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2:7-9
제목: 우선순위
서론)
오늘은 동기 목사가 매일 보내주는 나눔의 글을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삼하 6:11)
이 부분을 묵상할 때 마다 '웃사'와 '오벧에돔'dl 구별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성경은 웃사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70년 동안이나 법궤를 모시는 일을 해 왔는데 법궤 이동을 위한 준비과정에서 손 한번 댔다가 죽음을 당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교회라는 상자 안에 하나님을 가두고 하나님을 관리하려 하는 교만함이 아닐까요? 열심과 정성으로 모든 것이 다 덮어질까요? 그 이전에 하나님을 향한 제대로 된 중심이 먼저입니다. 아마도 웃사는 수십 년 동안 형식적인 관리 차원을 뛰어 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대상이시지 관리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늘의 내 모습을 돌아봅니다. 나 역시도 하나님을 관리하는 참담한 실체는 아닌지 두려움과 떨림으로 말씀 앞에 엎드립니다. 오늘도 열심과 열정 이전에 바른 믿음의 결정체로 중심이 바로 세워지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길이 살길이며 진리의 길이라 확신합니다. 함께 가실 거죠? 같이 가면 외롭지 않을 거예요.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친구가 보내준 글을 읽다가 이 대목에서 박수를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대상이시지 관리의 대상이 아닙니다.
내가 섬기고 있는 세인 교회는 하나님을 관리의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까?
예배의 대상으로 그 분을 높이고 있습니까?
근래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최고의 물건으로 홍보하고 있는 경우들을 봅니다.
하나님은 서비스를 최고로 잘 해주는 애프터서비스의 달인으로 소개하고 있는 듯한 경우도 가끔은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품질 최고라서 하자가 없는 완벽한 존재임을 부각시키려는 시도들이 여럿 보이기까지 해서 참담하기 그지없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그런 분이십니까?
본론)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던 아브람은 우여곡절 끝에 가나안의 한 지경이었던 세겜에 있었던 모레 상수리나무 근처에 정착합니다.
지난 수요예배 시간에 전했던 대로 이 땅은 편안하고 안전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본문 6절이 이 점을 우회적으로 알려줍니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모레에는 가나안 사람들(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이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은 아브람이 거주하기에 최적의 장소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땅이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곳이 세겜의 모레 상수리나무 근처였습니다.
이렇게 낯선 땅에 도착한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이 현현하셔서 아브람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이 땅은 내가 네 자손에게 줄 땅이다.
그러자 아브람이 바로 그곳에서 제단을 쌓았다고 7절 후반절은 보고합니다.
세겜을 거친 아브람이 그곳에서 계속 거주한 것이 아니라 곧바로 또 다시 다른 땅으로 이동하였음을 창세기 저자는 보고합니다.
본문 8-9절입니다.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세겜에서 벧엘로 동선을 옮겼고, 이어 아이로 또 거처를 옮겼음을 시사합니다.
아브람은 벧엘과 아이 사이로 동선을 옮기면서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제단을 쌓았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9절에서는 벧엘과 아이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해 있었던 남방으로 옮겼는데 학자들은 이 남방을 네게브지방(헤브론이 있는 곳)으로 추론합니다.
열거했지만 아브람이 가나안에 들어와 거쳤던 장소는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해 준 장소입니다.
아브람뿐만이 아니라 훗날 이 지역들은 그의 후손이었던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돌아와 방문하였던 지역이었습니다.
야곱뿐만이 아니라 여호수아도 가나안 정복 전쟁 시에 중심을 차지했던 장소이기도 했을 정도로 중요한 지역으로 고대 이스라엘 시대에는 상징적으로 기념되었던 장소들이 바로 세겜, 벧엘, 아이 등등입니다.
다시 정리해 보십시다.
아브람이 첫 번째로 도착했던 세겜, 그 다음 동선이었던 벧엘과 아이 중간 사이의 지역에 도착해서 행했던 우선적인 행위가 있었습니다.
제단을 쌓고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것입니다.
현존하는 최고의 구약학자라고 지칭되는 월터 브루그만이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가진 분, 곧 삶의 유일한 주관자에게 돌이킨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아브람의 제의 행위는 그가 목숨을 내건 결단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중략)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삶 전체를 포함한다. 한편으로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완전한 찬미를 뜻한다.”(월터 브루그만, “창세기-현대성서주석”, 한국장로교출판사,pp,202-203.)
브루그만 박사의 갈파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불렀던 신들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었고, 이제부터는 본인에게 전인격적으로 나타나서 만나주시는 아직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신인 야훼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걸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담지할 수 있습니다.
※ 예배란 내 삶의 우선순위를 예배하는 자에게로 고정하겠다는 공격적인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선언한 행위의 결과가 오늘 본문에 연이어 나오는 제단을 쌓았다는 표현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혹은 하란에서 올인 했던 아브람의 신앙의 대상이 바뀌는 혁명적인 선언과 행위가 세겜에서, 벧엘과 아이 중간에서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에게 제단을 쌓은 행위였습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누가복음 11:11-19절을 보면 10명의 한센 병 환자들이 고침을 받은 기사가 등장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노정 중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시는 중에 돌발적인 사건을 만나셨습니다.
9명의 유대인 출신 한센 병 환자와 1명의 사마리아 출신 한센 병자들의 방문을 받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공히 예수께 자신들의 질병을 호소하고 고쳐달라고 간구합니다.
주께서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말씀으로 그들을 고치십니다.
10명의 한센 병 환자들은 예수께서 말씀으로 치유하신 것을 알고 당시 공식적인 한센 병에서의 자유로움을 선포하는 유일한 권위였던 제사장에게 자신들의 몸 상태를 보이기 위해 제사장에게로 향발합니다.
