산상수훈의 한 교훈을 선언하신 셈이 되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이심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출애굽기 21장의 동태복수법이라는 율법은 폐기된 것을 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이렇게 선언하신 것처럼 보였던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5:17절을 나누겠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사정이 이렇다보니 출애굽기의 언약법전과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의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옳은지에 대해 곤혹스러울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헌데 김 목사는 이 두 구절에 해석하면서 이렇게 접근한 것을 보았습니다. “출애굽기는 가해자에게 준 말씀이고 마태복음은 피해자에게 주신 말씀이다. 다시 말해 남에게 피해를 입혔을 때, 그 책임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고, 피해를 당한 사람은 사랑과 용서를 할 줄 아는 자세를 가지라는 말씀이다.” (김동호, “예수 없는 큰 사람, 예수 있는 작은 사람”,p,160) 읽다가 고개를 끄덕이게 한 현장 목회자의 해석이었기에 눈여겨 담아 놓았던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이후 진짜로 율법은 폐기된 골동품인가? 의 제문제(諸問題)에 대하여 생각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답변하고 싶습니다. 극단적인 복음주의자들조차도 율법 무용론을 주창하는 이유는 율법에 대하여 심각한 곡해 때문이라고. 저는 몇 주 동안 구원의 조건으로 제기한 유일한 토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믿음이외에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강력하게 선포했습니다. 그 어떤 것도 구원받음 즉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한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특별히 갈라디아 교회를 유린한 거짓 교사들이 들고 나온 할례로 대변되는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우기면 그것과는 맞서 싸울 것까지도 지난 주일 설교에서 교우들에게 천명했습니다.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수순으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이 되지 않는 율법, 그리고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으니까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얼마든지 가능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시 확대하여 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여전히 존재해야 하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혹시 여러분 가운데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왜? 모순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모순처럼 들리는 메시지를 풀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원인이 하나님을 믿은 믿음 때문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6절) 뿐만 아니라 본문 10절을 보면 거의 율법 폐기론자와 같은 강한 톤으로 율법을 성토하는 것처럼 보이는 메시지를 바울은 남겨놓았음도 볼 수 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어디 이뿐입니까? 이어지는 본문 11-13절까지를 살피면 율법이 살아남을 수 여백은 단 1도도 보이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바울이 심지어 어떤 단어까지 가용했습니까? `‘율법의 저주’라는 표현까지 썼으니 율법에 관한한 갈 데까지 다 간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분명히 바울은 본문에서 율법에 대한 경계를 놓지 않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바울이 율법에 대하여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까?
앞에서 설명한 동태복수법을 해석한 한 목회자의 방법을 대입한다면 그림이 그려집니다. 여러 차례 반복하여 설명 드린 것처럼 갈라디아 교회의 영적 상태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일구어 놓은 아름다운 주님의 공동체, 갈라디아 교회가 율법이라는 복병으로 인해 여지없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할례주의자들에 대한 성토는 물론 그 허접한 율법주의에 넘어간 갈라디아교회의 성도들에 대한 섭섭함과 서운함 그리고 유감스러움 등등의 복합적인 심리가 본문 속에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존재해야 하며 또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1)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할 때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함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본문 1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접하면 율법을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 받을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모세를 기억해 보십시다. 모세는 율법을 직접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모세도 율법을 어겼습니다. 므리바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어 부르며 여겼고, 물론 율법을 부여받기 이전이기는 하지만 살인도 저질렀습니다. 누가 율법의 조항을 온전히 행할 수 있단 말입니까?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12절의 말씀은 율법에 대한 이행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바울의 말대로 율법의 저주라는 표현대로 더 무거운 율법에 대한 사형선고와 같은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절망입니까? 절대로 행할 수 없는 율법의 무게, 결코 완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율법이라는 멍에를 보면서 우리들이 얻는 다른 감동이 있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나이기에 나는 더 더욱 십자가의 그 사랑이라는 은혜가 필요하다는 깨닫게 되는 은혜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 공동체에서나 교회에서 선을 행하려고 애쓰고 노력할지 모르지만, 이 중 어느 것도 우리를 범법자들에게 임하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해 줄 수 없다.” (존 스토트, “BST 갈라디아서 강해”,p,97)
만에 하나 율법이 존재하지 않으면 우리는 내가 범법을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려는 마음을 가질 때 나의 연약함과 한계를 깨닫게 되고 결국은 십자가의 은혜로 나아가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5-6절을 소개합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이 고백과 맞물려 바울의 또 다른 고백을 들어보십시다. 고린도전서 15: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저는 이 두 구절을 합쳐 있을 때마다 이런 감동이 임합니다. 도저히 율법으로는 도달할 수 없었던 구원의 감동을 마침내 성취하게해 준 것이 바로 은혜였다는 감동 말입니다. 율법은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십자가의 은혜로 인도하는 선생님입니다.
2) 율법을 지키려는 삶은 구원 받은 자의 삶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환언한다면 막 살지 않게 해 주는 바로미터의 역할을 율법이 해 주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바른 교회 아카데미 세미나에서 강사로 나선 장신대 박경수 교수가 이런 설명을 했습니다. “로마서가 율법주의자들에게 쓴 바울의 편지라면 야고보서는 믿음 결벽주의자에게 쓴 편지다.” 상당히 의미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1:17절의 이신칭의(以信稱義)입니다. “믿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야고보서의 주제는 야보보서 2:26절의 이행칭의(以行稱義)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렇다고 성경의 두 구절이 배치되거나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두 편지의 수신자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율법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경계를 늦추지 않고 막 살지 않게 만들어주는 바로미터라고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의지를 관철시켜 줄 수 있는 바로미터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왜 그리스도인입니까?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 받음에 감사하고, 더불어 그 은혜를 깨닫게 해 준 율법의 가르침을 곡해하여 소홀히 여기지 않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