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5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느헤미야 강해 2) 본문: 느헤미야 1:1-5 제목: 왜 느헤미야서를 읽어야 하는가? (2) 서론) 이정일 목사는 영문학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목회자입니다. 이런 이력이기에 한국교회에 문학적인 소양을 통한 명쾌한 복음을 증거 하는 몇 안 되는 목회자 중에 한 명입니다. 몇 해 전에 그가 쓴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원전 367년 『수사학』에서 사용했던 이 문장을 재인용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누구든지 화를 낼 수 있다. 그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올바른 대상에게, 올바른 때에, 올바른 목적으로, 올바른 방식으로 화를 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없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이정일, “시와 소설과 그리스도인”, 예책, 313, 재인용)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무던히 참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참지 못하는 자는 올바르게 화를 내는 방법을 모릅니다.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올바른 분노를 할 수 있으려면 인내하며 참는 법을 훈련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경험하셨던 한 실례를 나누어 보십시다.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예수께서 산헤드린 공회의 무리들에게 체포를 당하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일담(一談)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유다는 예수를 은 삼십에 팔고 제사장의 무리들과 함께 겟세마네에 진입합니다. 그리고 어두운 새벽이기에 사람들의 얼굴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을 감안하여, 미리 각본에 짜인 대로 유다가 예수님에 입을 맞추기 위해 예수님께 접근하자 무리들이 예수를 포위하기 위해 예수께서 둘러쌉니다. 이 긴장된 상태에서 베드로가 제사장의 하수인인 말고의 귀를 칼로 쳐서 떨어뜨리자 예수께서 떨어진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주시며 하셨던 말씀을 누가복음 22:51절이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개역개정판 번역에 기록된 ‘참으라’라는 번역은 원문과는 대단히 먼 의역입니다. ‘참으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아테’의 원 뜻은 ‘허용하다’ 혹은 ‘내버려두다’라는 의미입니다. 영어성경 NKJV(킹제임스버전 흠정역)에서 원뜻에 적절하게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것까지도 허락해라”(permit even this)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것’이 무엇일까요? 유다를 통하여 행해진 사탄적인 행태입니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배신한 행태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까지도 허용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지속적인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중요한 성경적 내증입니다. 우리는 오늘 느헤미야를 왜 읽어야 하는가? 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메시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느헤미야서를 왜 읽어야 합니까? 두 번째 여행을 떠나보십시다. 본론) 우리는 지난주일 첫 번째 강해를 통해 세스바살, 스룹바벨, 예수아라는 정치지도자들의 인도 하에서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간 지 약 50년 만에 하나님께서 남은 자로 인정하셨던 첫 번째 귀환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고, 그들을 통해 제 2 성전을 재건(주전 516년)하게 하셨음을 살폈습니다. 남은 자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그 일하심은 이렇게 일회적 일하심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차 포로귀환자들이 귀환한 이래로 80년 정도가 지난 주전 458년에 이번에는 학사 겸 율법학자인 에스라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두 번째 바사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1차 포로귀환자들이 주전 516년에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제 2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한지 58년이 지났는데도 유다는 독립하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백성들은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게 부어주실 것이라고 예언자 (학개와 스가랴)들이 말했던 장밋빛 청사진들이 전혀 성취되지 않자, 내심 영적인 실망감에 빠져 들었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흐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다시 영적 기초들이 흔들려 이방 여인들을 며느리로, 아내로 삼는 우상적 뿌리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패망 이전의 영적 붕괴의 길로 다시 가려는 조짐을 보이자, 하나님이 에스라를 일으켜 세우셔서 그와 함께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제사장 지파의 레위인들까지 차출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이 바로 2차 포로귀환이었습니다. 실제로 에스라의 귀환으로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유다 신앙공동체는 어느 정도 다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기에 이르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에스라를 귀환시켜 유다 공동체 영적 회복이라는 목적에 진일보하는데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은 에스라 귀환 이후 14년 뒤에 이번에는 바사의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고급관리였던 제 3세대 유대인인 느헤미야를 세 번째 예루살렘으로 보내는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이 느헤미야를 위시하여 세 번째로 바사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셨던 이유는 예루살렘 제 2성전을 비롯하여 예루살렘 성읍을 보호하는 성벽을 재건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성벽이 없어 주변 토후 세력들에게 무방비로 약탈을 당하고, 제 2성전 마저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는 위기 상황을 역전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이번에는 느헤미야를 사용하시며 일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 목적을 갖고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헤미야는 여러 가지의 방해 공작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벽 재건 사역을 시작한지 52일 만에 성벽을 재건하는 획기적인 승리를 만들어 내기에 이릅니다. 합동신학대학원의 현창학 교수는 이렇게 일하셨던 하나님을 다음과 같은 신학적인 의미로 설명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종교가 끝난 것은 큰 단절이요 죽음이었다. 특히 사람들 사이에는 하나님의 사랑도 이제는 끝이라는 좌절감이 팽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되었다. 