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5일 주일 오전 설교 (느헤미야 강해 6) 본문: 느헤미야 2:14-20 제목: 로드십과 리더십 서론) 아세아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강의를 했을 때, 학생들에게 목사가 되기 위해서 ‘3C’가 내게 있는지 철저히 점검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더불어 진단한 뒤에 3c가 없다고 냉정하게 평가를 내린 학생들이 있다면 가급적이면 목회의 길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며 현명한 일임을 아프지만 가르친 적이 있었습니다. 3c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Calling (부르심의 확신) ② Character (목회자의 자질) ③ Capability (목회자의 능력) 저는 이 중에서 ⓵⓶항은 자연발생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선천적 기질로 부여받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소명도 하나님이 미리 주권적으로 선택하심으로 부름을 받은 성경의 인물들이 많기 때문에 선천적인 주어짐이라고 정의해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그렇게 교수(敎授)했습니다. 하지만 ⓷항에 관해서는 전혀 다른 관점이라고 일갈했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⓷항은 철저히 후천적인 방법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에게 후천적으로 주어지는 능력은 과연 무엇일까요? 훈련을 통해서 갖게 되는 리더십입니다. 위임받은 한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능력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 능력은 최선을 다하는 공부와 훈련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로스웨이 성경 공부를 수강한 교우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자칫 잘못하면 범할 수 있는 세 가지 죄가 있음을 강의했습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죄이고, 둘째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죄이며, 셋째는 배웠는데 행하지 않는 죄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느 것 하나 가벼운 죄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경중의 차이가 아니라 굳이 이 세 가지의 죄에 대한 순서를 정하라고 한다면 순서는 앞에서 언급한 순서가 맞습니다. 저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은 모르면서 배우지 않으려는 태도는 정말로 재앙 수준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배우지 않으려는 자는 도전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도전하지 않으려는 자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가 교회 공동체의 리더로 세워진다면 공동체는 공동체대로, 리더는 리더대로 곧 재앙을 맞이하게 되는 최악의 선택일 것입니다. 1940년대 초에 에드먼드 힐러리라는 청년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러 나섰다가 실패를 했습니다. 그는 실패의 잔을 마시고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그 유명한 이 말을 남겼습니다. “산아, 너는 자라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자랄 것이다. 나의 기술도, 나의 힘도, 나의 경험도 자랄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기어이 네 정상에 설 것이다.”(정영진, “사람이 따르는 리더, 행복을 부르는 리더”, 리더북스, p,222.) 이 말을 한 후 10년이 지난 1953년 5월 29일에 그는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드디어 정복하기에 이릅니다. 리더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성장하고 자라는 사람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본문의 주인공 느헤미야는 최적의 리더였습니다. 본론) 본문으로 여행을 떠나보십시다. 지난 주일 설교를 통해 말씀드렸듯이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감동을 주시는 시간이었던 삼일을 칩거하며 예루살렘에서 드문 불출했습니다. 그러기를 3일, 하나님이 느헤미야에게 성벽재건이라는 프로젝트를 컨펌해 주자. 비로소 느헤미야는 대단히 신중하게 측근 몇 사람을 대동하고, 배헤마(아마도 나귀나 말)를 타고 늦은 밤에 예루살렘의 일부분을 답사했음을 나누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베헤마’를 타고 용정(龍井)을 지나 분문으로 잠행했고, 또 분문(糞門)을 지나 샘문까지 올라갔고, 왕의 문이라고 부르는 샘문부터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벽 상태를 보고 다시 용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골짜기 문까지 도보로 돌아왔음을 본문 13-15절이 보고합니다. “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분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불탔더라 앞으로 나아가 샘문과 왕의 못에 이르러서는 탄 짐승이 지나갈 곳이 없는지라 그 밤에 시내를 따라 올라가서 성벽을 살펴본 후에 돌아서 골짜기 문으로 들어와 돌아왔으나” 느헤미야가 행한 야간 답사를 잠행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16절 때문입니다. “방백들은 내가 어디 갔었으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였고 나도 그 일을 유다 사람들에게나 제사장들에게나 귀족들에게나 방백들에게나 그 외에 일하는 자들에게 알리지 아니하다가” 이 구절을 영어성경 KJV 버전으로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And the rulers knew not whither I went, or what I did; neither had I as yet told [it] to the Jews, nor to the priests, nor to the nobles, nor to the rulers, nor to the rest that did the work. (통치자들은 내가 어디로 갔는지,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아직 유대인들과 제사장들과 고귀한 사람들, 통치자들과 그 밖의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자세히 16절을 소개한 이유는 느헤미야는 이토록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사역인 성벽 재건에 대하여 극도로 신중했음을 교우들에게 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신중한 모드로 줄타기를 하던 느헤미야는 드디어 본문 17-18절에서 그 동안 기도했고, 신중의 또 신중을 기했던 본인의 프로젝트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유다인들을 모았습니다. 