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15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마흔 다섯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11:27-32 제목: 데라도 있지만 아브라함도 있다. 서론) 바울이 양아들 디모데에게 첫 번째 편지했던 글을 하나 읽겠습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딤전 6:11-12)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그러나 그대, 하나님의 사람 디모데여! 그대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십시오. 의로운 삶, 경이롭고 믿음직스럽고 사랑스럽고 꾸준하고 친절한 삶을 추구하십시오. 믿음 안에서 힘을 다해 달려가십시오. 영원한 생명, 곧 부름 받은 그대가 수많은 증인들 앞에서 뜨겁게 껴안은 그 생명을 붙잡으십시오.” 유진 피터슨의 번역에서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힘을 다해 달려가십시오.” 이렇게 살려면 개역개정판 번역대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왜 존 번연이 천성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천로역정’이라고 제목을 붙였는지 이해가 됩니다. 천로역정을 한자로 쓰면 이렇게 씁니다. 天路歷程: 하늘로 가는 지금까지 걸어간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책의 원제가 이렇습니다. The Pilgrim's Progress from this world to that which is to come. 번역하면 이렇게 풀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다가오는 세상으로 가는 순례자의 과정” 이런 풀이들을 통해 접근하면 느껴지는 소회가 있습니다. 천로역정이 녹록하지 않은 길이요, 삶이라는 감흥입니다. 삶이 그렇습니다. 만만치 않은 것이 인생의 길입니다. 오늘 설교의 문제제기는 이렇습니다. 이렇게 만만하지 않고, 녹록하지 않은 것이 인생의 길이라고 할 때 우리들이 선택해야 할 몫에 대한 태도가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의 문제제기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문제제기에 대한 답을 잘 권면했습니다. “믿음 안에서 힘을 다해 달려가십시오.” 본론) 오늘 본문을 보면 인생의 대단히 중요한 엔카운터를 경험했던 한 사람이 후회하지 않는 천로역정을 걷게 되었던 그림자를 엿 보게 해주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그 사람을 추적해 보십시다. 창세기 12:1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다음 주에 보게 될 족장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아브람의 선택과 소명을 눈치 채게 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오셔서 그를 부르신 뒤, 하명하신 것은 고향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음을 창세기 기자가 밝힙니다. 이것을 전제하여 오늘 본문을 보아야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은 셈의 10대 손인 아브라함을 무대 위로 올리기 위한 사전 작업의 기록입니다. 27-30절을 다시 봅니다.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음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데라는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브람, 나홀, 하란입니다. 아브람이 장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사래였는데 그녀는 임신을 하지 못하는 불임녀였음을 알려줍니다. 차남이었던 나홀의 아내는 동생 하란의 딸이었던 밀가였다고 보고합니다. 근친결혼이 허용되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상황을 전제하면 이해가 됩니다. 차남 나홀의 후손들은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막내였던 하란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아내 사이에서 롯과 밀가, 이스가를 두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계보를 지니고 있었던 데라는 식솔들과 그의 고향이었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삶의 처소를 옮깁니다. 옮기는 과정에서 데라에게 불행이 닥칩니다. 막내 하란이 갈대아 우르에서 먼저 사망하는 비극을 당한 것입니다. 이런 아픔을 경험한 데라는 남은 식솔들을 데리고 이동하려고 했던 하란으로 삶의 장막을 옮겨 그곳에 도착합니다. 이제 본문 31-32절을 마저 읽어보겠습니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원역사의 마지막 텍스트인 31-32절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데라도 자기 자식들을 데리고 맨 처음에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데라는 가나안으로 가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하란에 정착하여 그곳에 거류하며 살다가 205세에 죽고 맙니다. 왜 데라는 가나안행을 포기했을까요? 왜 그는 하란에서 정착했을까요? 먼저 단어 하나를 해석의 실마리로 풀겠습니다. 