죄로 인해 나라와 예배를 한꺼번에 잃어버리고 이국에 흩어져 선민 공동체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위험 속에서 살던 민족을 하나님은 한결같은 관심으로 돌보셨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살려내어 새 백성으로 회복시키신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서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뛰어넘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깊은 수렁마저 뛰어 넘어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알게 해주는 책이다.” (현창학, “두란노 How 주석-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라 느헤미야의 신학적 이해”, 16.) 이제 오늘 설교 제목에 담긴 질문에 두 번째로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끈질긴 사랑을 느헤미야 역사서가 말해 주기에 읽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바사 왕의 최측근으로 꽤나 성공한 피식민지 백성입니다. 왕이 먹는 술을 관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법 성공한 사람이 느헤미야입니다. 허나 느헤미야는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가 아니었습니다. 본문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1절에 기록된 역사적 연표는 분명해 보입니다.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기슬르월’이라는 연표는 주전 446년 11-12월을 말합니다. 이때 유다에 다녀온 ‘하나니’에게서 유다의 형편을 보고받습니다. 요약하면 유다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있다는 보고였습니다. 또 한 가지의 정보는 예루살렘 성이 허물어졌다는 보고와 성문들이 불에 탔다는 거의 재앙에 가까운 비극적 보고였습니다. 성경의 내증으로 볼 때 ‘하나니’라는 인물이 느헤미야의 형제라고 밝히고 있지만 하나니가 느헤미야의 친형제인지, 아니면 친척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느헤미야가 신뢰할 만한 관계를 맺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가 무슨 이유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고국 유다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유다의 형편에 대하여 느헤미야가 질문을 던졌는데 돌아온 대답은 절망과 염려가 포함된 아픈 보고였습니다. 큰 환란 중에 있고, 성문은 불에 탔고, 성은 허물어졌다는 보고였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주석적 작업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전적 지식으로 알고 있는 예루살렘의 패망과 성읍의 붕괴는 이미 수년 전에 일어났던 비극이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의 초토화는 바벨론 군사들의 말발굽에 짓이겨졌습니다. 그 시기는 주전 587년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활동하던 주전 446년과 비교해 볼 때 무려 140년 전에 일어난 비극이니 솔로몬 성전 파괴와는 전혀 관계없는 또 다른 비극을 보고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 비극이 어떤 사건을 염두 해 두고 한 기록인지 불투명하다는 점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출신 교회 후배 구약학자인 한영신학대학교 정석규 교수와 진솔한 대화를 나눈 뒤에 이 부분을 이렇게 정리해서 교우들에게 증거 하는 원고를 작성했습니다. 하나니가 느헤미야에게 보고한 비극적 보고는 주전 587년에 일어났던 예루살렘 성읍에 대한 악몽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트라우마에 대한 보고라고 정리했습니다. 정 교수가 힌트를 준 것이지만 대단히 큰 설득력이 있어서 동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라를 빼앗긴지 무려 14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모든 상황은 최악이었다는 영적 보고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 보고를 받은 느헤미야는 우리가 다음 주일에 보게 될 그 유명한 눈물의 기도를 4-11절에서 드리게 된 것입니다. 오늘 5절 본문만 잠시 읽겠습니다.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 두 번째 느헤미야 강해를 통해 다시 한 번 재 가다듬어야 하는 영적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통하여 끈질긴 사랑의 행위를 행하신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에게 포기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스바살과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어 에스라를 사용하셨고, 느헤미야를 드셨습니다. 하나님은 학개와 스가랴 예언자를 동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스라와 느헤미야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기명과 익명의 남은 자를 사용하셨습니다. 왜 이들을 사용하셨습니까? 내가 유다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속성인 사랑으로 유다를 포기하지 않고 돌보시는 과정을 느헤미야서를 통해 우리 독자들에게 강하게 역설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흐느끼는 감동을 받게 됩니다. 세스바살과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사용하셨던 하나님, 에스라를 사용하셨던 하나님, 느헤미야를 사용하셨던 하나님, 그리고 학개와 스가랴 예언자를 동원하셨던 하나님은 1%의 예외 없이 오늘은 우리 세인 교회 지체들을 사용하시면서 당신의 사랑을 이루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주 월요일에 김기석 목사를 만났습니다. 정말로 오랜만에 대면해서 만나 뵌 김기석 목사는 이전에 보았을 때에 비해 많이 육체적으로 쇠잔해 보였습니다. 이번에 출간된 제 졸고를 드리는 자리에서 이런 저런 자문을 받으면서 행복한 교제의 시간을 갖고 돌아왔습니다. 기실, 펜데믹 3년 동안 매스미디어를 통해 김 목사께서 행하셨던 가장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신학의 지평 안에서 전했던 메시지들은 근본주의적인 폐쇄집단 쪽에 있는 자들에게는 공격의 표적이 되었고, 생각보다 비인간적인 인신공격에 시달리며 많은 상처를 받은 게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도 인간인지라 생각보다 큰 심리적, 영적 데미지에 시달리게 된 것이 사실이고, 그로 인하여 육체적으로도 많이 상한 상태임을 만남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을 통해 내 스스로 적지 않은 위로와 감사를 경험했던 것은 육체적으로는 혼자 감당하기 건사하기 어려운 심각한 나약함으로 많이 후패한 상태였지만, 흔들리지 않는 영성의 꼿꼿함이었습니다. “소모적인 투덜거림을 그치고, 지금 해야 할 일을 묵묵히 감당하다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김 목사님의 이 권면이 나를 전율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약한 김기석 목사를 사용하시면서 내 사랑하는 한국교회에 적지 않은 신앙의 시금석을 제시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이렇게 정리하면서 설교를 맺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도 하나님께서 지금 당신이 세우신 수많은 피조의 세계를 위해 끈질기게 사랑하시면서 사용하고 계실 것이라는 확신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적어도 이 사랑의 밀어를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8:31-34절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서를 통하여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끈질기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서를 통하여 내가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계속 말씀하실 것입니다. 귀를 기울이십시다. 저와 여러분의 주군이신 하나님의 이 신실하신 사랑의 약속을 이번 느헤미야 강해를 통해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 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란을 면케 하시니 그가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