본문은 어디서 모였는지를 밝히고 있지 않아 가늠할 수 없지만 느헤미야는 본인이 4개월 동안 바사에서 기도했고,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3일 동안 기다렸다가 야간 잠행을 하며 성벽 답사를 한 끝에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유다인들을 몰수이 모으고 다음과 같은 본인의 프로젝트를 발표합니다. ⓐ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말자. ⓑ 이 사역에는 하나님의 선한 손이 반드시 도울 것이다. ⓒ 바사 왕 아닥사스다 1세가 이 사역을 위해 나를 이렇게 지지했다. 이 세 가지의 선포는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었던 사람들, 방백들, 유다 사람들, 제사장들, 귀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았을 것입니다. 제 1성전인 스룹바벨 성전 재건 이후 140년이 지났고 2차 포로귀환인 에스라 귀환 이후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이합집산으로 흩어져 있었기에 성벽이 무너졌어도 재건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예루살렘 거민들의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이 선언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모으는 데 성공했고, 재건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는데 결정적인 연설을 한 것입니다. 17-18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단어가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입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너만이 일이 아니고 나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 유다 백성들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세우는 대단히 중요한 일임을 공유하도록 한 것입니다. 동시에 이 성벽 재건은 외로운 사역이 아님도 분명히 했습니다. 혹시나 모를 불온한 자들의 훼방과 방해가 있겠지만 겁내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도울 것이며, 정치적으로는 바사의 왕이 나에게 윤허한 일이기 때문에 법적인 하자가 없는 공인된 사역임을 밝힘으로서 성벽 재건의 박차를 가하도록 독려했습니다. 결국 이 엄청난 사역은 이런 느헤미야의 탁월한 리더십 때문에 19절에 기록된 대적들의 방해가 있었지만 20절의 말씀으로 일거에 날리며 52일 만에 성벽 재건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방해의 일을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 19절입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우리를 비웃어 이르되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하기로” 19절에 대한 주석을 느헤미야 연구원 김근주 박사의 글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식민지로 제국에 병합된 지역에서 갑작스레 성벽을 짓는다고 하면 불순한 의도가 깔려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을 겁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실의 허락을 받아 진행하지만, 산발랏과 도비야 패거리에게 그 점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일단 유언비어를 퍼뜨려 느헤미야가 진행하려는 일을 방해하는 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완성될 경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다 공동체가 견고해 지고, 산발랏과 도비야 일당의 영향력은 약화될 것이 분명하기에 어떻게 하든 이를 막으려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반역을 꾀한다.’라는 누명은 상대방에게 올무 걸기에 최고의 수단이었습니다.” (김근주,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기”, 봄이다 프로젝트 간, 79.) 하지만 이런 패악을 저지르는 산발랏 일당에 대해 느헤미야는 조금도 머뭇대거나 주눅 들지 않고 맞섭니다. 본문 20절이 전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서울신학대학교 소형근 교수의 글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들에게 신앙적 확신을 갖고 선포한다. 20절의 ‘기업’은 ‘정치적 분리’를 의미하고, ‘권리’는 ‘법적인 권리’를 말하며, ‘기억’은 ‘제의에 참여할 권리’를 의미한다. 이전에 산발랏과 도비야 그리고 게셈이 유다 지역과 관련된 특별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제 유다 지역에 대한 모든 권한을 포기할 것을 느헤미야는 촉구한다. 즉 느헤미야는 대적들로부터 유다 지역의 정치적, 법적, 제의적 독립을 선포한 것이다.” (소형근, “연세신학백주년기념 성경주석”, 대한기독교서회, 47-48) 빈틈이 보이지 않는 느헤미야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학자들과 목회자들은 오늘 본문 텍스트를 놓고 이렇게 정의하곤 합니다.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빛나게 해준 대표적 본문이다.” 그렇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명징한 결론이자 해석입니다. 저 역시 수많은 목회자들과 성서학자들이 공히 동의한 이 명쾌한 해제에 대해 수용합니다. 하지만 이 명제에 대한 동의를 전제하면서 결코 간과하거나 소홀히 여기면 안 되는 레마를 오늘 주일에 찾고자 합니다. ※ 느헤미야의 탁월한 리더십의 기초는 로드십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본문 18절과 20절을 읽겠습니다. 18절입니다.