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29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마흔 여섯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12:1-3 제목: 떠나야 합니다. 서론) 대중 가수로 인기를 얻었지만 요절한 김광석씨가 부른 노래 중에 ‘어느 60대 부부의 사랑 이야기’라는 잘 알려진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를 음미해 보겠습니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 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막내아들 대학 시험 뜬 눈으로 지내던 밤들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큰딸아이 결혼식 날 흘리던 눈물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라 여보 그 눈물을 기억하오 세월이 흘러감에 흰머리가 늘어감에 모두가 떠난다고 여보 내 손을 꼭 잡았소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 하오 여기 날 홀로 두고 여보 왜 한마디 말이 없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
저도 이제 이 노래의 가사가 눈에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면 저 역시 나이가 들어가고 있음입니다. ‘여보, 안녕히 잘 가시게’라고 인사하는 남편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었을까 충분히 공감합니다. 하나님께 감히 기도하는 것이 있습니다. 대단히 이기적일 수 있겠지만 내 살아생전에 이 문구를 사용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별이라는 떠남은 인간사에 있어 어떤 의미로 보면 운명적인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정말로 저보다 아내가 앞서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우리는 낯선 것과의 만남이나 관계 맺기에 대단히 인색합니다. 이유는 아마도 불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낯섦을 유발하는 제일 원인인 떠남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하지만 떠날 때 떠나야지 떠나지 않으면 더 큰 아픔이나 불행을 경험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오늘부터 보게 되는 창세기 12장을 학자들은 족장역사의 시작으로 해석합니다. 족장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단어가 무게가 있어 보입니다. ‘떠남’입니다. 본론) 데라의 10대 손이었던 아브람은 야훼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그가 거주하던 땅을 떠나라는 명령과 함께 부름을 받습니다. 아주 유명한 본문 1절을 나누어 보십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야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오셨습니다. 왜 아브람이었을까요? 모릅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 하는 상투적인 대답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라는 대답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도 아브람과 같은 맥락에서 똑같이 그렇게 은혜로 먼저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무언가 특별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잊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아브라함 소명 기사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오셔서 제일 먼저 하명하신 내용이 떠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 출신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아주 먼 땅이었습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다짜고짜로 그곳을 떠나라고 하명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이 가나안임을 우리는 후에 이어지는 기사를 통해 알고 있지만 아브람 당사자는 하나님이 떠나라고 한 가야할 땅이 어디인지를 몰랐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내가 네게 보여줄 땅’이라는 익명의 장소였지 그 땅의 실체를 몰랐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8-10절을 소개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주후 1세기 사람이었던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아브람을 정의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렇게 아브라함을 정의한 이유는 이미 히브리서가 작성될 당시의 기독교 안의 영적 분위기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자 본받아야 열조로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이렇게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입니다. 허나 본문 창세기 12:1절의 정황으로 볼 때 아브라함은 그냥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우상의 문화에 젖어 있었던 이방적인 사람이었기에 야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명령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자, 하나님의 행위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음 주 수요일에 보겠지만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야훼 하나님의 이 생뚱맞은 명령에 순종했다는 점은 대단히 주목할 일입니다. 오늘은 설교 제목에 관련하여 설교의 범위를 제한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떠나라고 한 장소를 설정해 주셨습니다. 다시 1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① 고향(예레쯔) ② 친척(모레데트) ③ 아버지의 집(바이트)입니다. 장로교신학대학교의 하경택 교수의 주석을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이 세 가지 대상 중에 가장 먼저 언급되는 ‘땅’은 가장 넒은 의미에서의 결속관계를 말한다. 그러고 나서 ‘친족’과 ‘아비의 집’이라는 점차 좁혀진 범위에서의 가족관계들이 차례로 언급된다.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맺고 있었던 결속관계들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떠나야 할 대상이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지칭된 것은 아브람이 떠나야 할 곳이 그만큼 떠나기 어려운 곳이며, 그것은 그만큼 순종하기 어려운 문제임을 암시한다.”(하경택,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1”,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pp,196-197.)