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상식을 존중하는 교회(3)
본문: 누가복음 17:11-19
서론)
제가 흔히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때에 따라 곧잘 사용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저력(底力)이라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단어는 이 한자 단어의 순수한 우리말입니다.
바로 ‘밑힘’입니다.
밑힘이 있는 사람은 쓰러져도 다시 일어섭니다.
마치 오뚝이와 같은 모습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같은 신앙인에게도 이 밑힘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밑힘은 과연 무엇일까요?
나는 이것을 신앙의 ‘가나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기본기입니다.
우리나라 피겨를 세계적인 무대에 올려놓은 김연아 선수의 글을 읽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1년에 300일 가량을 훈련했다. 일요일을 빼고는 거의 매일 연습한 것이다. 하루에 어림잡아 100회 이상 점프 훈련을 하는데 그때마다 수도 없이 엉덩방아를 찧어보았다. 엉덩방아를 찧으면 허리, 손목, 무릎까지 부상을 입는다. 때문에 연습이 끝나면 온 몸이 쑤시고 골병이 든다. 하지만 어김없이 연습장을 찾았다. 힘들고 절망스러운 길이었지만, 그 절망의 순간은 극복하고 한 걸음 더 전진하기 위해서였다.” (김이율 엮음, “가슴이 시키는 일”, 판테온하우스, 38)
세계 정상에 선 자들은 탄생하지 않고 만들어진다는 누군가의 말이 절절하게 들리는 대목입니다.
토트넘 홋스퍼에서 활약하고 있는 손흥민 선수를 키운 그의 아버지 손웅정 감독이 아들을 축구 스타로 만들기까지 이루었던 과정을 그가 쓴 책 제목이 한 문장으로 일갈합니다.
쓴 글 제목이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입니다.
아들 손흥민이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가 될 수 있었던 이유를 혹독하게 시켰던 기본기 훈련이라고 적시한 손 감독의 일설은 오늘을 살면서 벼락 스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쓴 소리가 될 것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모든 것이 기본에서 시작된다는 말에 누가 이 명제에 토를 달 수 있겠습니까?
이 명제는 단순히 운동 종목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도 전혀 예외가 아닙니다.
신앙생활도 시작은 기본기 설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대단히 적절한 기사입니다.
본론)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노정 중에 일어난 기사를 누가가 기록한 메시지가 본문입니다.
특이한 것은 이 기사는 소위 말하는 공관복음서 중에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이 말은 이 기사가 의사였던 누가만이 기억하고 있었던 주님께서 행하셨던 질병 치유의 독특했던 사례임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중간 사이로 지나가시는 중에 한 마을에 도착하셨습니다.
그곳이 어디인지를 누가는 확실히 밝히지 않고 한 마을이라고 기록했는데 이유는 그 게토에 거주하고 있었던 자들이 원수지간, 혹은 견원지간으로 지냈던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의 구분을 무색하게 하는 나병 환자 집단 거주지였다는 점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천형으로 여겨지던 나병 환자들의 게토 집단은 인종 차별적인 위계가 있었던 지역이 아니라 ‘너’와 ‘나’가 그냥 하나였던 집단이었습니다.
서로를 위로하던 공동체 지역이었습니다.
이들은 건강한 무리들과는 떨어져 있는 곳에 살아야 했습니다.
유대도, 사마리아인도 믿고 있었던 율법에 따른 사회적 합의에 따른 일이었을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나오는 한 단어가 이 정서를 전제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합니다.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그들이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기에 멀리 서서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소원은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이 갖고 있었던 질병 치유였습니다.
누가복음 5:12절 이하를 보면 예수께서 이미 가버나움에서 한센 병자를 고치셨던 일이 있었기에 예수에게 붙어 다니는 레테르는 나병도 고친 능력자라는 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 등장하는 10명의 나병 환자들은 예수가 그들의 질병을 고쳐줄 수 있는 적임자라는 인식이 팽배했을 것이고, 그들은 그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것입니다.
가까이 만날 수는 없었던 예수였지만 그들은 예수의 청각에 의지하여 소리를 질러 구원을 요청한 것입니다.
13절입니다.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이 외침에서 주목할 단어는 ‘선생님’이라는 단어입니다.
10명의 나환자들이 인식했던 예수는 ‘선생’이었습니다.
선생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 ‘에피스타테스’는 누가복음 5:5절에 기록된 것처럼 베드로가 첫 번째 소명을 받았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르던 첫 번째 호칭입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명령을 받고 순종하여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은 뒤, 베드로가 주님을 부른 호칭은 ‘큐리오스’ 즉 ‘주’였지만, 그 이전에 베드로가 갖고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가치가 나보다 조금은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정도의 ‘에피스타테스’ 즉 ‘선생’이었기에 그렇게 호칭했던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10명의 나병 환자들도 예수님을 선생의 가치로 이해했다는 것은 신앙적인 의미에서 낙제점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반전이 일어납니다.
