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3:14-18
제목: 떠난 후에
신앙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은 고독하기를 작정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입교한 것은 누구나 가는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철회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세속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길에서 벗어나겠다는 선언입니다.
누가복음 9:61-62절은 위에 열거한 선언을 지지하는 주님의 격려 메시지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 사람의 판단 미스는 주님을 따르겠다는 제자 됨의 길과 가족들을 돌보겠다는 세속적인 길을 함께 병행하겠다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보편적이고 평범한 종교적 삶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결정적인 오류는 제자도의 길과 세속적 가치의 길을 동시에 가겠다는 욕심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신앙은 선택적 결단의 행위를 요구할 때 하나님의 나라와 가치를 여지없이 선택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 모두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는 텍스트입니다.
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벧엘과 아이 중간에서 거주하던 큰아버지와 조카 사이에 불편한 일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돌보아야 하는 가축과 식솔들이 늘어나자 그것들의 욕구를 충족할 자원들이 부족한 땅에 살다보니 이기적인 충돌들이 일어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조카에게 여기서 서로 충돌하지 말고 서로 이제는 살 길을 찾아 아쉽지만 헤어지자는 권유를 합니다.
전제조건은 땅을 차지할 우선권을 조카에게 먼저 넘기겠다는 통 큰 양보였습니다.
이미 살폈듯이 조카 롯은 신앙적인 선택이 아닌 극히 세속적인 이익을 줄 것으로 기대되는 요단 동편의 소돔을 선택하고 그곳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후입니다.
롯이 소돔을 향해 떠났습니다.
본문 18절을 보면 롯이 떠난 후에 아브람이 남아 있는 땅으로 선택한 지역이 헤브론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헤브론은 훗날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도시로 발전되지만, 아브람이 정착할 수밖에 없었던 고대 시대에는 헤브론은 해발 912m에 위치해 있는 곳이었기에 소돔에 비해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아브람이 차지해야 할 땅인 헤브론이 사람이 살기에는 그리 녹록하지 않은 척박한 땅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롯이 떠난 후에 아브라함에 오셔서 이렇게 위로를 하십니다.
본문 14-1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셨던 말씀을 집약하겠습니다.
① 눈을 들어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②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줄 것이다.
③ 네 자손을 땅의 티끌처럼 많게 하리라
④ 네가 다니는 그 땅을 줄 것이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다시 상기되는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창세기 12:2-3절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고대 세계에서 땅의 소유와 자손의 번창은 최고의 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었던 아브람에게 오셔서 약속하셨던 이 약속을 재삼 본문에서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약속을 다시 들은 아브람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본문 18절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지시하심에 따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헤브론으로 이동하여 장막을 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예배하였음을 창세기 기자가 보고합니다.
세속적인 풍요의 땅으로 롯이 떠난 후에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땅 밟기를 하라고 명령하신 지역이었던 헤브론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제일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이 보고를 통해 중요한 교훈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 롯과 결별해야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본문 14절을 개역개정 판으로 다시 읽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이 번역에서 빠진 히브리어 단어가 있습니다.
‘나’ (נא)라는 소사(小辭)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실 때 매우 부드럽고 따뜻하게 다가오신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please'라고 번역하는 ‘나’라는 소사를 사용하신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주석-창세기”, p,276.)
송 교수의 주석대로 번역하자면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맞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뒤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오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브람아 제발 부탁이다. 눈을 들어서 동서남북을 보거라”
무슨 의미일까요?
14절 하반절은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보되어 있는 부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부터 아브람을 적극적으로 인도하시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부터입니다.
롯과 결별한 이후부터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에게 적극적으로 강복하시지 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왜 적극적으로 나를 위해 일하시지 못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롯이라는 방어벽이 하나님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롯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이라는 나의 믿음의 대상 말고 내가 붙들고 있는 일체의 것들입니다.
떠다니는 구름 잡는 것과 같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이것만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돕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 일체의 물질명사들입니다.
지난 주일예배 시간에 성경적 내증으로 교우들에게 말씀드린 예레미야 본문을 다시 한 번 인용하겠습니다.
예레미야 44:16-17절입니다.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반드시 실행하여 우리가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그 때에는 우리가 먹을 것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니”
예레미야는 애굽으로 내려가면 죽게 될 것이라는 엄중한 주의 신탁을 요하난과 여사냐 일행에게 고지했습니다.