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정말로 낯 선 곳이었던 장소로 이동하라는 하나님의 하명을 순종한다는 것은 아브람에게 있어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며, 모험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어렵고 부담스러운 명령을 아브람에게 하명하시면서 중요한 여운을 남깁니다. 본문 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소위 말하는 5대 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 큰 민족을 이룰 것이다. Ⓑ 내가 너에게 복을 줄 것이다. Ⓒ 네 이름이 창대하게 될 것이다. Ⓓ 복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다. Ⓔ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민족을 이룬다는 말은 큰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고, 복의 근원이 되며, 복을 받게 될 것이며, 너와 함께 하는 자가 복을 받게 된다는 복(바라크)이라는 개념은 고대에서는 자식과 재물의 번성을 의미하기에 아브람의 자손이 이렇게 될 것이라는 복의 선언이며, 이름이 창대하게 된다는 것은 명예가 드높아질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복 선언을 종합하면 아브람을 통해서 복이 시작될 것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창세기 12:1-3절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신 것일까요? ※ 신앙적이지 않은 것들에게서의 떠남이 신앙적 걸음의 시작임을 알려줍니다. 송병현 교수가 갈파한 설명을 소개하겠습니다. “아브람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을 때 특별한 교리를 주시지도 않았다. 단순히 ‘네가 이렇게 내 말을 따르면 내가 이렇게 하리라’라는 조건을 제시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만이 유일한 하나님이란 말씀도 하시지 않았고, 또한 아브람에게 조상이나 집안의 신들을 다 버리라고 강요하시지도 않았다. 다만 아브람이 일정한 것들을 포기하면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송병현, “창세기 주석-WBC, 솔로몬,pp,252-253.) 주목할 송 교수의 지적은 ‘일정한 것들의 포기’라는 문장입니다. 저는 ‘일정한 것’을 ‘신앙적이지 않은 일체의 것’이라고 바꾸겠습니다. ‘신앙적이지 않은 일체의 것’에서 신앙적인 자리로 떠나는 것을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자리를 이동하는 것입니다. 내 자리에서 신앙적이지 않은 것을 차치(且置)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익숙한 것들에서 유리(遊離)되는 삶이 바로 떠남입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세속성과는 완전한 결별의 자리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신앙적이지 않은 것은 본토(땅)일 수 있습니다. 신앙적이지 않은 것은 친척일 수 있습니다. 신앙적이지 않은 것은 아비의 집일 수 있습니다. 다음 주에 볼 구절인 12:6절을 미리 보십시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앞으로 아브람이 가야 할 가나안 땅은 빈 땅이 아니었습니다. 함의 후손인 강성했던 가나안인들이 이미 살고 있었던 땅이었습니다. 그 땅에 가면 ‘어서오십시오.’ 라고 환영해 주는 땅이 아니라 싸워 개척해야 하는 땅이었다는 말입니다. 그 척박한 곳을 향해 떠나야 하는 삶이 아브람의 삶이었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익숙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로 날마다 이동하는 삶입니다.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된 법정의 글들을 샘터에서 추려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이판 승이었던 법정이 말했던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무엇이든지 차지하고 채우려고만 하면 사람은 거칠어지고 무디어진다. 맑은 바람이 지나갈 여백이 없기 때문이다. (중략)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으면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그러므로 차지하고 채우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침체되고 묵은 과거의 늪에 갇히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차지하고 채웠다가도 한 생각 돌이켜 미련 없이 선뜻 버리고 비우는 것은 새로운 삶이 열리는 통로다.”(법정, “스스로 행복하여라”, 샘터,p.93.) 기가 막힌 성찰입니다. 떠나지 않으면 채우는데 목숨을 겁니다. 떠나지 않으면 더 갖고 싶어집니다. 사실, 법정의 글을 읽다가 이런 유감스러움이 있었습니다. 법정은 유언으로 내 글의 어떤 글도 책으로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유언을 출판사 샘터가 어긴 셈입니다. 책으로 발간하면 적지 않은 수익이 생길 것을 안 출판사에서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세속적인 삶의 여백은 결코 자신의 기득권 자리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속성입니다. 신앙인이 자신에게 익숙한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엄격하게 말하면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일하시는 순간은, 당신이 명령하신 내용을 순종하여 그 자리를 떠나는 순간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빌립보서 3:8절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얻지 못합니다. 떠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얻지 못합니다. 결론)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 하나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옛날의 그 집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 마로니에북스,pp,15-16.) 박경리 선생의 이 글을 맨 처음 만나 읽을 때 소리 내서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가지고 갈 것이 없어 행복했던 거목이 던졌던 한 마디의 전언이 수백편의 설교문보다 더 큰 울림을 줍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새벽에 교우들에게 창세기 13:14절을 읽어 주었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아브라함이 의지했던 롯을 버리자 야훼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세속의 야망과 욕심을 버려야 주님이 오십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떠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얻지 못합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한 인생을 살면 잘 살았다고 부침하겠지만 신앙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또 다른 은혜를 받는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것 플러스 가득 찬 욕망의 자리를 떠나면 주님이 보입니다. 이 기막힌 은혜를 놓치지 않는 세인 지체들이 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