거기에서 ‘거류하다’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야솨부’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머무르다’라는 의미로 제일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문맥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안주하다(stay comfortable)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안주하다’는 의미로 쓰일 때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입니다. 어떤 경우인가 하면 실패한 삶 때문에 떠돌이 신세로 전전긍긍하다가 어느 한 곳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데라는 모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안주하고 싶었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우상 섬김(달의 신이었던 sin)을 통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옮긴 것은 그리 차이 나는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가나안은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가나안은 신앙의 내용이 이질적인 곳이었습니다. 그곳으로 가면 안정적인 삶이 보장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안주하는 장소로는 하란이 최적이었습니다. 이 내용을 뒷받침 해주는 주석적인 설명을 하나 내놓겠습니다. “하란(Haran)은 아카드어로 ‘길’이라는 뜻으로 앗수르와 바벨론을 연결하는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기원전 2,000년경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기원 전 612년에는 잠간 몰락하던 앗수르의 수도가 되기도 했다. 갈대아 우르는 유프라테스 하류 지역의 ‘우르(Ur)'를 지칭한다. 수메르인들이 기원전 2,500년 전에 세운 도시다. 이곳은 하란과 마찬가지로 달(月)의 신인 ’신‘(SIN)을 숭배하던 지역이었다. 데라의 가족들은 달 신을 숭배하던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이희학,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행동-창세기 1-11장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p,296) 이 교수의 해석을 감안할 때 이런 추론이 가능합니다. 데라와 그의 자식들은 달 신을 섬기며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우상을 섬기던 백성들이었다는 말입니다. 달 신을 섬기던 종교적인 문화는 갈대아 우르나 하란이나 동일했습니다. 아마도 데라는 달 신을 섬기던 가부장으로 적지 않은 편안함과 풍성함과 경제적 유리함에 길들여져 있었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랬던 그였기에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까지의 그 멀고 먼 여정을 포기한 듯합니다. 이익이 없다고 생각한 탓입니다. 그림 하나를 보겠습니다.
이것이 데라와 아브람인 여정이었습니다. 데라는 이렇게 그의 여정을 하란에서 끝맺었지만 그의 장자였던 아브람 아버지의 여정과는 다른 선택을 합니다. 다음 주에 볼 12:4절을 미리 보겠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데라의 나이 145세가 되던 해애 그는 하란에서 머물기를 결심했고, 205세를 끝으로 삶을 마감했지만, 아브람은 나이 75세가 되던 해에 창세기 12:1절에서 보았듯이 하란에서 머물지 않고 가나안이라는 그 멀고 먼 여정을 떠났음을 창세기 기자는 보고합니다. 이상 오늘 설교를 통해 우리들이 함께 심비에 새겨야 할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 데라의 여정이 아닌 아브람의 여정을 우리도 걷기 바랍니다. 본문 설명을 통해 나누었습니다. 데라는 하란에서 본인의 여정을 끝냈지만, 아브라함은 가나안을 향해 끝까지 그의 신앙의 여정을 걸었다고 했습니다. 신앙인들 앞에 놓여 있는 길은 두 개입니다. 데라의 길이 첫 번째 길이요, 아브람의 길이 두 번째 길입니다. 데라의 길은 넓은 길이지만, 아브람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데라의 길을 걸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길은 아브람이 걸었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데라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데라와 아들 아브람의 길이 이렇게 달랐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너무 중요한 답이 있습니다. 창세기 12:1-3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다음 주 수요일에 이 메시지가 얼마나 엄청난 메시지인지에 대해 좀 더 세밀하게 살필 것입니다. 다만 오늘 교우들에게 이 구절을 인용한 이유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데라가 가나안으로 가는 길을 포기한 것과 아브람이 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은 차이는 하나님의 조명을 받은 것과 받지 않은 것에 대한 차이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창세기 12:1-3절에서 보듯 하나님의 조명을 받은 자였습니다. 반면 데라는 하나님의 조명과는 무관한 자였습니다. 너무 당연한 일이겠지만 하나님의 조명은 그래서 성도가 삶을 살아가는 무기 중의 무기입니다. 예레미야 1:4-9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예레미야를 부르셔서 사명을 주시는 장엄한 장면입니다. 하나님께 예레미야에게 오셨습니다. 오셔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지었다. 내가 너를 배에서 나오기 전부터 성별했다. 내가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다.” 