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

제목[수요 예배] 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2024-03-08 17:15
작성자 Level 10

2022년 3월 2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쉰 네 번째 강해)

 

본문창세기 14:13-16

제목언제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서론)

 

1988년 12월에 부산 모 교회 전담전도사로 부임했습니다.

1989년 11월에 밀양에 있는 대곡교회 담임 목회자로 부임하기까지 11개월을 사역했습니다.

부교역자로 사역한 11개월을 뒤돌아보면 직책은 전담 전도사였지만 실상은 담임목사의 방어막이 역할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섬기던 교회는 40대 중반의 젊은 담임목사가 사역을 감당하던 부산에서는 탑 5위 안에 들어가는 교세의 교회였기에 그런 대로 성결교단에서는 위상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문제는 교회 재정을 놓고 당회와 안수집사회가 치열하게 반목하고 갈등하는 교회였다는 점입니다.

결국 이 갈등은 담임목사에게로 불똥이 튀었고자기들끼리 반목하고 치열하게 싸우던 일이 담임목사가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함으로 일단락되는 불완전한 봉합으로 결론이 맺어졌습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제가 사역하던 기간담임목사께서는 정말 힘든 목회 여정을 이어가는 상황이었고그로 인하여 매우 곤고한 영적 상태였습니다.

부교역자로 사역을 해야 하는 저로서는 교회 분란이 이중의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담임목사를 보좌해야하는 제일의 순위에 집중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당회와 안수집사들의 전혀 신앙적이지 않은 행태들을 응원해 달라는 양쪽의 요구에 시달려야 하는 겹겹의 고통에 살면서 하루하루가 마치 지옥에 거하는 것과 같은 부교역자 11개월의 사역을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중하려 했던 것은 담임목사의 사역 동선과 영적 상태였습니다.

담임목사의 일주일 사역 동선을 미리 파악해서 아침 조회 예배 시간에 스케줄 분배 및 사역 조정까지 일일이 체크하여 가장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목회의 틀을 진행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해서 담임목사께 보고했습니다.

가능하면 알력이 심한 당회와 안수집사회와의 만남과 회의는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사역 말고는 목회 지침에 넣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심방 일정도 정말로 필요한 심방 말고는 부교역자들 선에서 감당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설교 사역도 담임목사께서 지도하는 내용을 기초로 하여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담임목사 사역을 지지하는 결론으로 준비했습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새벽 불시 호출이 있을지 모르는 가능성이 보이는 날은 양말도 제대로 벗지 못하고 넥타이를 제대로 풀지 못하고 자는 날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렇게 11개월 동안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하여 지원했습니다.

11개월 즈음이 되는 어느 날담임목사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한두 달 뒤에 교회를 사임하게 될 것 같다고 말씀해주시면서 제게 단독 목회 자리를 만들어놨으니까 교회를 사임하고 단독 목회 사역을 마치라고 권해주셨습니다.

당신이 교회를 사임할 예정이니 먼저 자리를 만들기까지 하면서 제 사역의 길을 열어주신 목사님은 그 이후로도 제 목회 사역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차제에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당시 환경은 최악이었지만 담임목사님의 사역을 보필하면서 준비했던 일체의 사역이 제 목회의 방향성이 되었고목양의 자세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특별한 경우가 있기는 해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100% 정답이라고 선언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팩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사용하신다는 점입니다.

사도행전 9:13-15절을 읽겠습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이 구절은 다메섹으로 올라가던 사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눈이 먼 상태로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그 사울을 찾아 안수하여 그의 눈을 뜨게 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은 아나니아가 사울에 대하여 좋지 않은 소문이 있어 두렵다고 하나님께 직언한 구절을 포함합니다.

아나니아의 두려움을 들었던 주님께서 알려주신 내용이 선명하게 담겨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15)

바울이 이방인들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은 장본인이 된 것은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음을 이 구절이 알게 해줍니다.

