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공급받고 있습니까?2024-03-07 17:05
작성자 Level 10

2023년 2월 26일 주일 오전 설교 (느헤미야 강해 5)

 

본문느헤미야 2:11-13

제목공급받고 있습니까?

 

서론)

 

CHAT GPT 열풍이 대단합니다.

인공지능 AI에게 물어보면 대답해 주는 신세대 개념의 채팅입니다.

저도 지난 금요일에 가입을 해서 오늘 본문 느헤미야 2:11-13절에 대한 설교 요약을 채팅으로 요구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AI가 제게 보내준 1,000자 설교 요약문이 이러했습니다.

느헤미야 2:11-13절은 예루살렘 성벽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이 절들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밤중에 한 사람으로부터 성벽의 파손된 상황을 알게 된 후성벽을 수리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과정을 보여줍니다먼저느헤미야는 밤중에 혼자서 성벽을 둘러보았습니다그러나 그가 성벽을 보고 나서그는 성문과 성벽의 파손된 상황을 발견하였습니다이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권세자들제사장들귀족들을 소집하여 그들에게 성벽의 상황을 보고하였습니다그 다음으로느헤미야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도움을 기도하고 성벽을 수리하기로 결정했습니다그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도움을 빌어 성벽을 고쳐나가자고 이끌었습니다그는 그들에게 일하라고 하였고각자의 일을 맡겨주어 일을 원활하게 하였습니다이 장은 우리에게 지도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민첩성예측능력리더십상황인식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의 파손된 상황을 파악하고하나님의 도움을 빌어 성벽을 수리하는 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그는 예루살렘의 권세자들제사장들귀족들을 모아 일을 맡겨주고그들에게 지시를 내리며모든 일을 원활하게 진행시켰습니다이 장은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믿음과 노력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도움을 빌렸지만그는 그 도움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또한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며모두가 협력하여 일을 완수했습니다.”

이렇게 요약되어 제 컴퓨터 안으로 도착한 시간은 불과 1분 남짓이었습니다.

노트북으로 전송되어 온 설교 요약문을 받아 보는 순간소름이 끼쳤습니다.

왜요?

인공지능 컴퓨터 칩 안에 입력되어 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느헤미야 2:11-13절에 대한 정보를 기초로 한 분석이 거의 완벽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놀라움이 제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전할 주일 오전 예배 설교의 내용을 컴퓨터가 이미 다 말해 주었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세계에는 컴퓨터 하나님이 예배의 대상 자리에 앉아 있기에 컴퓨터를 예배하는 그런 날이 분명히 올 것입니다.

설교 준비가 너무 힘든 목사들에게 최고의 단비가 될 것 같다는 씁쓸한 예상도 해 봅니다.

여러분에게 AI가 보내준 거의 완벽하다는 말 밖에는 다른 표현이 걸맞지 않은 설교 요약문을 읽어드렸는데 여러분의 소회는 어떠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제 몸에 소름이 돋은 이유는 전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송장 같이 서늘한 100점 때문이라는 점수입니다.

100점은 분명 100점인데 나는 그 100점에서 무섭고 떨리는 뱀의 비늘 같은 서늘함이 엄습했습니다.

이제는 저는 AI의 설교 요약문이 완벽했지만 하늘이 두 쪽이 나도 AI가 따라올 수 없는 이강덕 목사가 해석한 본문 느헤미야 2:11-13절 설교를 지금부터 나누어 보겠습니다.

 

본론)

 

AI 때문에 본문 이해가 쉬워졌습니다.

아닥사스다 1세의 재가를 받아 예루살렘에 느헤미야가 도착했습니다.

소수의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대대수의 많은 학자들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시기를 아닥사스다 1세 재위 20년이 되는 해인 주전 445년으로 산정합니다.

그는 정말로 간절한 기도와 준비 끝에 그토록 안타까워하며 애달파 했던 고국 예루살렘 땅에 발을 디뎠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땅은 느헤미야가 얼마나 오고 싶어 했던 땅이었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그가 계획했던 일체의 성벽 재건 프로젝트를 곧바로 가동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행동은 사뭇 달랐습니다.

오늘 본문 11절로 다시 들어가 보십시다.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무른 지 사흘 만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땅을 밟은 이후 72시간 동안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그가 72시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이유는 본문 12절이 곧바로 대답해 줍니다.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전율하는 감동을 주는 구절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땅에 들어와 72시간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가 삼일이 지난 후에야 움직였는데 그 움직임은 극소수의 사람들과 밤에 예루살렘의 일부분 성읍을 심방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3일 동안 느헤미야는 무엇을 하고 지냈던 것일까?