그러자 이미 마음에 애굽으로 내려가겠다고 마음먹은 요하난 일행이 이제는 예레미야에게 반 협박식으로 선포합니다.
우리는 이제 예레미야 당신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듣지 않겠다고 강변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강짜를 부린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여왕’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강한 거부 속에 그들이 갖고 있었던 관념의 참담함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선조들이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이미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했던 것처럼 우리는 애굽으로 내려가서 그 분께 계속해서 분향과 전제를 드릴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이런 선언 뒤에 담겨 있는 신앙적 오판이 두려울 정도로 다가옵니다.
하늘의 여왕은 우리에게 먹을 것을 풍부하게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늘의 여왕은 우리에게 복을 주고 재난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늘의 여왕은 주전 6세기 애굽을 비롯하여 팔레스타인 전역에 퍼져 있었던 태양 신 ‘라’를 상징합니다.
요하난과 여사냐 일행은 이 강력한 롯에 붙들려 있었기에 예레미야의 경고를 종잇장 찢듯이 가볍게 여기는 방종을 저지른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15년이라는 생명을 연장 받은 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앗수르의 침입 시에도 극적으로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을 보았던 증인이었습니다.
문제는 위기를 극복할수록 본인이 대단한 존재라고 착각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안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에게 사절단을 보냅니다.
이런 일을 한 이유는 브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의 치유를 빈다는 명목이었지만 그 뒤에는 유다에 대한 정탐의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했던 히스기야는 사절단 일행에게 자신의 건재함과 막강한 부유함을 자랑하고 싶어 자신이 갖고 있었던 궁정에 보관한 일체의 것들을 보여줍니다.
이사야 39:2절입니다.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
이사야는 이런 신중하지 못한 히스기야의 행위에 대하여 왕이 보여준 일체의 보물들과 기기들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더불어 나라가 멸망하여 히스기야의 후손들 중에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는 치욕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사야의 이런 예언은 주전 587년과 586년에 정확하게 실현됩니다.
히스기야에게 롯은 그가 지니고 있었던 세속적 가치 전부였습니다.
롯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한,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일하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롯은 과연 무엇입니까?
고 하용조 목사의 글에서 이 문장을 보았습니다.
“롯은 아브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롯과 아브람이 끊임없이 싸웁니다. 하루는 롯처럼 생각하고 하루는 아브람처럼 생각하곤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아나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롯과 결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이고 인간적이고 물질적인 그 행복을 눈감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용조,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 두란노,p,80.)
본문은 말합니다.
롯이 떠난 후에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다고 말입니다.
찾아오신 하나님은 이제부터 아브람을 위해 일하시기 시작하십니다.
그 일하심의 간절함이 바로 ‘제발’이라는 단어에서 발견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일하셨습니까?
본문 17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네게 주리라’라고 번역된 ‘나탄’은 시제가 미완료 진행형 시제입니다.
그래서 NIV, NLT 영어성경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I am giving it to you."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아브람에게 그 복을 주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설교를 이렇게 끝맺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어떻게 일하고 계시냐고 질문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저도 궁금한데 여러분들이야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신중하게 진단하십니다.
내가 롯을 갖고 있음에 그 롯과 결별하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살고 있다면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위해 일하고 계심을 확신해도 됩니다.
반면, 내가 롯을 갖고 있는지 조차 모르십니까?
아니, 내가 갖고 있는 롯을 놓치고 싶지 않으십니까?
대단히 예민하여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선언하겠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일하시는 것과는 전혀 관계없는 불쌍한 존재일 수 있습니다.
미국인들이 부르는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고 합니다.
Dream never die, but dreamer/ song never dies, just the singer.
꿈은 죽지 않는다. 꿈꾸는 자가 죽는 것이지, 노래는 죽지 않는다. 노래하는 자가 죽는 것이지.
이 문장이 주는 교훈이 의미심장합니다.
우리 인간은 유한적 존재입니다. dreamer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인간은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singer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행위적으로 노력하는 일체의 영성적인 목표(dream, song)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유한한 내가 또 유한한 롯을 결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포기하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창세기 13:14절 전반절)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