준비되어 있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준비되었다는 말을 하면 거부감이 들기도 하는데 실상이 그렇습니다.

빌립보서 3:5-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이 할례를 받은 자라는 보고베냐민 지파이자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는 보고동시에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내용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런 율법적인 하드웨어를 갖고 있었던 자가 바울이었기에 하나님은 그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준비된 자입니다.

 

본론)

 

롯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에게 인질이 되어 끌려갔습니다.

더불어 롯은 소돔에 쌓아 놓았던 모든 재물과 재산까지 약탈을 당했습니다.

이 소식을 소돔에 살고 있었던 자 중에 한 명이 극적으로 탈출하여 헤브론에 살고 있는 아브람에게 와서 알려줍니다.

본문 13절을 보겠습니다.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이브리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본문에 히브리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합니다.

이제부터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에 살던 사람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으로 명명됩니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용어로 창세기 기자가 본문에서 사용한 이유는 창세기 10:21절에 대한 반복적인 학습 효과를 거두기 위함인 듯합니다.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셈의 조상이 에벨이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을 강해했을 때 전했던 이희학 교수의 해석을 다시 한 번 복기하겠습니다.

에벨이라는 이름을 직역하면 걸어가는 사람으로 히브리어 이브라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이 단어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고유한 명칭으로 사용되었다셈의 후손에게서 이스라엘이 탄생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희학위의 책, p,276)

결국 이브리(히브리)’라는 단어의 원류가 에벨에서 나왔고 에벨이 바로 셈의 후손이라는 말은 히브리 사람들이 셈의 후손이라는 적용을 가능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아브람의 정체성을 본문 기자가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속사의 도구가 아브람임을 본문에서 처음 밝힌 셈입니다.

히브리 사람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했다는 본문 기사는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이방까지 구원의 사역의 도구로 삼았다는 대단히 강력한 메타포를 형성해 주는 본문이라고 해석해도 될 것 같습니다,

주목할 것은 조카 롯이 인질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아브람의 반응입니다.

14-16절 본문을 살피겠습니다.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기르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이 구절의 의미는 단촐 한 것 같지만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시사하는 본문입니다.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해 데리고 간 군사의 수가 318명이라고 했습니다.

318명이라는 숫자가 엘람이라는 도시 국가 공동체의 군사들과 싸워 이겼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를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318명에 대한 해석을 조금 깊게 접근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대목입니다.

“318명의 군대는 상당히 큰 규모다이 정도 규모는 기드온이 미디안 족을 정복했다는 이야기에서 보듯이 위력적인 군사 규모가 될 수 있다.” ( (하경택,“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2”,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p,31.)

아브람은 318명을 급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집에서 기르고 훈련 된 자라는 말이 이것을 대변해 줍니다.

훈련 된 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하니크는 군사적으로 동맹을 맺는 자를 의미하는 정예 군사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롯 구출 작전에서 좋은 전과(戰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람과 그의 군사들의 활동 반경은 결코 좁지 않았습니다.

까지 추적했다고 했는데 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의 최북단을 의미하는 지역입니다.

동시에 아브람의 군사들이 엘람과 전투했던 방법이 야간 기습 공격이었음을 밝힙니다.

더불어 세 파트로 나누어서 분산 공격을 했다고도 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된 사람들과 함께 감당했던 조카 구출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보고함으로 이 전쟁이 해피엔딩으로 마쳐졌음을 창세기 기자는 피력합니다.

해피엔딩의 결과물이 무엇이었습니까?

16절입니다.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이상 본문 해석을 마쳤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제게 강하게 임했던 교훈이 있었습니다.

아브람의 삶의 태도였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헤브론에서의 삶을 열어갔다고 했습니다.

롯이 떠난 뒤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그 따뜻한 동행하심을 경험하는 은혜 받은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아브람은 하나님이라는 최고의 백그라운드가 생겼습니다.