주님은 그들의 소리에 반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14-15절은 오늘 설교 텍스트 중에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고 할 정도 중요합니다.
14절 주석을 경청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이 구절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중요한 해석상의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제사장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했을 때, ‘가라’는 헬라어 단어 ‘포류쎈테스’는 시제가 과거분사입니다.
반면 나병환자들이 주님의 명령을 받고 제사장에게로 ‘갔다’는 단어 ‘에피데이케테’라는 동사는 시제가 현재 시제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누가가 기록한 본문 정황 중에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데 나병환자들이 제사장으로 가는 도중에 그들이 병 나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보고한 내용입니다.
다시 14절 후반절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그렇다면 이런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때, 10명의 나병 환자 그들의 몸에 전혀 치유의 흔적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제사장에게 갈 때의 어느 정도의 상황까지 그들의 몸은 썩고 있었고, 피고름으로 진물이 나고 있었던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나병 환자들은 제사장에게로 갔다는 반응은 대단히 놀랍고 충격적인 신앙의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질문에 대한 답에서 우리는 신앙의 기본기가 무엇인지를 발견합니다.
※ 이해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순종이 신앙의 상식이자 기본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기본기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한 순종부터 시작됩니다.
레위기 14:1-9절을 보면 율법 중에 정결 예식 내용 하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나병 환자들의 치료에 대한 율례입니다.
이 율례에 따르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 일원들의 나병 치유 선언은 유일하게 제사장만이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10명의 나병 환자들은 제사장을 만나기 위해 동선을 옮긴 것입니다.
그런데 설명했듯이 그들이 길을 가는 도중에 나병이 고침 받았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예수에게서 하명을 받은 시점에는 그 어떤 치유의 징조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은 놓치지 말아야 할 팩트입니다.
재론하지만 나병환자들에게 어떤 치유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이 제사장이 있는 곳으로 길을 떠났다는 것은 한 가지의 사실 말고는 설명 불가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지만 주님의 하명이기에 믿고 순종한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상식이라는 단어를 쓸 때 상식의 사전적인 정의는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 일반적 견문과 함께 이해력, 판단력, 사리 분별 따위가 포함된다.”
대단히 적확한 상식이라는 단어의 정의이며 해석입니다.
저도 별 이견을 달 수 없을 정도의 정확한 이해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분에서 신앙적 상식은 세속적 상식과 그 수순을 같이할 수 없는 면이 있다는 점입니다.
무엇일까요?
주님의 어록에 대한 이해 부분입니다.
주님의 어록들은 대부분 세속적인 상식과 충돌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셨던 말의 내용들은 일반적인 상식을 뒤집어엎습니다.
신앙인은 세속적 상식과 말씀에 대한 상식이 충돌할 때, 주님이 행하셨던 말씀에 대하여 순종하는 것이 신앙의 기본기입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상식은 하나님의 식입니다.
하나님의 식이 무시되는 상식은 철저한 인본주의적인 상식입니다.
상식을 존중한다고 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이 옳다고 믿는 상식을 의미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순종이라는 메시지에 결부시키는 구절을 말하라고 한다면 요한복음 2장에 기록된 가나 혼인 잔치에서의 순종입니다.
요한복음 2:7-8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 이 구절이 큰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다시 한 번 은혜를 추슬러야 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져 화가 나 있는 사람들에게 물을 떠서 갖다 주라는 명령에 순종한다는 것은 기름을 들고 불속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제시한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이어진 요한복음 2:9-10절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주님의 식은 언제나 이론을 뛰어 넘습니다.
도대체 연회장의 하인들은 무슨 힘으로 물을 떠나가 연회장의 하객들에게 전달했습니까?
한 가지 중요한 힌트가 요한복음 2:5절에 담겨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신앙의 기본기는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의 주체가 주님이라는 것을 전제할 때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신앙인들이 가져야하는 영적 상식입니다,
10명의 나병 환자들은 분명히 순종하는 신앙의 기본으로 인해 지긋지긋한 천형의 사슬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나병에서 해방된 자들의 동선을 본문 15-19절까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너무 익숙한 메시지이기에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지만 본문이 본문인 만큼 부연해 보겠습니다.
10명이 동시에 나병에서 고침 받는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에게까지 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해졌습니다.
특히 누가는 10명 중에 사마리아 출신의 환자 한 명이 제사장에게로 가던 길을 돌아서서 주님께서 갔다고 적시했습니다.