그때의 상황을 의사였던 누가는 이렇게 세밀하게 진단하여 보고합니다.
누가복음 17:14-19절입니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알고 있는 10명의 한센 병 환자들을 치유하신 예수님의 담론입니다.
헌데 이 기사에서 주목해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제가 누가복음 17:11-19절에 대한 해석 중에 가장 탁월하게 갈파했다고 보는 해석을 소개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문둥병환자가 깨끗해진 후에 다시 예수께 돌아오는 것을 예배라고 평했다. 나는 좀 더 나아가 그것이 거룩한 삶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다. 예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그 분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하기 위해 돌아오는 것이 단순히 깨끗함을 받는 것과 구원의 믿음으로 사는 것의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경계지역에서는 전에 문둥병 환자였다가 깨끗해 진자들, 그러나 예수께서 명하신 길로 결코 걸어가지 않는 자들, 그래서 마치 늙은 퇴역 군인들이 전투 경험담을 나누듯, 예수님을 만났던 날과 그분께 씻음을 받았던 날의 향수에 젖어 사는 자들이 득실거린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던 날과 그분께 씻음을 받았던 날, 그들을 온통 휘저어놓고 확신을 주던 믿음, 그들의 입으로 내뱉었던 믿음을 하루하루, 한 걸음 한 걸음 지속하지 않은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께 다시 돌아오는 경이로움에 붙잡히는, 찬양하고 감사하는, 새로 얻은 힘을 온전히 이용하여 그들의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거룩한 습관을 배양하지 않은 자들이다. 그들은 제사장에게 그들 몸을 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대제사장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을 그만 잊고 말았다.” (마크 뷰캐넌, “열렬함”, 규장,pp,395-396.)
예배란 내가 예배하는 대상에게 발 담그는 행위가 아닙니다.
예배란 내가 예배하는 대상에게 전인격을 드리며 그분께 내 삶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마크 뷰캐넌이 지적한 그대로 깨끗해진 후에 다시 예수께 돌아오는 것이 예배라는 말은 정답입니다.
유트부 영상으로 박기영 자매의 찬양을 들으면서 깊은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은 주님을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주 발 앞에 무릎 꿇고/ 그 사랑에 나 안기네/ 어떤 말도 그 어떤 소리도/ 그 발 앞에서 잠잠해지네/ 주 나의 사랑/ 그 발 앞에 앉아/ 내 모든 기도는/ 사랑의 노래가 되네
주의 옷자락 만지며/ 주의 두 발을 씻기며/ 주님 그 발에 입 맞추며/ 나의 왕관을 놓으리
아브람은 이제까지 자신이 걸었던 길에서 돌아서겠다는 결단으로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고, 그 분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에서 풍요를 주었던 그 어떤 우상의 대상에게 전 인생을 걸었던 내 삶의 패러다임을 버리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제는 내 삶을 이곳 가나안까지 이동하라고 하셨고, 내 자녀 손에게 복의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던 당신께 내 삶의 전부를 드리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예배란 그런 것입니다.
성도란 모름지기 이 예배 선언으로 삶의 우선순위를 바꾼 자들입니다.
출애굽기 3:1-5절을 설교의 말미에 읽어드리려고 합니다.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니 그 때에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모세가 80이 되던 어느 날, 하나님이 그를 호렙산으로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위대한 엔-카운터의 현장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잘 아시는 가시떨기 나무의 임팩트였습니다.
불에 타고 있지만 사라지지 않는 가시떨기 나무를 보았던 모세는 신비롭게 거룩한 광경에 이끌려 그 앞에 서게 됩니다.
바로 그때 모세를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고 고백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대단히 의미 있는 조명을 말씀으로 주십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
오늘 수요 저녁예배에 참석한 교우들이여!
예배란 내가 그동안 지니고 있었고, 싸매고 있었고,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일체의 가치(신발)들을 벗어내는 행위입니다.
벗은 발로 주님께 서는 행위가 예배입니다.
이 결단을 우선순위 화하는 것이 바로 성도의 미션이자, 태도이어야 합니다.
아이든 토저가 이렇게 탄식한 글을 담아 놓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세속화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속화하며, 심지어 예배를 세속화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영적으로 크고 능력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믿음의 기도와 부흥이 일어나는 위대한 영적 운동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존귀와 영광과 경배와 진정한 예배를 받으시려면 아마 우리 모두는 없애버리시고 다른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셔야만 할지도 모릅니다.” (아이든 토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짜 예배자”, 생명의 말씀사,p,158.)
소름을 돋게 하며 오싹하게 하는 비수입니다.
여러분은 신실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오전에 영주 아빠와 엄마가 새해 인사차 서재에 들렸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려서 대접했습니다.
이동우 집사님 소천 이후, 아주 예배를 잘 드리는 영주 엄마를 보면서 이동우 집사님께서 딸에게 귀한 믿음의 유산을 남겨주었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예쁘게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목사님, 비록 거리가 멀어서 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예배에 참석하면서 느끼는 은혜가 있습니다. 말씀이 들리는 은혜가 너무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단 일분도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시는 영적인 긴장감을 말씀 시간에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나면 예배의 감격이 있습니다. 예배드림이 너무 큰 기쁨과 감사입니다.”
이미혜 자매가 남기고 간 간증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예배드리는 자로 여러분의 삶의 우선순위가 정해졌습니까?
나는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못 견디는 영적인 갈망이 있습니까?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나는 그 예배를 드림으로 내 삶을 온전히 예배의 주군이신 주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아브람과 같은 결단으로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우선순위는 주님을 향한 예배드림이십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