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누군가를 의식해서 의도적으로 행동했던 것 중에 지금 생각을 해도 후회가 되는 것은? |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347장 – 허락하신 새 땅에 ● 복음성가: 모든 민족에게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탈락되지 마십시다. ● 본문 : 갈라디아서 2:11-14 1) 제 1차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있었던 바나바의 유감스러웠던 행동을 말해보자. 2)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바나바의 외식을 루스드라 사건과 관련하여 반면교사를 삼는다면? 3) 적용하기 ⓵ 사사시대의 미가 이야기와 오늘을 비교해 보자. (설교의 내용을 참고하라) ⓶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를 이야기 해 보자. ⓷ 나는 얼마나 영적으로 긴장하고 있는가? | 사역하기 (WORK)
중보하기
1) 주존감으로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다가서는 2월이 되도록 2) 환우들을 위하여 (김병옥 권사. 김제원 집사 등) 3) 각 지역 셀의 번식과 부흥을 위하여 4) 피선교지를 위하여 5) 다니엘 세 이레 기도회 준비와 응답 받는 사역이 되도록 6)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하여
사역하기
1) 태신자 명단 다음 주일 셀 리더 교육 시간까지 반드시 제출하기 2) 다니엘 세 이레 기도회 숙지하고 미리 준비하기 피선교지 전화하기 ⓵ 박상규 목사: 01084868662 ⓶ 문정웅 목사: 01030001742 ⓷ 최종선 목사: 01050660500 ⓸ 이미경 목사: 01057119684 ⓹ 유성숙 선교사: 01084849862 ⓺ 조경선 목사: 01099877571 ⓻ 이장호 목사: 02-777-1333 (바른교회아카데미) ⓼ 김바나바 선교사: 01034008724 ⓽ 김화숙 목사: 01043299191 | 설교요약 (SUMMARY)본문: 갈라디아서 2:11-14 제목: 탈락되지 마십시다.
본문 13절을 읽겠습니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베드로의 외식에 넘어간 자는 수리아 안디옥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유대적인 성향의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 했습니다. 헌데 누가는 한 명을 더 첨가해 놓고 있습니다. 바나바입니다. 바나바가 외식에 넘어갔다는 지적은 적어도 수리아 안디옥 교회 공동체의 입장으로 볼 때는 치욕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누구입니까? 수리아 안디옥교회의 수장이었습니다. 그는 수리아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자 예루살렘 신앙 공동체의 수뇌부가 이방 교회에 일어난 기이한 일들(교회를 세웠다는 것)을 조사하고 그곳에서 교회를 지도하라는 위임을 받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된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에 그렇게 파송되어 초대 담임목회자의 신분으로 사역했던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볼 때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교회 목회가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13년간 고향 다소에서 칩거하고 있는 사울을 데리고 오기 위해 아마누스 산맥을 넘는 위험을 무릅쓰고 넘어가 결국은 그를 데리고 와 사울을 동역자로 세웠던 정말로 괜찮은 하나님의 일군이었습니다. 이렇게 사역을 잘 감당하여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을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사역을 감당했던 수리아 안디옥교회의 결정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렇게 사역하던 수리아 안디옥교회 공동체의 신임을 받고 세계 선교의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는 제 1차 전도여행의 선교사로 바울과 함께 파송된 1차 선교여행의 팀장이 바나바였습니다. 이들은 루스드라로 사역합니다. 루스드라에서 길거리 전도사역을 하는 동안 나면서부터 앉은뱅이기 된 사람을 발견하고 그가 말씀을 잘 듣는 것을 본 바울은 담대하게 바로 일어서라고 선포하자 그가 일어나 걷는 기적을 현장에서 보게 됩니다. 무지한 루스드라 사람들은 신이 하늘에서 강림했다고 보고 바울을 허메(헤르메스) 그리고 바나바를 쓰스(제우스)라고 지칭하며 그들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이 일을 안 바나바와 바울은 강력하게 그 일을 저지하며 우리들은 너희들과 똑같은 사람임을 선포하고 바로 그 헛된 일에서 벗어날 것을 종용하기에 이릅니다. 