사마리아 출신의 고침 받은 환자는 주님께 돌아와 다음과 같이 반응했습니다.
다시 본문 16절입니다.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유진 피터슨 목사는 이렇게 이 구절을 번역했습니다.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를 몰랐던 그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마크 뷰캐넌 목사의 이 구절 해설을 전에 말씀드렸지만 한 번 더 복기하겠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문둥병 환자가 깨끗해진 후에 다시 예수께 돌아오는 것을 예배라고 평했다. 나는 좀 더 나아가 그것이 거룩한 삶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다. 경계 지역에는 전에 문둥병 환자였다가 깨끗해진 자들, 그러나 예수께서 명하신 길을 결코 걸어가지 않는 자들, 그래서 마치 퇴역 군인들이 전투 경험담을 나누듯, 예수님을 만났던 날과 그분께 씻음을 받았던 날의 향수에 젖어 사는 자들이 득실거린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던 날과 그분께 씻음을 받았던 날, 그들을 온통 휘저어놓고 확신을 주던 믿음, 그들의 입으로 내뱉었던 믿음을 하루하루, 한 걸음 한 걸음 지속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다시 예수께 돌아오는 경이로움에 붙잡히는, 찬양하고 감사하는, 새로 얻는 힘을 온전히 이용하여 그들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거룩한 습관을 배양하지 않은 자들이다. 그들은 후에 제사장에게 몸을 보였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대제사장의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을 그만 잊고 말았다.”(마크 뷰캐넌, “열렬함”, 395-396)
나는 루터와 뷰캐넌의 일갈에 대해 동의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 은혜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 것이 바로 신앙의 상식이며 기본기입니다.
전주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장로님이 우리 교회에 처음 방문했을 때, 제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목회 철학 중에 제 일로 뽑는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타적인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질문한 장로님이 곧바로 반응했습니다.
“제가 수많은 교회를 다니면서 목사님께 드린 질문을 모든 목사님께 드렸는데 이 답을 하신 분은 목사님이 처음입니다.”
여러분은 이타적인 교회로 서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여러분의 교회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까?
교우 중에 한 분이 제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뜨거운 신앙을 갖고 있는 신자는 아니지만, 목사님이 전하는 매 주일 말씀을 들으면서 목사님이 결코 물러서지 않으려는 복음의 본질외의 것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그 거친 메시지에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보를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여러분은 복음의 본질 외에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으려는 강단 메시지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신학교 교수로 있는 친구가 제가 사고로 인해 주일 강단을 서지 못하고 회중석에서 예배를 드릴 때 주일 설교를 대신 감당해 주면서 했던 메시지를 오롯이 기억합니다.
“여러분의 교회의 장점은 극단의 상업주의적인 교회와는 매우 극명한 차이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균형을 잡으려고 하는 데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는 교회라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교회 예배가 상업주의적이고 인위적이지 않은 목회를 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점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새벽에 교우들이 나와 큐티 사역을 마치고 중보 하는 시간을 매일 갖고 있습니다.
나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지만, 바로 그 시간 여러분의 문제를 갖고 내 문제인 양 중보 하는 지체들의 엎드림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 등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체가 당시 제게 했던 말을 아픔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제천세인교회는 이강덕 목사가 은퇴하면 도대체 무엇이 남을까 고민하게 하는 교회입니다.”
세인교회가 이강덕 담임목사의 교회입니까? 아니면 여러분 모두의 교회입니까?
여러분은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를 정말로 내 교회로 사랑하며 감사하고 있습니까?
신앙인의 기본기는 감사를 감사로 여기고 잊지 않는 영적 상태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가 예수께로 다시 돌아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사례했던 사마리아 출신의 고침 받은 환자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상식을 존중하며 지켜가는 삶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이제 저는 오늘 설교를 끝으로 금년도 우리 교회 표어와 관련한 주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설 명절이 끝나면 말씀드린 대로 에스라와 느헤미야 강해 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또 다른 은혜가 기다리고 있겠지만 2023년, 우리 세인교회가 신앙의 상식을 존중하는 교회로 다시 잘 서 갈 수 있기를 소망하고 기도해 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주 발 앞에 무릎 꿇고 그 사랑에 나 안기네
어떤 말도 그 어떤 소리도 그 발 앞에서 잠잠해지네
주 나의 사랑 그 발 앞에 앉아
내 모든 기도는 사랑의 노래가 되네
주의 옷자락 만지며 주의 두 발을 씻기며
주님 그 발에 입 맞추며 나의 왕관을 놓으리
주의 옷자락 만지며 주의 두 발을 씻기며
주님 그 발에 입 맞추며 나의 왕관을 놓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