그는 느헤미야 프로젝트 즉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는 미션을 갖고 예루살렘에 들어왔음을 이전 강해에서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삼일 동안 전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막상 예루살렘 들어온 느헤미야는 삼일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이 갖고 들어온 프로젝트에 대한 하나님의 재확인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앞으로 본인이 예루살렘에서 행할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재가를 기다렸다는 말이 됩니다.

12절 전반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72시간 동안 아무 것도 안 한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을 행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새롭게 말씀하시는 말씀(다바르)의 조명을 공급받기 위해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재-확인(re-confirm)이 느헤미야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72시간 동안 하나님의 재확인을 기다렸던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조명을 받고 움직였습니다.

그 움직임을 12절에서 측근 몇 사람만 대동하고 느헤미야가 밤에 이동하는데 도움을 주는 어떤 짐승(베헤마한 마리만을 사용하여 성읍을 둘러보았던 행동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3절은 그 결과를 보고하고 있는데 이렇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 밤에 골짜기 문으로 나가서 용정으로 분문에 이르는 동안에 보니 예루살렘 성벽이 다 무너졌고 성문은 불탔더라

龍井(용정)과 분문(분문)을 이해하기 위한 그림을 하나 소개합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느헤미야시대예루살렘.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645pixel, 세로 960pixel

 

그림 밑 왼쪽으로 보이는 분문(糞門)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잡았던 동물들의 배설물들을 이동하던 소위 말하는 ‘Dung Gate’입니다.

더불어 용정(龍井)은 그림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학자들에 의하면 용정(Well of Dragon)은 예루살렘 남동쪽에 위치해 있는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우물 -로겔’(En-rogel)로 추정하는데 그렇다면 그림 왼쪽에 있는 골짜기 문과 그 밑에 있는 분문 사이에 위치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이 지역을 밤중에 감찰하고 온 것입니다.

이것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삼일 만에 행한 사역 전부였음을 알려주고 있는 셈입니다.

감찰하고 돌아온 결과는 하나니의 보고와 일치하였음을 느헤미야 저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대단히 소극적인 행보처럼 보이는 느헤미야의 삼일 동안의 행적과 이후의 첫 행적이 우리 독자들에게 주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이 의미를 이렇게 교우들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오늘 주는 영적 의미의 교훈을 쳇봇 GPT는 절대로 줄 수 없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말씀의 숨소리를 느헤미야는 기다렸습니다.

 

이 소리는 사람만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입니다.

기계는 들을 수 없습니다.

가히 셀 수 없을 정도의 정보가 많이 담겨 있는 컴퓨터 칩 안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한다고 해도 AI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들려주시는 영적인 감동의 숨소리 즉 다바르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말씀의 숨소리를 기다렸고 그 숨소리를 공급받은 삼일 이후에 행동한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결코 빼앗기지 말아야 하며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말씀의 숨소리입니다.

제가 숨소리라고 표현한 이유는 다바르’ 즉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격적인 관계에 있는 자에게만 주시는 호흡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실례가 에스겔 37장에 표현된 예언자 에스겔과 하나님의 숨소리 공급입니다.

예언자 에스겔은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어 어느 골짜기로 가게 됩니다.

그 골짜기를 많은 뼈들이 가득 메우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뼈들의 형편은 매우 말라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여주신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묻습니다.

보고 있는 뼈들이 살 수 있겠느냐?

에스겔은 주님이 아신다고 답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대단히 중요한 미션을 내리셨고 에스겔이 순종한 결과물을 보고합니다.

에스겔 37:4-10절입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저 뼈가 들어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뼈들을 향하여 외치라고 명하셨습니다.

생기에 뼈들에게로 들어가라라고.

에스겔이 그대로 순종하자 마른 뼈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뼈와 뼈들이 서로 붙기 시작했습니다.

들어맞은 뼈들은 움직이더니 그 위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의 사람의 모습이 되는 기적이 일어났지만 하지만 그 안에는 아직은 생기가 없었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다시 에스겔에게 명하셨습니다.

생기로 하여금 저들이 살아나게 하라

에스겔이 그대로 선포하였더니 생기가 없어 잠잠하던 살과 뼈가 붙어 있었던 것들이 생기가 들어가 살아났고 그 떼가 일어섰는데 큰 군대가 되었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이 유명한 에스겔 골짜기 환상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생기’ 히브리어 루아흐의 번역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1:2절을 기억하십니까?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태초에 천지가 창조될 때땅이 혼돈하였습니다.

그 상태는 흑암이 깊었습니다.

그런 무질서와 혼돈의 세계가 바로 질서의 세계로 변화됩니다.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그 무질서와 혼돈을 하나님의 영이 통치하고 운행하시면서부터 질서 있는 세계가 되었음을 창세기 기자는 보고합니다.

