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만약에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난 지금 어떤 내가 되었을까요? |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508장: 우리가 지금은 ● 복음성가: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흔들리지 말자 ● 본문 : 갈라디아서 2:6-10 1) 바울이 두 번째로 방문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행한 두 가지의 일은? 1) 사도행전 15:1-2절 참고 2) 본문 9절 참고 |
2) 바울이 예루살렘에 두 번째 올라가서 얻어낸 결과물을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 어떻게 선언했나? 3) 적용하기 1) 주제와 관련하여 2) 복음의 정체는 무엇인가 곱씹으면서 – 로마서 1:16-17절 참고 | 사역하기 (WORK) ● 주간 중보 제목
1) 주존감으로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다가서는 2월이 되도록 2) 청년, 학생회 수련회 및 교회학교 졸업예배를 위하여 3) 각 지역 셀의 번식과 부흥을 위하여 4) 피선교지를 위하여 5)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하여 6) 성도들의 사업 터가 승리하는 2월이 되도록
● 셀 사역하기
1) 학생회, 청년회 동계 수련회 지원하기 2) 2월 둘째 주부터 실시할 다니엘 세 이레 기도회에 최선을 다하여 셀 사역 감당하기 (부연 설명 참고) 3) 태신자 명단 작성하여 담임목사에게 2월 10일 주일까지 제출하기 4)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기
| 설교요약 (SUMMARY)본문: 갈라디아서 2:6-10 제목: 흔들리지 말자. 오늘 본문은 바울의 이 두 번째 방문에 관한 후속담을 소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본문 6절과 9절을 나누어서 봅니다.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6절)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9절) 6절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울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본인이 예루살렘에 방문한 이유는 유력한 자들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유력한 자가 누구일까? 아마도 9절에 언급한 자들일 것입니다. 베드로 그리고 야고보, 요한 등일 것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좌장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요즈음 말로 바꾸면 살아 있는 권력일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폈던 갈라디아서 1:17절을 근거로 되짚어보면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본문 9절에 있는 말씀 그대로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기둥같이 여기는 존재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본문 6절에서 무엇이라고 날이 선 발언을 했습니까? 그들은 ‘내게 상관이 없는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그들이 어떤 종교적인 권력과 물리력을 갖고 있기에 나에게 그 무언가를 요구한 적이 없음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쐐기를 박는 명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발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렇게 강성 발언을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요? 본문의 시대적 배경은 주후 49년 즈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때는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 적지 않은 위기가 임했던 시기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내려온 어떤 사람들이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에게 모세의 법으로 정해져 있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거짓 복음으로 유린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5:1절을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그런데 이 일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있어서는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불과 몇 년 전에 바울과 바나바는 이 해괴한 일을 갈라디아 교회에서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교회를 무너뜨렸던 이 기막힌 거짓복음의 위력이 다시 불과 몇 년 만에 수리아 안디옥으로 확산된 충격으로 인해서 말입니다. 복음주의권의 학자들은 갈라디아 교회가 세워진 제 1차 전도여행의 시기를 주후 48-49년 즈음으로 산정합니다. 더불어 갈라디아서의 기록 연대는 그 후 한 참 뒤인 주후 53-55년 사이로 갈무리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이 두 사건을 다 경험한 이후였기에 아주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 두 사건에 대처했던 본인의 간증을 본 서인 갈라디아서에서 단호하게 기록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충분한 짐작을 하게 합니다. 다시 본문에 집중해 보십시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자신의 사도의 권리를 인정해 달라고 예루살렘 교회의 기득권과 종교적인 권력을 이미 확보한 사도들에게 굽신 거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지난 주일에 2절에서 살폈던 것처럼 복음을 희석시킨 자들에 관한 도의적인 책임을 갖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 수뇌부에게 서슬이 시퍼런 비수를 날렸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복음으로의 회귀였고, 다시 복음이었습니다. 이렇게 분명한 방문 목적을 밝힌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것은 역할 분담이었습니다. 본문 7-8절을 나누겠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기막힌 선명함입니다. 역할을 분명히 하셨던 하나님을 증언합니다. 