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19일 주일 오전 설교 (느헤미야 강해 4) 본문: 느헤미야 2:1-10 제목: 올곧음은 비틀어짐을 이깁니다. 서론)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쟈크 엘륄의 말을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합니다. “변질된 기독교가 성공한 이유는 오늘의 기독교가 믿는 신구약성서의 메시지를 교회가 추구해야 할 신학적 가치가 아니라 ‘기능’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쟈크 엘륄, “뒤틀려진 기독교”, 대장간, 95.) 정말로 뼈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엘륄의 말을 부연 설명하자면 변질된 교회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성경을 진리가 아닌 하나의 기능 교과서로 여기게 될 가능성이 많아진다는 경종입니다. 개신교회의 설교는 세 가지에서 이탈하면 안 됩니다. ⓵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와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 선포입니다. ⓶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향하도록 하는 캐리그마입니다. ⓷ 앞에 설명한 두 가지를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올곧게 살아가도록 독려하시는 오순절적인 성령의 일하심입니다. 저는 이 세 가지의 명제를 상실하면 그건 설교일 수도 없고, 하나님의 진실 된 역사도 일어나지 않음을 알기에 이 명제에서 이탈하지 않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지난 세월동안 개인적으로 몸부림을 쳐 왔습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설교는 대중들을 모으는 데에는 그리 좋은 콘텐츠가 아닙니다. 도리어 독약과 같은 역효과를 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에게 임하는 유혹은 사람들을 모으는 데 최적화된 이벤트 형 설교를 찾아내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한탕 설교를 행함에 있어서 교회가 양적으로 부흥될 수만 있다면 성경을 얼마든지 기능으로 여길 수 있다는 임전무퇴의 각오까지 하니 참 아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설교나 전략이 교회에서 통용될 때, 복음의 능력이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이 해제를 반대로 해석하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복음의 진정성이 있는 핵심이 선포되면 비 복음적인 것들이 긴장하게 되며, 동시에 그 비 복음적인 것들의 아류들이 일소될 수 있다는 역발상의 은혜를 얻게 됩니다. 지난 주간 홈페이지 올려놓은 유진 피터슨 목사의 글 ‘잘 산다는 것’에 이런 문장이 있어 밑줄을 그었습니다. “종교적 군중은 가장 모으기 쉬운 무리입니다. 그러나 한 지붕 아래 모이는 사람의 수를 불리는 것은 그들이 본질적인 것에 참여하게 만드는 데 그리 성공적인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회 활동은 더없이 인격적인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인격적인 차원에서 소개하는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 “잘 산다는 것”, 복이 있는 사람, p,120) 읽으면서 이런 소회가 제게 밀려왔습니다. 세인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올곧은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될까? 혹시 전혀 복음적이지 않는 비틀어짐에 빠져 종교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신자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긴장했습니다. 본문 설교를 준비하다가 이 대조를 통해 올곧은 그리스도인들로 서 가도록 도와주는 길라잡이로 본문이 대단히 중요한 본문이라고 생각하며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본론) 본문 여행을 떠나십시다. 아닥사스다가 바사를 통치하던 주전 445년 11-12월 즈음에 왕의 경호실장이라는 자리에 등극하며 식민지 3세대 백성치고는 출세에 가도를 달리던 입지전적인 인물인 느헤미야가 자신의 선조들이 살았던, 그러니까 느헤미야의 원뿌리인 예루살렘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하나니가 보고한 보고는 절망의 보고였음을 나누었습니다. 보고를 받은 느헤미야는 아픈 마음으로 금식과 통회 기도를 통해 조국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까를 무려 4개월 동안 고민하며 준비했습니다. 그 증거가 본문 1절입니다.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느헤미야가 하나니의 보고를 받은 것이 기슬르 월이라고 했는데 이는 바벨론의 월력으로 11-12월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은 월력이 바뀌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재위 같은 해 니산 월으로 무대 시간이 변경되었습니다. 바벨론 월력으로 니산 월은 종교력으로 첫 달을 의미하는 3-4월에 해당하는 시기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산술적으로 느헤미야가 하나니의 보고를 받은 지 4개월 정도가 지난 시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니산 월 그 어느 날은 경호실장인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술을 따르던 날이었습니다. 그 날에 있었던 이야기를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본문 1-3절입니다.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 니산월에 나는 왕에게 술을 따르는 일을 맡았다. 왕에게 술을 따라 드리는 어느 날, 왕께서는 나의 안색이 평소와는 달리 좋지 않은 것을 보시고는 "안색이 좋지 않구나.