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all about happiness2024-06-11 09:48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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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김아름
ㆍ출판사 김영사
ㆍ작성일 2020-04-04 18:42:53

 

김아름이 엮은 “all about happiness” (김영사 간, 2019년)를 읽고 


철학자 탁석산 선생이 폐부를 찌르는 말을 남겼다.

“현대의 여명기를 즈음하여 대부분의 남녀들에게 하나님이 행복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행복이 우리의 신이 되었다.” (탁석산,“행복 스트레스”, 창비, 2013년, p,66.)

목사로 살면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최대한 자제했다. 이유는 교회 공동체 안에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사는 지체들보다 그 반대의 여백에서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교우들이 많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해서 역설적이게도 난 행복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줍지 않게 목사라는 이름으로 거창하게 행복론을 강의하려고 하지 않았다. 행복은 그렇게 쉽게 정의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에.
오프라인 서점에 들르면 서고 한 면에 너무나 많은 행복 교과서들이 차고 넘치는 것을 쉽게 본다. 그럴 때마다 두 가지의 생각이 스친다. 이 사회가 너무 불행한가? 행복에 대한 갈구가 이렇게 많은 걸 보니. 또 하나, 책에 기록된 대로 살면 행복해질까? 대답으로 어느 것 하나를 꼭 집어서 바로 이거야! 라고 말하기가 불편하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김아름 작가가 쓴 ‘all about happiness’를 독서 목록에 올리기 위해 지인을 통해 추천을 받은 이 책 읽기를 처음에 망설였던 것은 앞에서 언급한 이런 저런 이유 때문이었다.
11명의 마음 주치의(작가의 표현)를 찾아가 인터뷰를 한 내용을 작가만의 세밀한 필체로 가다듬어 낸 책이 ‘행복에 관한 모든 것’이다. 11명의 마음 주치의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심리학자와 정신과 전문의들이다. 작가는 1년이라는 시간, 그들을 방문하여 행복에 대해 물었다. 작가는 이렇게 11명에게 행복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결과 주목해야 하는 한 단어가 모든 전문가들의 입에서 공히 나왔다고 밝힌다.
“관계”였다, (p,250)
전문가들이 이렇게 한 단어를 공통분모로 제시한 것에 대하여 작가 스스로도 대단히 긍정적인 동의를 하게 했다고 책에 적시했다. 그렇다. 행복은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책을 읽다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행복을 연구한 연대 심리학 교수인 서은국 박사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행복의 핵심을 한 장의 사진에 담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이다. 문면에 묻혀 살지만, 우리의 원시적인 뇌가 여전히 가장 흥분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다. 음식 그리고 사람, 행복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모든 껍데기를 벗겨내면 행복은 결국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요약된다. 행복과 불행은 이 장면이 가득한 인생 대 그렇지 않은 인생의 차이다. 한 마디 덧붙인다면 나머지 것들은 주석일 뿐이다,(The rest are details.)”(p,67)
원론적으로 서 박사의 커멘트에 동의한 이유는 ‘나머지 것들은 주석일 뿐이다.’라고 정의한 소박함 때문이었다. 가끔 친구들과 만나면 농담조로 목회가 어려울 때 주고받는 자조 섞인 말이 있다.
“인생 뭐 있냐!”
가만히 뒤돌아보면 사람이라는 존재의 삶의 과정은 결코 길지 않은 인생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별 것 아닌 인생을 별 것인 인생으로 만들려다 보니 무리수를 쓰고, 욕심대로 살고, 그러다 보니 아귀다툼을 하고, 누군가를 짓누르고 하는 등등의 전혀 상식적인 일을 하며 인생을 아름답지 못하게 사는 것이 때늦은 후회의 공통분모들이다.
이런 삶을 살아온 자들이 자신이나, 타인과의 관계가 아름다울 리 없다. 관계가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결코 해피니스의 삶이 아닌, 언 해피니스의 삶을 살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본 서를 엮은 작가는 또 하나 행복이라는 바이러스를 먹고 살려면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음을 11명의 행복 전문가들과의 대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했다고 밝힌다.
“관계는 부모-자식, 친구, 직장 동료, 애인의 형태가 있는데, 사실 그 관계는 결국 자기와의 관계다. 자기를 믿고, 자기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고, 자기를 좋아하게 되면 남들이 좋아하게 되고, 남들도 자기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p,14) 
자존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라.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왜? 아마도 심리학적으로나, 정신분석학적으로 이 상태를 유지하는 사람의 건강성을 의심할 수 있는 여백은 그리 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평자 역시 이견 없이 동의한다. 문제는 이 자존감의 문제를 신앙적인 차원에서 해석할 때이다. 나는 나를 믿지 못한다는 말이 신앙적으로 옳다. 나만큼 불완전한 존재가 없기에 말이다. 아무리 점수를 후하게 주려고 해도, 나는 나를 신뢰하지 못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명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가치다. 나를 폄훼하는 일도 아니고,  내 스스로의 자존감이 없어서 언급한 급조한 발언도 아니다. 신앙의 여정 속에서 배운 분명한 교훈이다. 정신과 전문의 김혜남 교수가 말한 정신의학적인 차원에서의 충고를 수용한다고 말했다. 특히 이 지적은 대단히 예리하다.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라.”
딴지 하나 걸자. 목회를 하는 목사로 아주 냉정하게 나를 바라보는 일에 소홀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부했다. 인문학적인 소양의 결여는 대단히 천박한 사람으로 추락할 수 있음을 알고 집요하리만큼 인문학적인 독서와 공부 그리고 글쓰기에 천착했다. 일련의 이런 공부가 준 선물은 나를 깊이 뒤돌아볼 수 있는 객관화로의 접근이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풀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나는 나를 더 믿지 못하겠다.’ 는 성찰이다.
목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자의 한계라고 말하면 나도 할 말은 없지만 그렇다.
풀어야 할 숙제는 나를 더 존중하고, 객관화하고, 신뢰할 때 타인과의 관계가 건강해지고 결국 내가 행복해진다는 정신의학적인 접근과 영적인 내 자아에 관한 객관화 사이에는 건너야 할 갭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 질문은 철저히 개인적인 내용이다.
그만 일갈한다. 11명 전체의 행복론을 만나려면 서평에 의존하지 말고 책을 손에 들기 바란다.
코로나로 인해 많이 힘들고 지쳐 있는 지금, 김아름 작가가 엮은 ‘올 어바웃 해피니스’에 들어오면 적어도 행복함이라는 것에 대한 정체를 한 움큼 쥘 수가 있으리라 본다. 해서 기지개도 펴보고.
물론 목사인 나는 제기한 질문을 계속해서 질문하며 달려가려 한다. 사고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진짜 행복은 존재하지 않을 것을 믿기에 말이다.
그래도 탁석산 선생의 말이 가슴에 잔잔히 남는다. 왜? 난 목사니까.
 

“현대의 여명기를 즈음하여 대부분의 남녀들에게 하나님이 행복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행복이 우리의 신이 되었다.” (탁석산,“행복 스트레스”, 창비, 2013년, p,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