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 목요일 성서 일과 묵상 아합은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저 길로 가니라 오늘의 성서 일과 시편 32:12-22, 창세기 2:4a-7, 열왕기상 18:1-15 꽃물 (말씀 새기기) 열왕기상 18:6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마중물 (말씀 묵상) 아합 치세 중, 북 왕국 이스라엘의 불어닥친 가뭄이 3년을 강타했다. 아합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통치를 하고 있었을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아주 오래전에 나는 사람들이 회자시키던 이 상용어로 인해 목사라는 직을 갖고 사는 사람으로 자괴감이 엄습해 힘들었던 적이 있다.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야!” 개인적으로 자문해 보았다. 3년 동안, 북쪽을 휩쓸고 있는 가뭄이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의 결과물이라고 아합은 생각했을까? 순전히 개인적 소회이기에 주관적일 수는 있겠지만, 아합은 악녀 이세벨의 영향하에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암묵적으로 묵인한 바알리즘을 숭배하게 한 공범자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아합의 내면에는 야훼 신앙에 대한 정서적 여백을 갖고 있었기에 작금 자신이 통치하는 북쪽에 몰아닥친 가뭄의 원인 제공자가 자신일 수 있다는 두려움이 아합의 그늘진 마음의 후미에 있었을 것으로 나는 추론한다. 그러기에 아합은 자신의 통치 영역에 임한 심각한 자연재해가 자기의 죄악 때문이라고 심증적으로 동의했을 것이고, 엘리야를 만나 뭔가 해결의 실마리를 풀고 싶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합은 야훼 신앙인이었던 내각 참모 오바댜를 불러서 물을 낼 수 있는 근원을 찾아보자고 독려했고, 두 사람은 북쪽의 생사가 걸려 있는 물 찾기에 나섰다. 이 보고를 적시한 오늘 성서 일과의 한 구절이 내게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두 사람이 두루 다닐 땅을 나누어 아합은 홀로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홀로 저 길로 가니라” (6절) 이 구절에 대한 문자적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두 패로 나뉜 아합과 오바댜의 국가적 권력들이 물 근원을 찾기 위해 모든 공권력을 동원하여 사활을 걸고 몸부림쳤다는 보고일 것이기에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구절에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아합의 치세 기간은 야훼 신앙을 무시하던 랜덤의 시기였기에 아합의 길은 대세의 길이었지만 하나님과 관계없는 길이었다. 반면 오바댜의 길은 발견되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고통스럽고 외로운 비주류적 신앙의 길이었지만 그 길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길이었다. 이 두 길은 같은 길이 아니다. 전혀 다른 길이다. 나는 이 두 사람의 길이 갈라졌다고 표현한 오늘 성서 일과 묵상에서 전율하는 감동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이 걷는 길이 편한 길이어서야 되겠는가? 승승장구하는 길이어서야 되겠는가? 성공의 성공을 거두며 희희낙락하는 길이어서야 되겠는가? 안전한 너무나도 안전한 길이어서야 되겠는가? 주군이 그런 길을 걷지 않으셨는데. 오바댜가 걸었던 길은 아합이 걸었던 길과는 반대의 길인 것이 맞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이 성서의 구절이 오늘을 시작하는 내 삶의 출발점에서 오롯이 성큼 다가온다. “아합은 이 길로 가고 오바댜는 저 길로 가니라” 세속적 야망과 성공의 길은 같이 걸을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길이다. 오늘 성서 묵상의 레마다. 두레박 (질문) 내가 걷고 있는 길에 하나님이 함께 걷고 계신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힘들지만 주님이 선택하여 걸으셨던 그 길을 나도 걷게 하옵소서. 포기하지 않고 걷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아합이 걸었던 길과는 반대의 길로 걷자. 흔들리지 않는 지성적 영성으로 계속 걷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5월 16일 아침입니다. 하나님, 이 땅이 다시는 군홧발에 짓밟히지 않는 진정한 민주적 나라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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