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무슨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나는 너무나도 황공하여 "임금님, 만수무강 하시기를 빕니다. 소신의 조상이 묻힌 성읍이 폐허가 되고 성문들이 모두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듣고서, 울적한 마음을 가누지 못한 탓입니다" 하고 아뢰었더니” 우리는 2-3절에서 느헤미야가 지난 4개월 동안 어떤 자세로 살았는지 본문을 통해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4개월 동안 한 가지에 집중하며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1:11절을 나누면서 느헤미야가 집중했던 기도를 발견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주님, 종의 간구를 들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주님의 종들의 간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이제 주님의 종이 하는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하여 주시고 왕에게 자비를 입게 하여 주십시오.” (표준새번역 느헤미야 1:11절 전반절) 그렇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왕께 구하면 왕이 나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금식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4개월 동안 곡기를 줄여가며 기도했으니 느헤미야의 몰골이 좋을 리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간절한 기도로 준비한 느헤미야의 기도가 어떻게 진전되었는지를 느헤미야 기자는 분명히 본문 4-8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은 표준새번역 성경으로 계속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왕께서 또 나에게 물으셨다. 나는 하늘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나서, 왕에게 말씀드렸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면, 임금님께서 소신을 좋게 여기시면, 소신의 조상이 묻혀 있는 유다의 그 성읍으로 저를 보내 주셔서, 그 성읍을 다시 세우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에 왕후도 왕 옆에 앉아 있었다. 왕은 "그렇게 다녀오려면 얼마나 걸리겠느냐? 언제쯤 돌아올 수 있겠느냐?" 하고 나에게 물으셨다. 왕이 기꺼이 허락하실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나는 얼마가 걸릴지를 말씀드렸다. 나는 왕에게 덧붙여서 말씀드렸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소신이 유다까지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유프라테스 서쪽 지방의 총독들에게 보내는 친서를 몇 통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또 왕실 숲을 맡아 보는 아삽에게도, 나무를 공급하라고 친서를 내리셔서, 제가 그 나무로 성전 옆에 있는 성채 문짝도 짜고, 성벽도 쌓고, 소신이 살 집도 짓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하나님이 선하신 손길로 나를 잘 보살펴 주셔서, 왕이 나의 청을 들어주었다.” 우리는 4-8절을 통해 하나님이 느헤미야의 기도에 완벽하게 응답하셨다는 사실에 열광하지만, 저는 그 이면을 더 중요시여기며 본문을 읽곤 합니다. 애통하고 금식하며 기도한 느헤미야의 그 몸부림의 과정이 아닥사스다에게 고하는 장면에서 보이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아주 단순하게 예루살렘으로 보내달라는 청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왕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것을 믿고 이후 사역의 내용까지 감당할 구체적인 프로젝트에 관한 청까지 준비했습니다. 얼마나 구체적으로 그리고 또 치밀하게 지난 4개월 동안 느헤미야가 영적으로 집중하며 준비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에게 요구한 내용을 조금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⓵ 유프라테스 서쪽지방을 다스리는 총독들에게 안전을 보장하는 친서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노정은 곳곳에 신변을 위협하는 물리적인 세력들이 존재했기에 안전한 여행길을 위한 군사력을 요구한 것입니다. ⓶ 왕의 삼림을 관리하는 아삽에게 예루살렘에 들어가 사역할 성벽재건에 소요될 재목들을 공급해 달라는 칙서였습니다. 당시 목재는 일반인이 구하기 어려운 건축 재료였기에 느헤미야의 요구는 대단히 탁월한 준비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왕에게 구한 느헤미야의 청이 어떤 결과물을 가져왔습니까? 본문 8절 하반절이 다음과 같이 보고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선하신 손길로 나를 잘 보살펴 주셔서, 왕이 나의 청을 들어주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치밀한 기도 프로젝트를 하나님이 기쁘게 여기셨기에 하나도 빠짐이 없이 응답해 주셨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은 느헤미야는 본인이 행했던 기도의 수고를 지웠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느헤미야의 영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본문이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왕에게 요청한대로 즉각적인 응답이 이루어지자 왕에게 요구했던 것을 곧바로 시행합니다. 9절을 봅니다. “왕은 나에게 장교들과 기병대를 딸려 보내어, 나와 함께 가게 하였다. 그래서 나는 길을 떠나, 유프라테스 서쪽 지방의 총독들에게로 가서, 왕의 친서를 전하였다.” 