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8:1-19
제목: 기억하사
창세기 8장은 홍수가 그치는 장면을 아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홍수가 그치는 일정을 여려 교우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렇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희학,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구원 행동-창세기 1-11장의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227, 236 참고)
1) 노아가 600세인 해
① 2월 10일: 방주에 들어감
② 2월 17일: 홍수 시작
③ 3월 27일: 40일간 내리던 비가 그침
④ 7월 17일: 테바가 아라랏 산에 도착함.
⑤ 10월 1일: 물이 감하여 산의 봉우리가 드러남.
⑥ 11월 10일: 까마귀를 방주 밖으로 내보냄. 돌아오지 않음.
비둘기도 방주 밖으로 내보냄, 다시 방주로 돌아옴.
⑦ 11월 17일: 다시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내보냄. 감람 새 잎사귀를 물고 옴.
⑧ 11월 24일: 다시 비둘기를 내보냄. 돌아오지 않음
2) 노아 601세인 해
① 1월 1일: 지면의 물이 걷힘.
② 2월 27일: 땅이 완전히 마름. 방주에서 밖으로 나옴
이런 도식을 전제하고 본문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앞에 설명한 도식을 보면 노아의 홍수가 진행된 전체의 날수는 1년 17일입니다.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1년 17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노아의 홍수에 대한 과정을 훑었습니다.
과정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제 2의 창조와 구원의 감동을 여는 한 단어가 설교를 준비하는 데 크게 들어왔습니다.
본문 1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홍수 심판을 결심하셔서 실행하신 뒤에 뒷짐 지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명령한 테바 안에 노아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안에 또 다른 짐승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셨다고 P기자는 기록합니다.
여기에 P기자에 의해서 보고된 ‘기억하사’는 히브리어 ‘자카르’의 번역입니다.
일전에 주일 낮 예배 설교를 통해 ‘자카르’의 의미 해석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남성 성기의 표피를 자르는 행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만큼 결연한 행위라는 말 일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남성 성기의 표피를 자르는 것 외에도 마음 판에 조각칼로 새기는 행위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 말로 유념(留念)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개역판 성경에는 본문 1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眷念)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
‘권념하다’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돌보며 생각하다’라고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이 단어에 대한 부연 설명에 적합한 것은 아마도 영어성경에 번역된 단어 REMEMBER 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억한다는 것은 멤버임을 다시 확인하는 작업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사 사역에 합당하게 순종해 준 노아의 가족들을 다시 멤버로 확인하며 기억하셨을 것입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당신이 직접 창조하신 동물들까지 멤버로 기억하셨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1년 17일 동안 진행되었던 홍수의 완성 기간까지 하나님은 테바 안에 있던 사람들과 동물들을 잊지 않고 계셨던 것입니다.
조금만 더 진도를 나가십시다.
바람을 불게 하심으로 물이 줄어들게 하신 하나님(1절),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을 닫히게 하신 하나님(2절), 테바가 아라랏 산에 머물게 하신 하나님(4절), 까마귀와 비둘기를 통해 홍수의 상태를 알게 하신 하나님(7-12절), 방주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신 하나님(15-16절)의 일하심은 바로 기억하심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본문 1절에 기록된 ‘기억하사’는 창세기를 연구하는 저나 여러분 모두가 함께 은혜로 접근해야하는 단어이자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오늘 설교를 통해서 우리들이 레마로 받아야 하는 은혜는 이것입니다.
※ 하나님이 기억하시는(자카르) 한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승리하게 됩니다.
창세기 안에 있는 내증 하나를 소개합니다.
창세기 19:29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이 구절이 얼마나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지 이론으로 설명하기가 부족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구원의 현장에서 탈락했습니다.
극도로 타락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천사를 그곳으로 보내신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확정하셨습니다.
창세기 19:12-13절입니다.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내라 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로 이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문제는 주변 상황이었습니다.
롯의 편은 없었습니다.
사위들은 장인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겼고, 그들의 영향을 받았던 딸들과 아내가 머뭇거리며 소돔에서의 탈출을 망설였습니다.
