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낮예배

제목상식을 존중하는 교회(2)2024-03-07 17:01
작성자 Level 10

2023년 1월 8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제목상식을 존중하는 교회(2)

본문요한복음 21:9-14

 

서론)

 

지난 카타르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우승을 했습니다.

이 우승을 두고 많은 언론에서 이렇게 대서특필했습니다.

메시의 대관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본인의 소속팀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고남미의 작은 월드컵이라고 하는 코파 월드컵에서도 우승을 했지만유독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 메시였기에 이번 월드컵 우승은 메시에게 마지막 남은 퍼즐 하나를 맞춘 최고의 월드컵이 된 것입니다.

나같은 축구에 대한 문외한도 메시라는 축구선수가 얼마나 엄청난 기량을 갖고 있으며뛰어난 선수인지를 아는 것을 보면 메시는 펠레 이후 최고의 축구 선수라는 명칭이 부끄럽지 않은 선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누가 보아도 완벽했던 메시를 위한메시에 의한메시의 월드컵이 이번 카타르 월드컵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눈에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옥의 티가 메시에 의해 자행되었습니다.

준결승전에서 나온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무례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례함의 한 복판에는 메시가 있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준준결승 상대는 네덜란드였습니다.

전후반 90연장 30분 총 120분에 걸친 혈투를 벌였지만 2:2로 승부를 가리지 못한 두 나라는 승부차기를 벌려 승패를 결정 지었습니다.

결과는 4:3 아르헨티나 승리였습니다.

문제는 승리를 거둔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좌절하고 있는 네덜란드 선수들 앞으로 가서 비아냥 세리모니를 하고 경기 후 메시가 기자 존에서 인터뷰를 하였을 때 그의 무례함은 극에 달했습니다.

경기에서 2골을 성공한 네덜란드 선수인 베흐 호르스트가 회견이 끝나면 존경하는 메시와 유니폼을 바꾸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인터뷰가 진행되고 있는 그 시간그를 본 메시가 이렇게 공격했습니다.

뭘 봐멍청아가던 길 계속 가기나 해꺼지라고.”

그는 이번에 카타르 월드컵 우승으로 영웅으로 등극했고더불어 펠레 이후 최고의 선수로 역사에 남을 것이 분명해 졌습니다.

하지만수많은 생각하는 지성인들에게 메시는 인격이 덜 된 승리한 패배자로도 기록될 것도 분명합니다.

아름다운 승리자는 패배자를 안아주는 자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배려라고 말합니다.

이 배려는 그리스도인들도 가져야 할 상식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그 의미가 너무나 깊은 메시지라 교우들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본문입니다.

집중하여 경청해 주시기를 바라며 성령께서 만지셔서 메시지가 주는 은혜를 배나 더하시기를 기도하며 말씀을 전합니다.

본문 14절을 읽겠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본문 21장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것임을 본문 기자가 제시합니다.

도마가 없었던 다락방에서 한 번도마가 있었던 다락방에서 또 한 번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또 한 번이니까 총 세 번째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네 번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에게 무덤에서 나타나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 제자들에게 현현하신 것은 본문이 세 번째입니다.

주목할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장소가 예루살렘이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배경은 디베랴 호숫가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그 크기가 너무 넓어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 졌습니다.

갈릴리게네사렛디베랴 등등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디베랴입니다.

로마의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헤롯이 헌물한 도시가 바로 디베랴입니다.

그 디베랴는 갈릴리 호수의 서쪽에 위치해 있는 도시였기에 갈릴리 호수의 서쪽 지역을 디베랴 호수라고 지칭했던 것입니다.

이런 지역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을 던져보려 합니다.

제자들은 왜 디베랴로 갔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추적할 수 있는 구절은 마가복음 16:7절입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주께서 부활하셔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행하신 말씀입니다.

혹자들은 그래서 베드로와 여타 다른 제자 6명이 디베랴로 갔던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해석의 다양성을 전제한다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밝히겠습니다.

요한복음 21:4절을 소개합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디베랴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의 영적 기상도입니다.

날이 새어갈 때이니 사물을 분별할 수 있는 시각적인 구도가 확보된 상태입니다.

캄캄해서 예수님인지 몰랐다는 이유는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더군다나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두 번이나 한 장소(다락방)에서 만났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고기 잡는 것에 열심을 내던 제자들은 바닷가 쪽에 서 있었던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21:4절을 조금 더 분석하겠습니다.