여기까지가 일사천리로 진행된 느헤미야 예루살렘 입성 과정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설교의 마지막 구절인 10절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오늘 주일 설교의 레마를 찾아내야 하는 구절입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노릇을 하던 암몬 사람 도비야에게 이 소식이 들어갔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의 형편을 좋게 하려고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서, 몹시 근심하였다고 한다.” 느헤미야의 프로젝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정상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입성을 방해하는 세력들이 기다리고 있었음을 느헤미야 기자는 10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입니다. 김근주 교수가 주석한 10절 관련 글을 소개합니다. “산발랏은 당시 바사제국의 강 서편에 속한 여러 지방 가운데 사마리아 지방의 총독이었고, 지금 느헤미야는 사마리아에 인접한 유다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한 상황입니다. 도비야는 유다 지역의 유지라고 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는 이해관계가 잘 맞아 떨어진 밀접한 관계였고, 유다 지역에 영향력을 미치며 사실상 유다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느헤미야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서 자신들이 여태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흔들리게 될까 봐 염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 성벽이 없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도리어 누구나 왕래할 수 있는 현재가 예루살렘의 독자적인 성보다 더욱 편했습니다.” (김근주,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기-구약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기”, 봄이다 프로젝트, 77.) 결국 산발랏과 도비야는 개인들의 사리사욕과 세속적인 유익을 위해 예루살렘을 유린하고 있었던 전형적으로 비틀어진 삶을 살고 있었던 자들이었습니다. 헌데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그들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염려했습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이들은 느헤미야 사역의 집요한 훼방꾼으로 보고됩니다. 하나님의 사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과 산발랏과 도비야가 보인 반응을 본문 10절은 절묘하게 대비한 단어를 사용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번에는 개역개정판으로 읽겠습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느헤미야의 사역 목표는 이스라엘 자손을 흥황하게 하는 것이었고, 산발랏과 도비야는 그 일이 진행되는 것에 대하여 몹시 근심했다고 서술합니다. 저는 이 해제에 대하여 오늘 설교 제목으로 풀고 싶었습니다. 느헤미야의 사역은 올곧은 일이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의 일은 비틀어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10절을 통해 얻게 되는 오늘 주일 설교의 레마는 설교 제목이 적확합니다. ※ 올곧음은 비틀어짐을 반드시 이깁니다. 2월 10일 성서일과를 묵상하면서 레마로 삼은 구절이 시편 119:6절이었습니다.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개역개정판 번역입니다.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주님의 교훈에 미치지 못하여 내 삶을 후회하는 일은 없었을 것을” (메시지 119:6) 모든 계명에 주의하는 삶을 유진은 ‘주님의 교훈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지 않는 것’으로 적용한 것입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영어성경의 고전인 RSV 번역은 시편 119:6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Then I shall not be put to shame, having my eyes fixed on all thy commandments.” ‘주님의 계명에 주의하라’는 구절을 ‘주님의 계명에 내 시선을 고정시킬 때’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이 구절을 오늘 설교에 국한하여 대입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주의 말씀에 시선을 고정하면 적어도 내 영적인 삶을 비틀어지지 않습니다. 주의 말씀에 시선을 고정하지 않으니까 비틀어지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대명제에서 자기의 시선을 놓지 않고 고정했습니다. 본문 4절에서 느헤미야가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아닥사스다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자 곧바로 자신의 요청을 왕에게 아뢴 것이 아니라 느헤미야는 잠시 하늘 하나님께 묵도했다고 했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위해 순간,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였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향하여 올곧게 서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이 몸부림은 곧바로 산발랏과 도비야에게는 근심거리로 적용되었던 것입니다. 목회라는 것은 하나님을 바로 보려는 올곧음이 비틀어짐을 이긴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역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견지하며 그 길이 외로운 길이지만 비틀어지지 않고 걷는 천로역정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이 땅에 존재하고 기생하는 일체의 것들이 비틀어져 살아가야 성공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무대라고 하더라도 유일하게 그 반대로 올곧음을 지키며 걸을 때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대안입니다. 