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3월 17일사역2024-04-23 16:57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상대방이 어떤 경우, 우길 때 가장 황당했나요?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90장 –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  복음성가: 똑바로 보고 싶어요.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우기지 말자
● 본문 : 갈라디아서 3:6-14
1) 창세기 12:3절과 본문 9절의 현격한 차이에 대하여 나누어 보자.
⓵ 창세기 12:3:
⓶ 갈라디아서 3:9
⓷ 차이는?  

2) 로마서 4:9-13절과 본문 11-14절을 참고하여 공통분모를 찾아보자.
⓵ 로마서 4:9-13
⓶ 갈라디아서 3:11-14
⓷ 공통분모는?  

3) 적용하기
⓵ 본문 설교를 통해 설교자가 강조하고자 했던 레마는 무엇이었는가?
⓶ 오늘의 언어로 레마를 재해석해 보자.
⓷ 오늘 교회에서 믿음 이외의 것을 요구하는 일체의 내용들과 치열하게 싸우도록 다짐하자.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기도

1) 사순절을 영성 훈련의 기회로 삼아 더 성장하게 하옵소서 
2) 다니엘 세 이레 기도회의 승리를 위해
3) 대한민국에 공의와 정의가 흘러넘치게 하옵소서.
4) 환우들의 회복과 성도들의 경영체가 승리하도록
5) 그리스도인으로서 언어 사용을 조심하도록
6)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하여



셀 사역

1) 세 이레 기도회 만반의 사역 감당하기
2) 셀 예배 결석하는 셀 원들 독려하기
3) 셀 예배 책임감을 갖고 진정성이 있게 드리기
4) 태신자 구원을 위해 기도나누기
5) 지역 셀 피선교지 중보하기
6) 리더와 인턴을 위해 중보하기
  