서셨으나로 번역된 헬라어 에스테는 시제로 과거입니다.

반면 알지 못했다의 번역인 알다의 헬라어 단어 에데이싼의 시제는 과거완료로 헬라어 원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해석을 제 마음에 가장 동의할 수 있게 해석한 이재철 목사의 해석을 소개하겠습니다.

주님께서 과거형으로 갈릴리 바닷가에 서 계시고’, 제자들은 과거완료형으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의미는 욕망의 바다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까마득하게 잊혀진 과거의 존재일 뿐더 이상 현재의 주님이 아니셨다는 의미였다.”(이재철사명자반홍성사, 131)

그렇다면 영적인 기상도가 이렇게 만신창이가 된 제자들이 갈릴리에 있는 디베랴로 가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명령하셨기에 갔다는 해석이 얼마나 무모한 해석인지 가늠하게 해 줍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디베랴로 간 이유는 사명은혜주님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그냥 옛 구습으로 후퇴한 퇴보의 결과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세밀한 본문 정황의 이해를 전제할 때본문은 저와 여러분에게 전율하는 감동을 선사합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망가진 제자들이 있었던 디베랴 호수로 주님은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곳에서 고기 잡는 일에 정신이 팔려 주님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제자들을 직접 만나주셨습니다.

허탕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명령하셔서 153마리의 고기를 잡게 해주셨습니다.

이윽고 예수님인 것을 안 제자들과 육지로 올라온 주님은 숯불이 있는 곳에 가셔서 떡과 잡은 생선을 굽고 있는 것을 아시고 생선을 가져오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더불어 제자들에게 아침을 같이 먹자고 제안하셨고떡도생선도 그들에게 나누어주시며 식탁공동체를 통해 교제하셨습니다.

식탁공동체를 통해 교제를 마치신 주님은 드디어 베드로에게 그 유명한 두 번째 미션을 주시는 장면이 요한복음 21:15-19절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제자들에게 디베랴에서 행하셨던 일체의 행동을 보면서 너무 또렷한 주님이 실천하신 상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 ’ 방식이 아닌 의 방식으로 제자들을 배려하셨다는 점입니다.

 

주님은 2-3년 정도 당신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먹고 마신 제자들에게 싸늘하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마가복음 14:50-51절을 소개합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이 구절에 등장하는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르다가 발각되자 너무 급하고 두려운 나머지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한 자가 마가복음의 저자로 여겨지는 요한 마가라는 점을 전제할 때제 제자군이었던 12명의 사도들뿐만이 아니라제 제자군이었던 마가를 비롯한 잠재적 사도들까지 모두 다 예외 없이 주님을 배신했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치욕적인 배신이었고모욕적인 배신이었습니다.

가해자는 제자들이고피해자는 주님이셨습니다.

상황이 이 정도면 이제는 관계 끝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토록 처절하게 자기를 배신한 원흉들인 베드로디두모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도마나다나엘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그리고 익명의 제자들인 두 명까지 총 7명의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가신 것입니다.

더불어 배신의 원흉 격인 베드로에게는 두 번째 미션까지 주는 장면이 요한복음 21장에에 고스란히 증언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니까사랑의 메신저인 예수님이시니까 그럴 수 있다는 답으로 상투적 자리매김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다.

정말로 예수께서 어떻게 이런 대승적인 행위를 하실 수 있었을까요?

주님은 상식을 존중하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식입니까?

주님의 인격 안에 ’ 방식이 아닌 의 방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상대방 즉 제자들을 배려하신 것입니다.

사사들 중에 최악의 사사는 누가 뭐라 해도 삼손입니다.

혹자들은 우리들을 이렇게 마비시켰습니다.

삼손이 사사로 부름 받아 잠시 실수하는 바람에 머리털이 뽑히고 힘을 잃어 두 눈까지 잃어버리는 아픔을 당했지만그는 회개하여 힘을 되찾고 다시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 받아 블레셋의 다곤 신전을 무너뜨리며 이스라엘을 구원한 최고의 쾌거를 이룬 사사라고 평가하며 우리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코 속아서는 안 됩니다.

삼손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최악의 인간이었습니다.