바울의 역할은 무할례자들을 위한 사도 즉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의 직이었고, 베드로의 역할은 할례자들을 위한 사도 즉 유대인들을 위해 세운 사도라는 정리였습니다. 왜 이렇게 분명한 선을 바울은 그었을까요?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거짓 복음에 넘어간 한심한 자들을 향하여 본인의 사도됨의 정당성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 마지막 부분인 9-10절을 읽습니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이 구절에서는 왠지 모를 서늘함까지 느껴집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붕괴하고 있는 몇 몇 거짓 교사들을 알고 있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들도 역할 분담의 사도직을 인정하며 친교의 악수를 나누었고, 이방인들로 대변되는 바울의 사역 영역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 줄 것을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부탁을 할 정도로 사도직에 대한 진정성이 있는 인정을 해 주었건만 갈라디아 교회의 한심한 너희들이 해묵은 사도직을 갖고 논하는 거짓 교사들의 말에 넘어가 영적인 무너짐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매서운 질타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무너짐에 대하여 대단히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것도 거짓된 복음으로 무너지는 교회를 바라보면서 가슴을 쳤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교회의 리더십마저도 흔들고 있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소위가 괘씸했습니다. 해서 바울은 교회의 위기를 바로 잡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거짓교사들의 권위의 근원이었던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인정한 사도권을 다시 제창함으로서 갈라디아교회를 추스르려고 본문에서 예루살렘 방문기에 대한 추억을 밝힌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우리들이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 해석을 전제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와해되고 있고 또 와해 될 수 있는 교회였던 갈라디아 교회, 그 교회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른 복음을 무장한 사람들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디도 그리고 본문에는 이름이 빠져 있는 수많은 익명의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지체들 말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 흔들리지 않는 복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교회가 흔들리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교회가 왜 흔들리고 있습니까? 사회가, 세속적인 문화가, 이질적이고 이단적인 사이비 종교들이 창궐하여 교회가 흔들리고 있습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이 창궐하고 우후죽순 자라나고 있습니까? 왜 세속적인 힘들이 교회를 유린하고 있습니까? 단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지만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져봅니다. 왜 교회가 교회답지 못합니까? 목사가 타락해서 그리고 변질되어서 입니까? 장로, 권사, 안수집사가 직답지 못한 삶을 살아서 입니까?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는 곳에 예수쟁이들이 언제나 있어서 입니까? 부분적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외연을 확장해 보십시다. 저는 이렇게 진단하고 싶습니다. 복음의 상실이라고. 이 말은 목사 불리할 때 자주 등장시키는 결코 상투적인 멘트가 아닙니다. 조금 더 강하게 전합니다. 누가 복음을 상실합니까?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 복음의 능력을 상실했든지, 둘, 아니면 아예 복음을 안 믿었든지 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강력하게 질타한 것이 무엇입니까? 왜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 받지 않아야 하는지 헷갈려 하느냐는 질타였습니까? 왜 내 사도직에 대하여 의심하느냐는 기분 나쁜 감정의 표출이었습니까? 그건 일차원적인 접근이요 대답입니다. 바울이 직격탄을 날린 것은 이것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유일한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흔들렸느냐는 질타였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내가 타고 있는 차가 어떤 차인지를 분석하고 그 차가 고장이 나면 어디를 수리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능력이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은 내가타고 있는 차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갈라디아서 11번째 강해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한 달여 즈음에 서울에서 친한 친구 목사들이 모였습니다. 교제를 하는 중에 제가 참 좋아하는 친구 목사가 이렇게 진지하게 화두를 꺼냈습니다. “내 목표는 은퇴 이후에 더 예수를 잘 믿는 거야. 목사직에서 물러나서 더 예수를 잘 믿는 것이 근래 내가 연습하고 훈련하는 거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정말로 가슴에 담아야 할 이야기를 친구 목사가 해 주어 너무 고마웠습니다. 복음의 사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 더 엄하게 선포합니다. 흔들릴 수 없습니다. 바울은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충분히 무너질 수 있는 위기의 상황이었지만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는 복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해서 그는 로마서 1:16-17절에서 이렇게 천명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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