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461장: 십자가를 질 수 있나 ● 복음성가: 이 땅의 동과 서 남과 북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역전하십시다. ● 본문 : 갈라디아서 2:1-5 1) 바울이 행한 세 번에 걸친 예루살렘 방문에 대해 말해보고, 본문 이해를 적용해 보자. 1) 첫 번째 방문 2) 두 번째 방문 3) 세 번째 방문 4) 본문과의 연관성 |
2)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하며 계획했던 것은? 더불어 이 내용이 영적 감동이었던 이유는? ⓵ 본문 2:2절과 관련하여 ⓶ 찾아낸 감동은? |
3) 적용하기 ⓵ 예루살렘 유대 교회공동체와 수리아 안디옥 이방 교회공동체에 나타난 역전 현상을 오늘의 신앙적 차원으로 승화시켜 해석해 보자. ⓶ 신앙의 역전승을 거두려면 교회와 성도에게 어떤 자세가 필요한가? - 주제와 관련하여 설명하자. | 사역하기 (WORK) ● 주간 중보 제목
1) 세인 공동체의 지체들이 주존감으로 무장할 수 있도록 2) 2월의 목양 승리를 위하여 3) 환우들을 위한 중보 4) 사업체 심방이 은혜롭게 진행되도록 5) 적절한 일군을 보내 주소서, 6) 지역 셀이 승리하도록 7) 청년학생 동계 수련회를 위하여
● 셀 사역하기
1) 피선교지 목회자에게 전화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안부하고 문안하기. 2) 2월 둘째 주부터 실시할 다니엘 세 이레 기도회에 최선을 다하여 셀 사역 감당하기 (부연 설명 참고) 3) 태신자 명단 작성하여 담임목사에게 2월 10일 주일까지 제출하기 4)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기
| 설교요약 (SUMMARY)설교 요약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가 온 본인의 경험담을 갈라디아 교회의 배교자들과 복음을 훼손시키는 자들에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읽겠습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2장 전체에 대한 이해뿐만이 아니라 갈라디아서 전체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바울이 언급한 14년이라는 시간은 과연 언제일까? 교우들에게 14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의 주석을 실시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다루어야 하는 것은 바울의 회심 연도입니다. 고린도후서 11:32-33절을 읽어드립니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두 번째 행한 편지에서 밝힌 이 성서적 내증은 바울의 회심 연도를 가늠하게 해 주는 좋은 자료입니다. 이 구절은 사도행전 9:23-25절과 연관되는 구절입니다. 사도행전 9:23-25절을 봅니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내리니라” 나바티아 왕국의 왕이었던 아레다 4세가 재위한 시기가 BC 9- AD 39년으로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을 전제할 때 바울의 회심은 그가 회심한 이후에 다메섹으로 갔다는 것을 전제할 때 적어도 주후 39년 훨씬 이전 사건으로 추론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런 연대기를 설정한 학자들은 바울의 회심 시기를 약 주후 33년 즈음으로 보는데 저도 이 의견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바울이 회심 이후 약 3년을 아라비아로 내려가 자신을 추슬렀습니다. 그리고 난 이후 바울이 첫 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복음을 증언했다면 그 시기는 어림잡아 주후 36년 즈음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숙의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에 대한 해석입니다. 바울은 적어도 세 번에 걸쳐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성경은 내증으로 보고합니다. ⓵ 제 1차 방문은 지난 주일에 교우들에게 설명한 회심 이후 아라비아에서 3년을 칩거한 뒤의 방문입니다. 이 방문은 참으로 녹록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예수 핍박자였던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증언하는 것이 미덥지 않았던 예루살렘 교회의 거부감 때문이었습니다. 해서 바울을 독려하던 바나바는 그를 수리아와 길리기아를 경유하게한 뒤에 다소로 보냈다고 지난주에 우리는 살폈습니다. 앞에서 저는 예루살렘을 바울이 회심한 이후 방문한 시기를 주후 36년 즈음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여기에서 또 하나 우리들이 주목해야 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교회사의 두 번째 위기라고 말하는 예루살렘 제 1차 종교 공의회의 시기입니다. 학자들은 할례에 대한 끝장 토론의 회의였고, 이방 교회인 수리아 안디옥 교회와 유대인들을 위한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와의 담판 승부를 벌였던 이 회의 연도를 주후 49-50년 즈음을 설정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14년 뒤에 올라간 제 2차 예루살렘 방문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⓶ 제2차 방문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AD 49-50년에 진행된 예루살렘 제 1차 공의회 때 찾아간 방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방문은 우리들이 잘 아는 할례 논쟁을 불식하기 위한 최종 담판을 위한 방문이었습니다. 적어도 바울과 바나바가 두 번째 방문한 예루살렘 총회의 방문은 다음을 전제합니다. 바나바가 13년이라는 세월동안 다소에서 칩거하며 자신의 모남을 다듬고 동시에 자신의 혈기를 다시 한 번 예수의 은혜로 누그러뜨리며 자신을 쳐서 복종하던 훈련의 시기를 마치고 수리아 안디옥에서 바나바와 함께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난 뒤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그렇게 사역을 1년여 감당하고 났는데 유감스럽게 안디옥 교회는 매우 심대한 위기를 맞이합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에 기인되어 있었던 율법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안디옥에 침투하여 퍼뜨린 할례 논쟁으로 인한 위기였습니다. 대다수가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으로 이루어져 있는 수리아 안디옥교회에 대하여 암묵적으로 방관하던 예루살렘 교회의 소위를 도저히 그대로 묵과할 수 없었던 안디옥교회 공동체는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디도를 중심으로 한 할례 논쟁에 대한 끝장 토론을 할 대표단을 파견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을 존 스토트를 비롯한 학자들은 바울의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이라고 해석합니다. ⓷ 세 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사도행전 21장에 기록된 순교 여행으로의 방문입니다. 로마로 가기 위해 위한 경유지로 방문했던 예루살렘 방문은 바울이 자기의 사명을 마치기 위한 장렬한 드라마와 같은 방문이었습니다. 대체로 네로의 박해 시기인 주후 64-65년경에 바울이 순교를 당했다고 학계에서는 보고하는 데 바울이 로마로 가기 전 팔레스타인의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 관저에서 약 3년 간 구금되어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바울의 세 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주후 60년 경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너무 세밀하게 해석을 해서 교우들에게 어려움을 준 것 같은 미안함이 있지만 그래도 질을 높이기 위해 드린 목사의 고육지책이었음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며 이상,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주석을 전제로 오늘 우리들이 주목하여 살필 내용은 두 번째 방문입니다. 