그의 첫 번째 단추 잘못 꿰기의 본문이 사사기 14:3절이 고발합니다.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하나님은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삼손을 세우셨습니다.

그는 블레셋의 한 지역이었던 딤나로 내려갑니다.

하지만 얼토당토않게 그곳에서 한 여자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말합니다.

내가 한 여인을 사랑하니까 그녀를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삼손의 부모들은 그가 나실인으로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반대를 합니다.

그러자 삼손이 물러서지 않고 떼를 씁니다.

14:3 후반절을 다시 읽습니다.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그래서 이 대목을 영어성경 NRSV에서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Get her for me, because she pleases me.”

나를 위해 그녀를 취하게 해주세요그녀가 나를 즐겁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번역의 의미가 무엇을 알려 줍니까?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민족을 구원해야 하는 의미를 망각하고 여자를 정욕의 대상으로 보고 그 여자를 아내로 삼으려고 했다는 말입니다.

삼손의 실패는 철저히 그가 자신의 방식으로 모든 일을 해석하려고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가 단 한 번이라도 부모의 방식으로 혹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건과 사고를 이해하려고 했다면 그는 적어도 최악의 사사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배려는 ’ 식이 아닌 의 식으로 범사를 이해하는 것이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디베랴 호숫가에서 단 한 마디도 제자들을 질책했다는 흔적이나 어구를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도리어 요한복음 21장 전체에 흐르고 있는 기운은 두려워하며 죄책감으로 인해 무겁게 짓눌려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안아주시고 배려하시는 지극히 인격적인 상식을 지키시는 주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8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으니까 잊을 때도 됐다고 세월호 이야기만 나오면 경기(驚氣)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픔을 되새길 때마다 찾아오는 가장 비인간적이며 사탄적인 일이 잊어지지가 않습니다.

아들딸이 차가운 바닷가에서 수장되는 그때를 생각하며 살아있는 것 자체가 고문인 삶을 살고 있기에 정확한 사건의 경위와 책임자들을 향해 문책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유가족의 텐트 앞에서 치킨을 배달시켜 환장한 듯이 먹어치우던 일베라는 이름의 정신병자들이 걸려 있었던 질병이 무엇이었습니까?

배려라는 단어와는 담쌓은 양심 마비라는 극단적 이기주의라는 코마였습니다.

지난 주간 읽었던 책에서 이 글을 발견했습니다.

눈물은 머리의 것울음은 온 몸의 것이다.” (고진하와 51희망그 빛깔 있는 삶의 몸부림꽃자리, 56.)

읽다가 이런 생각을 감히 하게 되었습니다.

배려는 같이 우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이렇게 갈파한 것입니다.

로마서 12:15절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김기석 목사가 오래 전에 그의 글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참된 자기로부터도 멀어진 사람입니다일쑤 거짓 자아’(false ego)를 참 자기’(true ego)라고 여기며 사는 자입니다.” (김기석,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꽃자리, 58)

기가 막힌 성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금년 표어에 대한 두 번째 제목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춘향가에 나오는 어사또 이몽룡이 탐관오리의 원흉이었던 변학도의 잔칫상에서 읊었던 그 유명한 시조 한 편 나누면서 설교를 맺겠습니다.

 

金樽美酒 千人血(금준미주 천인혈)이요玉盤佳肴 萬姓膏(옥반가효 만성고)

燭漏落時 民淚落(촉루낙시 민루락)이요歌聲高處 怨聲高(가성고처 원성고)

 

금술 잔에 담겨 있는 아름다운 술은 천 백성의 피요옥으로 만들어진 쟁반의 기름진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요촛불에서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도 떨어지고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더라

 

누구든지 내 방식에 서 있는 자는 오늘의 변학도 사또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시각은 언제나 이몽령의 시각에 서 있어야 합니다.

’ 방식의 시각이 아니라 의 방식의 시각 말입니다.

이 시각이 없이 한국교회의 회복은 없습니다.

더불어 나의 회복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상식은 언제나 ’ 방식이 아닌 의 방식으로 배려하는 상식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 된 사람인가

간교한 나의 입술이요 오더러운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 수 없는가

오늘(오늘나는(나는오늘(오늘나는(나는)

주님 앞에서 몸 둘 바 모른 체 이렇게 흐느끼며 서있네

어찌할 수 없는 이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