 
설교요약 (SUMMARY)
본문: 갈라디아서 3:6-14
제목: 우기지 말자
본문은 갈라디아서에서 본체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말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대단히 중요한 단락입니다.
본문 6절을 읽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이 구절은 오늘 본문 해석을 위한 바로미터의 역할을 하는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신분과 선민공동체의 뿌리를 두 사람에게 둡니다. 한 명이 바로 아브라함이요, 또 한 명이 다윗입니다. 후자의 사람인 다윗에 대한 해석은 여타설교를 통해 상당히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윗공동체라고 말할 때 적어도 두 가지를 전제합니다. ⓵ 언약 공동체로서 선민 공동체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⓶ 절대로 이스라엘은 패하지 않는다는 시오니즘이라는 민족주의입니다. 이 두 가지의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남북 이스라엘이 바벨론과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했을 때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반드시 우리는 회복될 것이라는 대단한 민족적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설명은 이 정도로 약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뿌리는 족장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그러므로 유대인이었고, 여타 다른 민족은 철저하게 배제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고집하는 계보는 혈통적인 계보입니다. 그래서 혈통적인 계보에 들지 않는 여타 다른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탈락되어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믿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혈통이요,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법 즉 율법을 부여 받은 유일한 민족이 본인들이라는 종교적인 원류 의식만이 중요했습니다. 이방인은 누구입니까? 율법을 부여 받지 못한 버려진 족속에 지나지 않는 존재입니다. 이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래서 언감생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6절은 그 시작부터가 의미심장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이 구절은 아마도 유대인들에게는 폭탄과도 같은 선언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 믿음 때문이었다는 선언은 경천벽지 할 만한 충격적인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의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유대인들은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와도 같은 명제를 바울이 뒤집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믿음 때문이라는 전제는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선민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직격탄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유대인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갖고 있는 자가 그의 후손이라는 파격을 의미하는 것이 7절입니다. 이것에 대한 선언이 비논리적이었습니까? 만에 하나 그렇다면 설교 제목처럼 우기는 것이 됩니다. 헌데 바울의 이 선언은 결코 비논리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성서적이며, 논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예를 들겠습니다. 본문 8절로 여러분을 초대하겠습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쐐기입니다.
반론할 수 없는 너무나 선명한 이론이자 논리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민족의 뿌리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창세기 12:3절에 나오는 복을 유대인들이 자연스럽게 태생적으로 받는 복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이 됩니다. 창세기 12:3절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렇게 엄청난 복은 유대인이 아니면 받을 수 없는 복입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이 복의 통로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당연히 그 복을 받을 것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특권 의식으로 유대인들은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본문 유대인들에게는 결정적인 유대적인 자존감인 이 명제를 보기 좋게 전복시켜놓았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적어도 저에게는 9절의 이 말씀이 대단히 위력적인 말씀으로 접목됩니다. ‘아브라함과 함께’라는 이 대목입니다. 창세기 12:3절은 풀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만’ 그런데 본문 9절은 전혀 다른 바울의 해석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방식으로’ 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9절은 반드시 한 가지를 전제하는 것임을 천명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이는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하더라도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믿음이 없이는 구원 받지 못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한 성경적 내증의 가장 결정적인 뒷받침을 해 주는 성경적인 내증을 소개하고 오늘의 언어로 설교의 교훈을 적용하겠습니다.
조금 길지만 읽겠습니다. 로마서 4:9-13절입니다.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그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그들도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바울이 로마서에서 전한 이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시점을 설명합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이 할례 전인가? 할례 후인가? 에 대한 신학적 접근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가 할례를 받기 이전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다고. ‘무할례시니라’ 그렇다면 이런 논증이 가능해 집니다. 할례를 받은 이후에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았으면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율법주의 그리고 할례 이후의 구원이라는 논리가 설득력을 더하게 됩니다. 허나 실상은 그 반대였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 시점을 ‘무할례시니라’라고 말함으로 할례 무용론을 적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는다는 유대인들의 억지와 우김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갖고 있는 자는 누구든지 즉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는다는 명쾌한 보편적 구원론을 설파한 것입니다. 이 분명한 성서적, 이론적인 근거를 토대로 바울은 본문 11-14절에서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렇다면 이상에서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통해 오늘 사순절 두 번째 주일에 우리들이 받아야 하는 은혜는 무엇일까요?
※ 구원의 단서가 조건이라고 우기는 무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경에 분명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강력하게 선언하고 있음에도 왜 많은 사람들이 믿음 그 외의 것을 조건으로 답니까? 그것은 종교적인 님비 때문입니다. 님비(NIMBY)가 무엇입니까? 기득권 강화입니다. 내 땅에 절대로 들어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내 땅에 들어오려면 무언가를 지불하라는 폭력을 가하는 것이 님비입니다. 그 무언가가 조건입니다. 그 무언가가 권위를 차지하는 비용입니다. 그 무언가가 주류 안에 들어오는 데 지불해야 하는 최소한의 대가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한 할례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특권 즉 시오니즘과 다윗왕조의 권위를 그렇게 쉽게 내 줄 수 있겠느냐는 압박이었습니다. 주군이신 예수께서는 정말로 값없이 당신의 몸을 주셨건만 그를 먼저 따랐던 기득권주의자들은 주님의 몸값을 요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탈을 주저 없이 저지른 것이 할례주의자들의 죄악이었습니다. 일전에 설교를 했던 것처럼 교회는 ‘누구의 교회’가 아니라 ‘누구나의 교회’이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롭다함은 아브라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함께 하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은혜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들어오려면 이것에 도장 찍어야 합니다. 저것에 도장 찍어야 한다고 우기면 어찌 그것이 교회일 수 있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남겨 놓았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그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자들을 멸망하지 않게 하시고 구원을 얻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받아들이는 믿음 외에 무슨 조건이 더 필요합니까? 더군다나 그 믿음조차도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조건이 구원을 받는데 그리 많습니까? 우기지 맙시다. 궁색하면 우기게 됩니다. 뭔가를 추접하게 요구하게 되면 우기게 됩니다. 구원은 은혜이지 조건이 아닙니다.
나무 박사, 신준환 박사는 ‘다시 나무를 보다.’에서 인디언 격언을 하나 소개합니다.
“늪을 건널 때는 가장 멀리 돌아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p,73)
근래 현대인들에게 임한 치명적인 적은 원칙론이 아닌 방법론에 빠지게 하는 유혹들이 많아 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보다는 수단에 더 귀를 기울이게 합니다. 정말로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은 조건이 아니라 은혜를 주셨습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주님이 주심 은혜를 보는 사람들이지 교회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조건을 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이 은혜라고 하셨으면 은혜입니다. 얄팍한 지식으로 우기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셈법을 인간의 셈법으로 우기지 않는 신실한 종들이 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