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감동적인 은혜와 오늘 느끼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305장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 복음성가: 하나님이시여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은혜는 시제를 초월합니다. ● 본문 : 갈라디아서 3:1-5 1)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사실 외에 바울이 언급한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임했던 은혜는? 2) 왜 성령 하나님은 믿음을 갖고 있는 성도들에게 임하고 또 일하시는가? 사도행전 11:15-16절에 기록되어 있는 고넬료 가정에 얽힌 베드로 사역의 기사로 답해 보자. ⓵ 고넬료 가정: ⓶ 베드로의 사역: |
3) 적용하기 ⓵ 성령의 임하심과 일하심이라는 은혜가 시제를 초월하는 연속성이 있다는 메시지를 나에게 적용해 보자. ⓶ 그렇다면 은혜는 단절인가? 연속인가? |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기도
1) 사순절 기간 동안 영적 피정을 위한 개인적인 작정들이 있기를 2) 다니엘 세 이레 기도회 준비와 응답 받는 사역이 되도록 3) 3월 사역이 은혜롭게 승리할 수 있도록 4) 환우들의 회복과 성도들의 경영체가 승리하도록 5) 그리스도인으로서 언어 사용을 조심하도록 6)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하여
셀 사역
1) 세 이레 기도회 만반의 사역 감당하기 2) 결석하는 셀 원들 독려하기 3) 기도 제목 나누기 4) 카풀 정리하기 – 힘든 셀은 지전도사에게 요청 5) 리더와 인턴을 위해 중보하기 | 설교요약 (SUMMARY) 본문: 갈라디아서 3:1-5 제목: 은혜는 시제를 초월합니다.
본문 1절을 읽어보십시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더불어 이어지는 3절을 연이어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이 두 절에서 바울이 연속하여 사용한 단어가 바로 ‘아노에토스’ 즉 ‘어리석다.’ 는 단어였습니다. 이 단어는 다른 의미로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하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이 보기에는 지금 할례를 받는다고 선언한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보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엉뚱한 일임을 개탄한 것입니다. 바울은 할례를 받겠다고 선언한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너무나 속이 상하고 안타깝고 또 한편으로는 분노스러워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 혹은 ‘이해하지 못할 짓을 하는 자들’ 이라고. 왜 이토록 바울은 굵은 감정의 선을 내세우면서까지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의 지체들을 비토 했습니까? 2-5절 본문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역설하며 반문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이 어떤 이유 때문이겠는가? 2절에서 분명히 밝힙니다. 너희들이 성령을 받을 만한 무슨 예쁜 행위를 행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너희들이 갖고 있는 믿음 때문이었는가? 바울의 역정이 얼마나 컸으면 바울은 이 2절의 질문에 대한 강조를 5절에서 다시 재론합니다. 성령의 임하심고 그 분의 능력행하심의 근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 때문인가? 들을 때 생긴 믿음 때문인가? 2,5절에서 연이어 질문한 바울의 답은 말할 것도 없이 후자들입니다. ※ 성령의 임하심과 일하심은 철저하게 믿음을 고백한 자에게 나타나는 은혜라는 교훈입니다. 사도행전 11장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사마리아 지역을 순회하고 예루살렘 교회에 돌아와 순회 보고를 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압권은 말할 것도 없이 욥바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거할 때 일어났던 환상과 그 와중에 받은 가이사랴에 살고 있었던 이방인 고넬료 식솔들의 방문과 가로 인하여 가이사랴에 가서 행했던 고넬료 가정에 대한 간증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자 담임목회자였던 야고보에게 상세하게 그 내용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정말로 의미 있는 간증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1:15-16절을 읽어드립니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베드로는 이미 영적으로 준비된 가이사랴에 거주하고 있었던 고넬료의 집으로 동선을 옮기고 그의 집으로 심방을 가서 말씀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베드로가 전한 말씀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소개하고 있지 않아 정확하게 그 내용을 전달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그가 이제까지 해 온 사역을 근거한다면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캐리그마였을 것이며, 동시에 복음의 엑기스였음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대목입니다. 캐리그마와 복음의 진수를 고넬료의 가정에 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⓵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는 점.(15절) ⓶ 말씀을 전할 때 성령 세례에 대한 복음이 생각났다는 점.