하나님의 영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원문은 베루아흐 엘로힘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 하나님의 루아흐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마른 뼈들에게 들어가라고 명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생기였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 즉 생기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에스겔 37장의 루아흐는 다바르’ 즉 말씀하시는 영이 적절하다고 학자들은 이야기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느헤미야의 사역에 다시 적용하겠습니다.

느헤미야는 말씀하시는 영을 공급받기 위해 삼일을 기다렸습니다.

혹자는 느헤미야가 도착한 시기가 안식일과 맞물렸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았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성서학자와 목회자의 취사선택의 문제이지 당위는 아닙니다.

제가 72시간이라는 시간적 공간을 강조한 이유는 본문 12절에 번역된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이라는 번역에 들어가 있는 히브리어 나탄’ 때문입니다.

나탄을 한글 성경 몇 군데에서 다양한 단어를 사용하여 의미 있게 번역했는데 본문 이해를 위해 세 번역을 소개하겠습니다.

개역 판 성경입니다.

내 하나님이 나를 감화하사

표준 새 번역 성경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킹 제임스 버전(KJV) 성경입니다.

내 하나님께서 내 마음 속에 넣어 주사

마지막으로 현대인의 성경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이상의 성경 번역을 종합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결론을 맺어도 가히 실패하지 않을 것 같아 교우들에게 선포합니다.

그렇습니다.

느헤미야는 느헤미야 프로젝트를 위하여 하나님의 주시는 말씀(다바르)의 감동을 공급 받을 때까지 삼일을 기다리며 소망했던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은혜말씀조명하심 등등의 공급하심으로 사역하는 자들입니다.

주전 3-4세기에 예언자 하박국서를 통해 기록하신 다바르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남겨 두었습니다.

하박국 2:18-20절을 읽겠습니다.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무에게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에게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새긴 우상의 모습을 하박국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무에게 깨라돌에게 일어나라.

여기까지는 우상의 실체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사롭지 않은 또 다른 우상의 출현을 예고합니다.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도무지 생기가 없느니라

오래 전, ‘다가오는 소리’, ‘건너가게 하소서’, ‘땅 끝에서 오다’ 등등 많은 작품을 남긴 김성일 장로는 본인의 책에서 이렇게 이것들을 해제했습니다.

돌에 새겨서 금과 은으로 입힌 것그것은 바로 반도체를 그대로 설명해 놓은 것이다. (중략사람들은 그것으로 컴퓨터로버트를 만들어서 깨라말하라 일어나라고 말한다.” (김성일, “성경과의 만남”,국민일보사, 163)

너무 과장된 비약이라고 반문하는 분도 있겠지만분명한 것은 금으로 은으로 입힌 것에는 생기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인공지능의 발전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혁명을 일으켰고또 일으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공지능은 하나님이 에스겔에게느헤미야에게이강덕 목사에게그리고 여러분에게 주는 인격적인 은혜의 감동은 줄 수 없습니다.

쳇봇 GPT는 설교 요약을 완벽하게 해서 줄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숨소리까지는 줄 생기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천착해야 하며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의 숨소리를 공급받고 호흡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호흡하기를 위해 3일을 기다렸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의 숨소리로 호흡하고 있습니까?

 

결론)

 

오래 전에 읽었던 책에서 받은 의미 있는 메시지를 하나 건지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 아이작 스톤이 중국을 방문하였습니다중국 전역에서 뽑은 어린아이들을 구성해서 만든 국립관현악단이 공연을 했는데그 연주회에 아이작 스톤이 방문을 한 것이었습니다. 10억이 넘는 인구 가운데 취사선택된 재원들이 연주하는 연주였으니 얼마나 잘했겠습니까더군다나 공산주의에서 특유의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을 받은 10세 미만의 아이들이니 얼마나 대단한 연주를 했겠습니까그 날 중국 국립 관현악단 아이들은 차이코프스키의 곡을 정말로 완벽하게 소화를 해냈습니다뿌듯한 마음에 책임자가 아이작 스톤에게 자신 있게 소감을 물었습니다.

오늘 공연을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그러자 아이작 스톤이 두 가지를 대답을 했습니다.

첫째 어린나이에 기교 있는 음악을 연주하는데 정말로 놀랐습니다둘째하지만 이토록 영혼이 없는 음악을 처음입니다.”  (한홍, “칼과 칼집”, 두란노, 37-38)

혹평 중에 최악의 혹평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감동은 진짜 감동이 아닙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동의 극치는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은 말씀이라는 다바르에서만 발생합니다.

느헤미야는 이 감동을 기다렸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은혜의 공급을 기다렸습니다.

이것을 공급받지 않은 상태에서의 모든 일을 무의미합니다.

그리고 실패합니다.

나는 우리 교우들이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다바르의 공급에서 탈락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처럼 이번 주간도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에 민감하며 그 공급받은 것을 갖고 힘 있게 승리하는 세인 지체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