제우스를 신을 섬기고 헤르메스 신을 섬기는 일들이 무익한 일이며 쓸데없는 일임을 선포하자 급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루스드라는 헬라 문화 지역에서 섬기던 최고의 신인 제우스와 그의 전령인 헤르메스를 섬기고 있었기에 그와 관련된 일로 먹고 사는 자들이 지천에 깔린 도시였습니다. 헌데 바울이 그들을 섬기는 일은 헛된 일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 선언은 곧 혁명과도 같은 위험한 발언이었고, 바울의 말을 듣는 것은 곧바로 루스드라 경제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헬라의 신을 섬기며 우상 산업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생계가 끊어지는 절박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직전 선교지역이었던 이고니온에서 내려온 바울의 적대자들은 루스드라의 유대인들과 지역민들을 충동질하여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이는 자들로 돌변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사도행전 14:19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바울을 신으로 섬기려던 자들이 자기들의 이익에 해가 되자 곧바로 그들은 바울을 죽이는 자들로 변질 된 것입니다. 그들이 던진 돌을 맞은 바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에 의하면 거의 죽게 되었음을 보고합니다. 읽어드린 사도행전 14:19절에 ‘죽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 ‘세네스코’는 ‘능동태 완료 시제’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루스드라 사람들이 던진 돌멩이에 맞아 바울이 ‘죽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누가가 증언했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14:20절을 소개합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제자들은 거의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의 시체를 거두기 위해서 장사를 준비하기 위해 바울의 시체 앞에 모였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1차 전도여행에 함께 동참했거나 아니면 루스드라의 회심한 자들이거나 둘 중의 하나인 제자들이 바울의 훼손된 육체 앞에 둘러섰습니다. 장사를 지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둘러섰다.’고 번역된 헬라어 ‘퀴를루오’ 는 장사를 지내기 위해 모여든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울의 시신처리를 위해 모여든 제자들 앞에서 바울이 보란 둣이 일어섰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살아난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바나바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루스드라에서 사역을 하던 선교사의 팀장이 누구입니까? 바나바입니다. 사도행전 13:2-3절에 기록된 안디옥 교회 파송 선교사의 팀장은 누구입니까? 바나바였습니다. 그래서 서열은 반드시 바나바와 바울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름이 앞에 기록된 자를 서열 우선으로 보는 것이 관례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의 선교 팀장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을 정도로 핍박을 받을 때 바나바는 돌멩이 하나를 맞지 않고 온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4장의 어느 한 구절도 바나바가 바울처럼 핍박을 받았다는 것을 증언해 주는 구절은 없습니다. 다만 죽다가 살아난 바울의 현장에 함께 있었던 바나바는 바울이 일어난 뒤에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더베로 옮겼던 것만 보고합니다. 바나바는 바울이 목숨을 걸고 루스드라 지방의 사람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언하는 바로 그 시간 전혀 영적인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방관하고 있었던 구경꾼에 불과했습니다. 이 사건을 기화로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똑똑했던 제자 누가는 이렇게 역사를 서술합니다. 제 1차 전도여행 이후의 사건인 제 1차 예루살렘 공의회에 파송된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상태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 15:2절을 주목하여 주십시오.