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느헤미야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성벽 재건의 프로젝트를 하나님이 계획하셨다는 믿음이었습니다, 나와 당신들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선한 일을 이루는 도구일 뿐이지, 이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당사자는 야훼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선포하며 확신했습니다. 20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아무리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이 우리들이 진행하려는 예루살렘 성벽건설을 방해하고 훼방한다고 해도 겁내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실 것이다, 20절을 표준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내가 나서서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꼭 이루어 주실 것이오. 성벽을 다시 쌓는 일은 그분의 종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오. 예루살렘에서는 당신들이 차지할 몫이 없소. 주장할 권리도 기억할 만한 전통도 없소.”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거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성벽 재건을 완성한 리더십이 출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리더십은 자연발생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철저한 로드십을 근거로 강력하게 발휘된 것이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꼭 이루어 주실 것이오. 느헤미야는 설교의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바사라는 이방 땅에서 그것도 3세대 유다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엄청난 하나님 신앙으로 무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유대 정신이었던 로드십을 기초로 무장한 리더십의 소유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나도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로드십을 근거로 하나님의 우대한 역사를 성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지난 주간 금요일 성서일과 묵상을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저는 금요일에 미가 7:18-20절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붙잡고 이렇게 마중물로 삼았습니다. “미가는 주전 8세기 남 유다를 위해 사역했던 ‘나비’였다. 그는 이웃인 북쪽이 앗수르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것을 보고 들었을 가능성이 100%다. 선민공동체가 멸망을 당했다는 것은 미가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을 것이 명백하다. 더 살 떨리는 것은 그 멸망의 암운이 남쪽도 예외가 없다는 야훼의 신탁이었다. 자세히 보면 주전 8세기, 남 유다의 영적 분위기와 기상도는 북쪽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사악했다. 정치가, 재판관들은 저녁 침상에서 내일은 어떻게 하면 민중들을 착취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잠자리에 들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더 참담한 것은 마지막 남은 양심의 보루인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참담한 상황을 바로 세워야 하는 막중한 사명이 있는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궁정과 함께 결탁한 전형적인 吉 예언자들로 부귀와 영화에 목을 건 타락한 자들이었기에 도진개진이었다는 점이다. 예언자 미가는 이런 기막힌 영적 상태에 돌을 던지며 대항하지만 예언자 한 사람의 힘으로는 턱없이 역부족이었다. 전혀 나아지지 않는 유다에 대해 멸망을 예고한 미가의 예언자적인 사명과 메시지는 그에게 숨 막히는 고통이었을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움츠리지 않고 미가는 무섭도록 영적 지도자들을 향하여 서슬이 시퍼런 비수를 날리며 사역했다. 사역은 예리했지만 반면 예언자는 유다를 향한 사랑을 결코 놓을 수가 없었다. 오늘 성서일과를 통해 만난 텍스트는 절절하다. 유다를 향한 철퇴는 다시 철회될 수 없는 신탁이었지만 예언자는 소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아마도 간절한 희망사항이었으리라! 야훼와 같은 신이 없다고 선언한다. 더불어 야훼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해 허물을 사하실 것임을 천명했다. 어디 이뿐인가. 야훼 하나님은 진노를 오래 발하시지 않는 하나님이시고, 죄악을 사하여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심도 선포한다. 유다에게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소망 그 자체였다, 야훼께서 야곱과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헤세드’와 ‘에메트’를 반드시 실천하실 것임을 기대했다. 예언자만이 갖고 있었던 믿음을 전제한 희망사항은 유다의 끝이 해피엔딩으로 마감될 것을 선언한 일이었다. 읽다가 간절해졌다. 그렇다면 내 나라는? 나의 대한민국은? 그러다가 또 다른 간절함이 생겼다. 지금 내 사랑하는 대한민국에 미가는 누구일까? 미가는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사랑하는 대한민국은 해피엔딩의 드라마를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상황이 제 아무리 어려워도, 여건이 무척이나 곤고해도, 형편이 나를 옥죄어도 미가 7:18절의 믿음을 갖고 있는 자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미가 7:18절 전반절을 노래합시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이 노래를 부르는 자가 로드십을 갖고 있는 리더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로드십에서 흔들리지 않는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문들아 머리 들어라 문들아 머리 들어라 들릴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영광의 왕 들어가시도록 영광의 왕 들어가신다 영광의 왕 뉘시뇨 강하고 능하신 주로다 전쟁에 능하신 주시라 다 찬양 위대하신 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