그러자 예레미야가 이렇게 답변합니다. ‘나는 아이라 말을 잘 못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이 반응을 접하시고 엄청난 은혜를 그에게 주십니다. 내가 너를 보내는 곳마다 너와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하나의 퍼포먼스를 행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셨습니다. 그리고 감동의 제스츄어를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다.” 우리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얼마나 엄청난 고난과 시련과 고통 속에서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했는지를 예레미야는 자기가 당하는 고통의 내용을 이렇게까지 표현했습니다. 예레미야 20:7-8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성전의 총감독이었던 당시 최고의 실력자인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구금하고 린치 하는 폭력을 가했습니다. 더불어 조선시대 역모를 꾀하던 자들을 저잣거리 중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참수한 머리를 걸어놓아 경종했던 것처럼 예레미야를 베냐민 문 위층에 묶어 두어 사람들에게 수모를 준 뒤 방면한 기록을 예레미야 기자가 보고한 텍스트입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위협과 공포를 경험했던 나약한 인간인 예레미야에게 왜 자괴감이 없었겠습니까?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 수모를 경험한 뒤에 자신의 심리적 상태를 여과 없이 토로한 메시지가 읽어드린 20:7-8절입니다. 차준희 교수가 ‘예레미야 다시 보기’에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파타하‘는 ’유혹‘ 또는 ’후리기‘(남의 것을 갑자기 빼앗거나 슬쩍 가지다.)를 뜻하고, ’하자크‘는 ’강간‘을 뜻한다. 이 두 단어가 나란히 사용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관계가 지니고 있는 복잡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즉 그것은 ’유혹의 달콤함‘과 ’강간의 난폭함‘을 나타낸다.” (차준희, “예레미야 다시보기”,p,219.)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마치 이렇게 유혹하고 후리고, 마치 강간하는 것처럼 나를 옥죄서 불러놓고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대든 것입니다. 항의한 것입니다. 이 정도면 결별해야 합니다. 다시는 하나님의 ‘하’자도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예레미야 20:9절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이 구절(20:9)에 대한 김기석 목사의 해석은 기막힌 통찰을 줍니다. “예레미야에게 달콤한 시간은 지나갔고 소태처럼 쓴 시간이 다가왔다. 대중들의 귀에 단 말을 했더라면 이런 괴로움은 없었을 것이다. ‘파멸’과 ‘멸망’을 예고하자 사람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그를 조롱하고 박해했다. 그래서는 그는 다시는 여호와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여호와의 말로 인해 빚어진 현실이니 그 말을 더 이상 입에 담지 않으면 괴로움의 시간도 지나가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말씀에 사로잡힌 자의 운명이다. 예언자란 가슴에 불이 붙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사로잡힌 자는 외치지 않을 수 없다.”(김기석, “끙끙 앓는 하나님”, pp,225-226) 예레미야가 수많은 굴곡과 아픔을 경험했지만 끝내 하나님의 위대한 동역자로 삶을 살아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예레미야에게 말씀으로 조명하신 인격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의 천로역정을 이어지는 창세기 강해를 통해 앞으로 살피겠지만 아브람은 정말로 별 볼일 없는 범인(凡人)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렸던 이유는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조명 아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한희철 목사의 글에서 읽은 나를 쿵 하게 만든 한 구절을 소개하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을 부르셔서 쓰시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자를 거룩하게 하셔서 쓰신다.” (한희철,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 p,39.) 우리는 데라의 인생을 살 수도 있고, 아브람의 인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둘 다 하나님 앞에서는 극히 모자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둘의 차이는 극명했습니다. 하나님이 소통하시는 말씀의 조명을 ‘받았고, 안 받았고’의 차이였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조명을 오늘도 받고 계십니까?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말씀의 조명을 늘 받아 하나님이 만들고 조각하셔서 쓰시는 성도 모두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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