성도란 21세기의 갈멜 산이라는 현장에서 세속적 가치가 크면 그쪽으로 빌붙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더 커 보이면 또 이쪽으로 빌붙는 비틀어짐을 수단으로 박쥐같은 삶을 사는 자가 아니라, 21세기 신 바알에게 결코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의 의인처럼 올곧게 사는 자들입니다. 목양터에서 제가 들은 말 중에 참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이 이야기였습니다. “목사님, 맑은 물에는 고기가 놀지 않습니다. 아주 가끔은 물이 더러워져야 고기 떼가 몰립니다. 가끔 대세에 따라 머리를 숙이는 것도 목회입니다.” 저는 제가 남보다 우월하고 깨끗하고 바른 정신을 갖고 있는 자이기에 별난 목회를 한다고 1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진흙탕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죗성으로 인해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시간들을 지내는 못난 목사 중에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끔 제가 투쟁하는 것은 성경이 기능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인데 성경을 기능으로 여기라는 종용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경은 기능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인데 기능으로 여기라는 압박에 굴복하는 것은 목사가 할 짓이 아니라 여겼기에 이 부분에서 물러나지 않은 것이 공격의 빌미가 되었다면 그건 받는 게 맞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유진 피터슨이 쓴 유고 글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서평을 써서 교회 홈페이지와 SNS에 올려놓았습니다. 서평에서 언급한 내용 한 대목입니다. 지난 주간, 유트브에서 장로교신학대학교에서 신약학을 강의하는 김호경 박사의 신학 대담 방송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그녀는 대담에서 이렇게 건드렸습니다. “설교자들이 성경을 너무 양심 없이 읽는 것 같다. 조금만 더 정직하고 솔직하게 성경을 읽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말들을 설교자들이 마구잡이로 내뱉는다. 바라기는 설교자들이 성경의 여백을 읽도록 했으면 좋겠다.” 나는 김 박사의 대담 멘트를 매 맞는 심정으로 들었습니다. 전혀 말씀을 말씀의 가치로 전하지 않고 기능으로 전하는 경우가 허다하여 성경을 예수 팔이 매개로 가치 하락 시킨 범죄를 설교자들이 저지르고 있다는 질책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치로 붙들고 있는 자들은 결코 성경을 기능이라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기능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을 올곧게 걷도록 만드는 유일한 본질적 가치라고 믿는 자들에 의해 비틀어진 것들을 바르게 펼 수 있도록 역사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우리 세인 지체들은 명심하고 날마다 마음에 새기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어떤 학교에서 크리스천 소녀와 생물 선생님이 고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고래는 몸통이 매우 큰 동물이지만 목구멍이 아주 작기 때문에 고래의 몸 구조상 고래가 사람을 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이 좋은 소녀는 교회에서 배우 것처럼 고래가 요나를 삼켰다고 주장했습니다. 약간 화가 난 선생님은 다시 고래의 몸 구조로 보아 고래가 사람을 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치열하게 맞서자 더 이상은 소녀는 논쟁을 피하고 싶어 이렇게 선생님께 대답하며 마치려 했습니다. “선생님, 이제 그만하시고요 이 일은 제가 하늘나라에 가면 요나에게 물어 볼게요?” 그러자 선생님은 교사의 권위를 갖고 약간은 비꼬는 투로 소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만약에 요나가 지옥에 갔으면 어떡할래?” 그러자 소녀는 선생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그건 선생님이 물어 보세요” 만들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읽다가 웃는 것으로만 마무리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젖어보았습니다. 요나 예언서는 성경에 기록된 정경 중에 욥기와 더불어 픽션 장르에 들어가는 글입니다. 그러니 소녀의 답이 신학적으로 옳은 것인가, 아닌가는 또 다른 신학적 담론의 문제이지만 한 가지는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말씀을 토대로 서려는 올곧음입니다. 이 올곧음은 이 땅에 존재하는 일체의 비틀어짐을 이기는 유일한 대안임을 명심하고 말씀의 밑에 들어가려는 올곧음을 지켜 나아가는 세인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저 죽어가는 내 형제에게 저 죽어가는 내 형제에게 생명을 주소서 흑암의 권세에 매여 내일을 빼앗긴 저들에게 저 소망 없는 텅 빈 가슴에 새날을 주소서 고통의 멍에에 매여 신음하고 있는 저들에게 아버지여 이 백성 다시 살게 하소서 묶였던 자 자유케 되는 영광의 날을 주소서 아버지여 이 나라 주의 것 되게 하소서 영원하신 하늘 아버지 다시 섬기게 하소서 메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부어주소서 아버지의 긍휼 주의 군대로 서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이제 불어와 아버지여 이 백성 다시 살게 하소서 묶였던 자 자유케 되는 영광의 날을 주소서 아버지여 이 나라 주의 것 되게 하소서 영원하신 하늘 아버지 다시 섬기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