(16절) 우리는 지난주에 이런 은혜는 나누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그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6)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을 갖고 있었던 고넬료의 식솔들과 그 믿음을 전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은혜가 무엇이었습니까? 성령의 임하심과 일하심이 그들이 갖고 있는 믿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났다는 은혜였습니다. 전인격적으로 일하시는 성령님은 믿음을 갖고 있었던 베드로, 고넬료에게 임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말씀을 말씀으로 듣고, 말씀으로 전하는 자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 성령님은 믿음으로 역사하시는 전인격적인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성령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이 믿음을 기초로 강력하게 선포한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인 갈라디아 교회의 초창기 성도들에게 전인격적으로 임하셨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임하신 성령의 일하심으로 인해 아름다운 갈라디아 교회를 세우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리석게도 이렇게 성령 하나님이 일하시는 은혜의 통로였던 믿음에서 떠나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겠다고 퇴보한 것입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신앙적인 퇴보를 보고받은 바울은 이렇게 강력하게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질타한 것입니다. 왜 이 교훈을 우리 세인 지체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까? 저는 오늘 갈라디아 교회의 일부 성도들을 향하여 왜 할례라는 율법으로 돌아가려 하느냐고 강하게 질타한 바울의 음성이 주후 1세기에 존재했던 갈라디아 지역에 살고 있었던 교회공동체에게만 쏟아 붓는 메시지로만 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 음성이 2,000년이라는 시간의 차이를 넘어 오늘 우리 세인공동체에 속해 있는 지체들을 향하여 역설하는 메시지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어디 이 뿐입니까? 갈라디아 지역이라는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대한민국의 제천이라는 로컬 처치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선포되는 레마로 오늘 본문의 가르침이 저에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이 기가 막힌 은혜를 근거로 저는 설교의 서두에서 언급한 “모든 구체적인 경험은 그 특정한 시간 속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다.”고 말한 가토 슈이치의 일설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법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일하심으로 해석할 때 얼마나 무색한 발언인가를 다시 한 번 각인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도 인정한다면 우리는 오늘 설교의 교훈을 이렇게 가슴에 담아내야 합니다. ※ 성령의 임하심과 일하심이라는 은혜가 시제를 초월하여 오늘도 믿음을 갖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연속성을 갖는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셨던 구원의 그 계획하심은 갈라디아 교회에서처럼 오늘 우리 세인교회에서도 연속됨을 명심하십시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구원의 그 성취하심은 갈라디아교회에서만이 아닌 오늘 우리 세인 교회의 삶의 현장에서도 여전히 연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은혜임을 상기하십시다. 성령님께서 과거에 갈라디아 교회에서 일하심으로 완성하셨던 구원의 그 완성은 오늘 현재에서 여전히 세인교회에서도 현재 진행형임을 되새기십시다. 이렇게 성 삼위 하나님의 일하심과 임하심은 과거에도 있었던 사건이며, 오늘도 있는 사건이며, 내일도 있을 사건임을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며,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은혜입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라는 평론집에서 이런 글을 하나 남겨놓았습니다. 히말라야 설산에 오른 작가가 이렇게 읊조립니다. “자신의 내면의 깊은 심연만이 아니라 그처럼 높은 설산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들을 사람들은 너무 오래 동안 잊고 지낸 것은 아닐까?”(p,346) 무슨 말입니까? 가장 본질적인 내용을 잊고 사는 현대인들에 대한 자탄의 메시지가 아닙니까? 이것이 어찌 작가 한 사람의 탄식이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오늘, 우리는 은혜를 일회적인 사건으로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한 번 주어졌던 은혜라고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그 은혜의 주어짐을 잊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은혜의 망각은 곧 본질의 망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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