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9년 2월 24일 사역2024-04-23 16:56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봄이 오면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십니까?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370장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  복음성가: 내 안에 사는 이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인 크라이스트 (in Christ)
● 본문 : 갈라디아서 2:15-21
1) 2:20절에 담긴 가장 중요한 바울의 신앙적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그러므로  

2) 시편 27편과 사무엘상 24장, 그리고 사무엘하 6장에 기록된 다윗의 신앙적 반응을 설교 주제와 맞물려 해석해 보자.
⓵ 시편 27편과 사무엘상 24장
⓶ 사무엘하 6장
⓷ 설교 주제와 관련하여 해석해 보자  

3) 적용하기
⓵ 신앙의 본질 회복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⓶ 조정민 목사의 why Jesus에 담긴 설파를 토의해 보자.
  참고: 돌고 돌아 그리스도론입니다.  

 
사역하기 (WORK)


중보하기

1) 주존감으로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다가서는 2월이 되도록
2) 환우들을 위하여 (김경옥 권사, 김병옥 권사. 김제원 집사 등)
3) 각 지역 셀의 번식과 부흥을 위하여
4) 피선교지를 위하여
5) 다니엘 세 이레 기도회 준비와 응답 받는 사역이 되도록
6)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하여



사역하기

1) 태신자 명단 매 시간마다 불러 기도하기
2) 다니엘 세 이레 기도회 숙지하고 미리 준비하기
3) 공 예배 참석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기
4) 다음 주부터 시작되는 사순절 (주일을 뺀 3월 6일-4월 20일) 동안 작정할 것을 계획하여 실천하고 기도하기
5) 셀 원들의 범사 파악하여 중보하기
  

 
설교요약 (SUMMARY)

본문: 갈라디아서 2:15-21
제목: 인 크라이스트(IN CHRIST)

主尊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GOD FIRST, OTHER SECOND, THIRD MYSELF”입니다.
이것이 주존심입니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의 민낯이 무엇입니까?
“I FIRST, OTHER SECOND, THIRD HIMSELF” 로 전락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교회가,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무시를 당하는 시대가 되었을까요?
본문을 통시적으로 해석할 때 얻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 본질 상실입니다.
본문 2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개인적으로 제가 너무나 사랑하고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바울은 베드로와 바나바와의 단두대 매치를 통하여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그들의 외식에 대하여 단호하게 정죄했습니다. 어떤 의미로 격(格)에 있어서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인지도가 교회 공동체에서 그리 높지 않았던 바울이었지만 그는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교회 중직들의 신앙인답지 않았던 부분에 대하여 서슬이 시퍼렇게 단죄했습니다. 바울은 어디에서 이런 담대함이 나왔을까요? 조금 전에 함께 읽었던 전율하게 하는 감동의 메시지 안에 그 답이 들어 있습니다. 두 대목을 복기하겠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대목을 합치며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바울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은 바울 안에 계셨다는 최고의 결론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풀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내가 있어 내 길을 내 의지대로 내가 선택해서 가다가, 은혜로 주님을 만나  내가 가는 그 길을 돌이켜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주님이 지시하시는 그래서 주님이 원하는 길로 가겠다고 결심하고 그 길을 걷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렇게 경천벽지 할 혁명이 나에게 일어난 동기가 무엇입니까? 내 안에 있던 나를 버리고 내 안에 주군이신 예수께서 좌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 맘대로 사는 삶을 포기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 주님이 내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사무엘상 24장을 보면 다윗이 엔게디 동굴에 숨어 있을 때 그를 살해하기 위해 찾아온 사울을 도리어 다윗이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습니다. 헌데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기름 부은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없다는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상황의 주변을 살펴보면 다윗의 입장은 정말로 처절했던 시기였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더 이상은 숨을 곳이 없을 만큼 촘촘히 다윗이 대적들이 득실대던 시기였기에 다윗에게는 암흑과도 같은 시기였다는 말입니다. 시편 27: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이 시가 바로 엔게디 동굴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살려준 바로 그 칠흑같이 어두웠던 시기를 회상하며 쓴 시입니다. 어떻게 다윗은 이렇게 태연하게 담대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 대답을 바로 앞 절인 시편 27:1절에서 찾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다윗이 자신을 소유격으로 고백한 것이 보이십니까? 다윗의 빛이 누구였습니까? 다윗의 구원이 누구였습니까?
다윗의 생명의 능력이 누구였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너무나도 당연히 그 분 안에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성도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형식입니까? 종교적인 행위입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성도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설명한 것은 목사의 우격다짐이 아닙니다. 엘리 제사장 시절 블레셋에게 빼앗긴 법궤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이방의 땅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좌시할 수 없어 여러 가지의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 지경으로 옮겨 제사장 반열에 있었던 아비나답의 집에 20년간을 보관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법궤에 대하여 사무엘도, 사울도 여타 다른 제사장들도 법궤가 있어야 할 성소인 예루살렘으로 옮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괘씸히 여기셨고 결국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의 마음을 들어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이거하도록 하셨음을 어제 새벽예배를 통해 나누었습니다. 사무엘하 6장에 기록된 아비나답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이거 사건은 단순히 법궤를 이거하는 문자적인 설명만을 요구하는 기사가 아님을 나누었습니다. 이 사건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방치했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다윗의 영적 행위를 통해 이제는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의 회귀를 선언하는 대단히 혁명적인 신앙의 행위임을 역설했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런 혁명적인 신앙의 행위를 간직할 수 있었느냐는 제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사울 왕과 관계를 설명한 바로 그 대목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주님의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다윗은 자기 스스로 철저하게 주님 안에 있는 자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금년도 우리 교회 표어에 맞는 주제 절을 사도행전 11:26절로 정했습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주존심이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단어를 헬라어로 ‘크리스티아노스’라고 표현한다고 했습니다. ‘크리스티아노스’를 영어 문장으로 번역하면 이렇게 쓴다고 했습니다. Those who are in Christ.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 이라고 번역합니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 정체성을 본문에서 바울은 정말로 주옥같은 표현으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본문 20절을 다시 읽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묻겠습니다. 무늬로 대답하지 마십시오. 형식으로 대답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주님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입니까? 그렇다면 증거를 대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백성이라면 증거를 대야 합니다. 어떤 것이 증거입니까? “GOD FIRST, OTHER SECOND, THIRD MYSELF”입니다. 제 일 순위가 하나님이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의 우선순위가 예수이십니까? 주님 안에 있는 자는 주님의 마음을 품습니다. 그래서 행하는 일체의 일과 범사를 주의 뜻으로 알고 행합니다. 내 것을 먼저 생각하는 자는 주님 안에 있는 자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자입니다. 주님 안에 사는 자는 주님의 생각을 갖고 있기에 언제나 주님 우선주의로 사는 자입니다. 내 밖에 방치되어 있었던 주님의 법궤를 내 안으로 옮기는 자입니다. 이 은혜로 사는 자는 그래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20-21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나는 세인 지체들이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세인지체들이 명목적 그리스도인으로 남는 갑각류 그리스도인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다윗처럼, 바울처럼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