이상,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주석을 전제로 오늘 우리들이 살펴야 할 내용은 두 번째 방문입니다. 바울이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 이후 14년 만에 또 다시 방문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은 1차 방문 때처럼 외로운 방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나바와 디도라는 동역자가 함께 이 동선에 참여했음으로 1절에서 알립니다. 동시에 바울은 이 두 번째의 방문 목적으로 본문 2절에서 적시합니다.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저는 이 구절을 만나면서 적지 않은 전율을 느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두 번째로 예루살렘에 방문한 동기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계시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또 하나 사사로운 방문이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것을 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의 수신자들에게 강조했을까요? 방문의 권위를 분명히 피력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다시 가장 나이브하게 표현하겠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다시 두 번째로 올라간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소회 때문도 아니요 가벼운 여행도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성령의 역동하심, 그리고 주님이 계시로 그렇게 이끄셨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로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방 가운데에서 전하는 복음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간 달음질이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을 믿고 올라갔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저는 전율함의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을 위하여 제시한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명제입니다. 그 분이 나를 위하여 오셨고, 나를 위해 고난 받으셨고,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나를 다시 살아나셨고, 나를 위해 승천하셨고, 나를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는 명제였습니다. 이렇게 나를 위해 구속의 캐리그마를 쓰신 주님을 믿으면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된다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대단히 놀라운 것이 무엇입니까? 이 엄청난 능력의 복음을 예루살렘에 올라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예루살렘 교회공동체의 지체들에게 제시하고 전하기 위하여 올라간 것이라고 피력한 것입니다. 왜 이 복음이 그들에게 제시되어야 했습니까?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캐리그마에 관한 복음에 대하여 미온적이었습니다. 부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에게는 복음 이외에 할례를 비롯한 율법적인 조항을 덧 붙여 복음의 내용을 희석화(稀釋化)시켰습니다. 복음 가지고는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율법 준수가 구원의 조건임을 그래서 그들은 종용하였고 그것을 자기들만의 옥죄는 올무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할례에 치명적으로 약한 이방인 형제들에게까지 요구함으로 복음을 거짓 복음으로 둔갑시켜 치명상을 입히기에 이른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변질에 대하여 더 이상은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목을 건 행보와도 같은 여행길을 떠난 것입니다. 이런 담대함을 예루살렘 교회공동체의 수장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당시 헬라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이었던 디도 형제를 그 여행길에 동행하게 한 것입니다. 왜?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적인 형제인데 우리 공동체는 이 형제를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 역시 할례를 가지고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복음을 변질시키지 작태를 중단하라는 무언의 시위인 셈이었습니다. 본문 3-5절을 봅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역전승하십시다.’ 라고 정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외에 어떤 그리스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만으로 우리는 족합니다. 예수만이 나의 전부되십니다. 나를 위해 골고다에서 선혈이 낭자한 피를 흘리신 예수께서 나의 주군이십니다. 나는 예수의 사람이고 여러분도 예수의 사람이 되십시오.” 누가 전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공동체가 전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루살렘 신앙 공동체는 할례를 비롯한 율법 준수라는 비 복음적인 팩트를 가지고 장난쳤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가 아니라 유대 율법적인 기득권이요, 물리적인 힘이 중요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이방 교회 공동체를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가 교회 아닌 단체로 전락되었다는 말입니다. 주군께서는 이 기막힐 노릇을 그대로 좌시하실 수 없었습니다. 해서 이방 교회 공동체의 주체인 수리아 안디옥의 일군이었던 바울과 바나바와 디도를 도구로 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의 진원지였던 종교적인 기회주의자들과 유대 율법적인 모리배들에게 복음의 철퇴를 내리도록 바울의 일행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너무나도 당당하게 복음의 능력으로 상황을 역전시킨 바울의 고백이 저를 전율하게 합니다.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나는 우리 교회 안에서 복음이 상실되어 세상들에게 능력을 빼앗기는 비참한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반대로 나는 지금 세상에 빼앗겨 버린 능력을 복음의 능력을 세인교회가 재생시킴으로 도리어 역전승의 쾌거를 이르는 교회가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역전승을 하는 교회와 성도는 그래서 이렇게 결론을 맺을 수 있습니다. ※ 복음의 능력이 압도하는 교회와 성도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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