이런 이유로 롯도 우유부단함이 엿보입니다.
이어지는 창세기 19:15-16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가로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15절에 기록된 ‘재촉하사(우쯔)’와 16절에 기록된 ‘지체하사(마하)’라는 단어를 창세기 기자는 아주 긴장감 있게 배치했습니다.
롯이 얼마나 우유부단했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며 그가 왜 아브라함과 헤어지면서 소돔을 선택했는지를 가늠하게 해주는 간접적인 단면입니다.
세상적인 가치에 대한 연연함 때문이었습니다.
사정이 이 정도라면 하나님이 상황에 따라 롯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예단을 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됩니까?
19:16절에서 천사들이 롯, 그의 아내, 두 딸들의 손을 직접 잡아 소돔 성 밖으로 강권하여 이동하게 합니다.
너무 친절하게 창세기 기자는 이 강권하심의 이유를 16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롯)에게 인자를 더하심이라’
설교를 준비하다가 못내 찝찝하고 유감스러웠습니다.
롯의 가족을 공간 이동 시키셔서 소돔 성에서 나오게 하셨다는 말을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총으로 해석하는 어떤 신학자의 주석을 수용하면 할 말은 없겠지만 구원을 받은 자라면 최소한의 책임적 반응을 보여야 한다고 교육 받은 저로서는 못내 유감스럽고 아쉬운 대목이 바로 이 구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앞에서 언급한 창세기 19:29절을 만나면서 그 아쉬움을 해결했습니다.
다시 창세기 19:29절을 복기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그렇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아브라함을 ‘생각하사’의 생각한다는 단어가 바로 ‘자카르’입니다.
롯과 그의 딸들의 구원은 본인들의 책임적 반응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롯을 향한 아브라함의 중보, 아브라함의 간절함을 ‘자카르’ 즉 기억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카르’ 하는 대상과 중보자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한 구절만 더 보십시다.
창세기 30:22-24절입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신 고로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함이었더라”
요셉이 어떻게 이 땅에 태어났는지를 알려주는 정보입니다.
요셉이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라헬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라헬을 ‘자카르’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카르’하심으로 이 땅에 태어난 요셉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구속사를 이어가신 것입니다.
전라북도 익산에서 세인교회의 주일 설교를 함께 공유하는 권사님이 2주 전에 ‘3무를 회복하라’는 주일 설교를 듣고 이런 피드백을 보내주셨습니다.
“목사님. 말씀 잘 받았습니다. 목사님이 진해에 계실 때 주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삶의 현장에서 성직의 역할을 잘 감당하라는 말씀이 잊어지지 않았어요. 그래요. 있는 곳에서 삶의 예배자로 살기를 힘쓰겠다고 다짐합니다. 주신 말씀 붙잡고 삶의 현장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으로 한 주간 승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권사님의 설교 피드백을 받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을 생각하며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패배하는 삶을 살겠는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카르’하며 사는 백성은 어디에 있든지 승리합니다.
하나님은 테바 안에 있던 노아의 식솔들과 동물들을 ‘자카르’ 즉 기억하셨습니다.
그 기억함은 1년 17일을 테바 안에 있던 노아와 그의 자녀들에게는 새 땅에서의 구원의 은혜와 회복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고, 결국 그들은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2:24절은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 기념비적인 은혜의 메시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하나님이 잊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43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고통 속에 있었던 이스라엘을 망각하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서 주었던 언약을 ‘자카르’ 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왜 이 구절이 은혜로 우리에게 적용됩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자카르’ 안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2021년 9월 15일에 여전히 저와 여러분을 ‘자카르’ 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주눅 들지 마십시다.
하나님이 ‘자카르’ 하시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스바냐의 노래가 우리에게도 불려 져야 합니다.
스바냐 3:14-17절을 우리도 노래하십시다.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아이든 토저가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참으로 묘한 진리가 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아이든 토저, “임재 체험”, 두란노, P,101.)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을 ‘자카르’ 하십시다.
바로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도 ‘자카르’ 하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