이럴 경우자칫 잘못하면 흐트러질 수 있는 나태함에 머무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하나님이 다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방만함으로 영적 긴장을 놓을 수 있는 위험한 시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 정황에 의하면 아브람은 그 반대였습니다.

더 철저하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농경 근본의 사회였던 아브람의 시대에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고 철저하게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자신의 삶의 정황들을 방비하는 삶을 구축하는 것에 아브람은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이 준비하는 삶은 자신의 안위는 물론 결과적으로 결국 조카 롯을 구하는 데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 도구가 되었고수훈갑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레마를 받겠습니다.

 

※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준비에 최선을 다하는 자입니다.

 

느헤미야 강해를 할 때 제게 가장 강력한 은혜와 교훈으로 다가온 텍스트가 있습니다.

느헤미야 4장입니다.

느헤미야 4장은 위기에 봉착한 느헤미야가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하고 영적인 개혁을 이루는가를 보여주는 값진 자료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루살렘 성에 돌아온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성벽을 재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이었습니다.

이 성벽을 재건하는 사역은 무너진 이스라엘의 신앙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영적인 개혁 운동이었기에 대단히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3장까지를 보면 느헤미야의 탁월한 리더십에 힘입어 성벽 재건 사역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음을 보고합니다.

문제는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주목해야 하는 구절이 4:1-3절입니다.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제사를 드리려는가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원래부터 느헤미야가 올라와서 성벽을 재건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던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가 예루살렘 성에 세워져 가는 성벽을 보면서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않고 방해합니다.

분노하고비웃고업신여기며 방해하며 조롱합니다.

4:8절은 말뿐이 아니라 실력 저지를 강행했음을 소개합니다.

다 함께 꾀하기를 예루살렘으로 가서 치고 그 곳을 요란하게 하자 하기로

영적인 방해 책동에 의해 성벽을 재건하던 유다의 백성들은 심각한 타격을 입습니다.

4:10절은 유다 공동체가 심리적으로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음을 알려줍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의기소침하고 낙심하여 나자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낙심한 유다 백성들을 위기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느헤미야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먼저는 크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느 4:4-6)

그런 뒤에 느헤미야의 위대한 사역이 느헤미야 4장에만 무려 6절에 걸쳐 보고되고 있습니다.

주목해야 할 구절들입니다.

9절입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들로 말미암아 파수꾼을 두어 주야로 방비하는데

13절입니다.

내가 성벽 뒤의 낮고 넓은 곳에 백성이 그들의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하고

16절입니다.

그 때로부터 내 수하 사람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17-18절입니다.

성을 건축하는 자와 짐을 나르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건축하는 자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마지막으로 22-23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내가 또 백성에게 말하기를 사람마다 그 종자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잘지니 밤에는 우리를 위하여 파수하겠고 낮에는 일하리라 하고 나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따라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다 우리의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각각 병기를 잡았느니라

느헤미야는 대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성벽을 재건하는 수고만 하지 않았습니다.

대적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군사적 방비도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않았음을 역사가가 보고합니다.

느헤미야를 볼 때마다 느끼는 감동이 있습니다.

그는 영적인 전방과 후방 전투에 언제나 준비되어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감동입니다.

성벽을 재건하면서 영적 전방을 지킨 느헤미야는 절대로 기도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적들의 방해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키우고 방비하는데 소홀하지 않는 후방 싸움에도 전력했습니다.

이런 능력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능력이 결코 아닙니다.

이런 능력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준비해야 하는 수고를 동반합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자들에게 승리를 주시지 않습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아브람이 롯을 구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고 철저하게 영육의 준비를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를 쓰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사용할 재목을 사용하십니다.

그 제목의 판단 근거는 준비되어 있느냐 입니다.

하나님은 랜덤의 인생을 사는 자들을 결코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쓰고 싶어 하시는 준비된 그릇들입니까?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