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루스드라의 참패를 경험한 바나바는 드디어 역사의 서술에서 탈락됩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로 서술이 기록이 바뀌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위대했던 이름의 주인공 바나바는 사도행전 16장 이후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렇게 영적 순위 경쟁에서 밀려납니다. 하나님의 사역의 궤도에서 일인자가 아닌 2인자로 탈락됩니다. 본문 13절, 다시 한 번 음미하겠습니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 신앙의 경주에서 탈락되지 않으려면 영적으로 긴장해야 합니다. 사사기 17장으로 갑니다. 유다 베들레헴 출신의 한 청년 제사장이 고향에서 더 이상 살 수 있는 길이 없어서 타 지역인 에브라임으로 떠돌이가 되어 도착했습니다. 이 레위 출신의 청년이 그렇게 한 이유는 먹고 살 수 있는 길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삼손 이후 사사시대에 제사가 드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무너진 이스라엘에 제사는 별의미가 없었습니다. 기업이 없었던 레위 청년은 그래서 베들레헴을 떠나 에브라임으로 직장을 찾아 떠나온 것입니다. 헌데 마침 그 지역에 미가라는 전혀 신앙적이지 않은 사람이 어머니의 재산을 도적질하여 별로 사이가 안 좋아 금이 갔는데 미가의 어머니가 도적질해간 재산을 아들에게 돌려받은 뒤에, 아들과 화해한다는 구실로 아들을 위해 사설 단을 만들어줍니다. 미가는 동네에서 배회하는 낯선 청년을 만났는데 알아보니 제사장 지파 출신임을 알고 그를 사설 제사장으로 계약을 맺어 고용합니다. 일자리를 얻은 레위 청년은 숙식을 물론 월급까지 받아 생활고를 해결하는 기회가 되었고, 미가는 자기가 고용한 사설 제사장이 하나님께 복을 빌어주면 또 다른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고용 효과를 기대하며 서로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의 너무나 참담한 결과를 기록한 사사기 17:13절은 오늘 독자인 저에게 쓰디쓴 치욕을 안겨주는 듯한 영적 기상도를 알려줍니다.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너무나 그럴듯하게 보이는 미가와 제사장의 이야기가 왜 삼손 기사 이후에 실렸습니까? 답을 말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바로 이 시대는 영적으로 완전히 무너졌던 시대임을 고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영적인 긴장감이라고는 0.1도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시대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제사장들이 할 일을 잃어버린 제사가 무너진 시대, 그래서 먹고 살 길을 찾기 위해 제사를 포기한 시대, 하나님의 공동체를 하나님이 요구하는 바른 삶으로 인도해야 할 제사장이 본인의 본연의 사명을 망각하고 그냥 물질의 개가 되어 개인 사설 가정의 복 전달 전도사로 전락된 최악의 시대, 자기가 지금 하는 일이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인지 조차 모르는 미가의 무감각이 별로 죄로 여겨지지 않는 시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판을 치는 비극적, 영적 암흑의 시대, 이 시대가 바로 사사 시대의 후반기 막장 시대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2019년은 어떻습니까? 사사시대 플러스의 시대입니다. 사사시대보다 더 영적인 긴장감이 와해된 시대, 사사시대를 방불 하는 영적 무너짐의 시대, 강단에서 죄를 말하면 내가 좋아하는 기호를 건드린다고 냉소하는 시대, 십자가를 전하면 시대착오적인 단어는 쓰는 게 아니라고 훈수 드는 시대, 복음을 말하면 박물관이나 백과사전을 찾아보는 게 더 좋을 거라고 비아냥대는 시대, 주님의 피 흘리심을 묵상하라면, 주님의 치유하심이라는 것을 먼저 말하라고 압박하는 시대, 봉사와 헌신을 말하면 지금 이 정도로의 헌신과 봉사만으로도 난 신앙의 A⁺라고 항변하는 시대, 예배가 무너지지 않도록 긴장하라고 하면 한국교회만큼 예배가 많은 나라가 어디 있냐고 반색하며 예배를 무시하는 시대, 완전히 주님의 삶으로 돌아서라는 회개의 토로가 이어지면 ‘복을 선포하라고 복을’ 이라고 대놓고 대드는 시대가 지금입니다. 영적으로 한번 무너졌던 바나바, 그는 또 다시 무너지고 은혜의 자리를 이탈하여 하나님의 자리에서 탈락되는 것은 더 쉬웠습니다. 기억하십니다. 영적으로 긴장하지 않으면 두 번 무너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영적 긴장감이 무너지는 순간, 저와 여러분은 바나바처럼 처절한 역전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가야바의 뜰에서 처절한 패배를 이미 맛보았던 베드로는 순교를 앞두고 이렇게 동역자들에게 역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7절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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