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9년 7월 14일 (첫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01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당신이 특별히 여기는 장소는 어디인가?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주의 곁에 있을 때 - 401장
●  예수의 이름으로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 본문 : 갈라디아서 5:1-6 
1) 갈라디아 교인들의 문제는 무엇이었나?
⓵ 5:1을 통해 말해보자.
⓶ 이어지는 바울의 설명을 보자(5:2-4).
  

2) 히브리서 6:4-5절을 살펴보자.
⓵ 본문의 뜻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⓶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기 위한 대전제는 무엇입니까?
⓷ “에덴”과 “아단”을 설명해보자.  

3) 적용하기
⓵ 설교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⓶ 깨달은 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기도

1) 지역 셀에서 초청된 지체들을 잘 관리하고 섬겨 정착할 수 있도록 중보
2) 교회학교 여름 사역을 위해 (어린이캠프, 청년학생 수련회)
3) 군에 있는 자녀들을 위해 (이장규, 신요한, 김진현,)
4) 대입을 치르는 학생들을 위하여(이한빛 신예찬 김혜원 정영민 정윤서 우혜민)   
5)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셀 사역

1) 지역 셀에서 초청된 지체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섬기기
2) 새벽예배에 리더들 자원함으로 드리기
3) 공 예배 준수하기
4) 셀 원들의 범사 파악하여 중보하기
5) 결석하는 셀 원들 독려하기
6) 셀 예배 책임감을 갖고 진정성이 있게 드리기  

 
설교요약 (SUMMARY)
설교 요약
제목: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본문: 갈라디아서 5:1-6 

서론 : 오늘 설교 제목은 도발이라고 보셔도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은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로 세뇌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작가 이문열이 그의 소설 제목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표현한 이유는 당시 시대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고 저는 소설을 읽을 때 생각했습니다.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날개 짓을 하는 새들은 희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새들이라고 해도 날개 짓만 잘 할 수 있다면 그 새들에게 추락은 추락이 아니라 더 넓게 보는 여행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모두가 어우러져서 잘 살고 공생하는 일은 개인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한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문열 작가가 본인의 소설을 근래 썼다면 제목 명을 이렇게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할 것이라는 예측을 설교자인 저는 해 보았습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이 문장은 아마도 숙명론적인 담론을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십시다. 정말로 아름다운 국가와 사회는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에 대한 답을 제시하면 됩니다. 꿈틀리 인생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오연호 선생이 ‘우리도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책에서 세계에서 행복지수 1위에 올라 있는 덴마크 방문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는 이 책에서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나라의 가능성을 긍정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권 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 교체이다. 덜 행복한 사회를 더 행복한 사회로 교체하는 일이다. 10%만 승자가 되는 사회를 90%가 승자가 되는 사회로 바꾸는 일이다. 그러려면 이 역동이 계속해서 꿈틀거려야 한다.”(pp,15-16)
  읽다가 이런 소회가 밀려왔습니다. 힘은 들겠지만 그렇게 될 수 있을 가능성에 손들어주기. 오늘 왜 설교를 시작하면서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 없다.’ 에 대하여 저울질했을까? 궁금해 하는 교우들이 있을 줄 압니다. 오늘 본문 해석을 통해 그 답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본론 :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 1절은 갈라디아서 안에는 물론 우리들이 익숙하게 암송하고 되새겨 보는 성서 구절 중에 하나로 유명한 구절입니다. 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 구절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도를 먼저 깨달았던 자들이 율법의 굴레로 회귀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 명 구절로 정평이 나 있는 요절입니다.
  이 해석을 전제로 본문 2-4절을 다시 음미해 보십시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그렇습니다. 정말로 탄식할 만한 기막힌 일이 벌어진 내용을 두고 바울은 조금은 과격한 어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⓵ 할례를 다시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 ⓶ 율법의 전체 의무를 다시 짊어져야 한다. 이렇게 고지한 바울은 결정타를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의 배교자들을 향하여 날립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이렇게 격정적인 감정을 토로한 바울은 오늘 본문 끝 부분인 5-6절에서 이렇게 마무리를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무엇을 결론으로 바울이 선포했습니까? 믿음 유용, 할례 무 효력을 재차 강조합니다. 믿음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십자가의 도를 인정하는 것이며, 할례를 받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무시하고 율법으로 다시 회귀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 기막힌 현상을 이렇게 독설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끊어졌고,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저는 지금까지 갈라디아서에 국한하여 본문을 해석했습니다. 이제는 본문이 주는 교훈에 대한 외연을 조금 더 확대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이 주는 은혜의 확대성은 다음과 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 이미 경험한 은혜의 자리에서 추락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히브리서 6:4-5절의 말씀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이 구절을 토마스 롱 교수는 자신의 히브리서 주석서인 현대성서주석에서 이렇게 주석하고 있습니다. “믿음에서 떨어진 자의 회복 불가능성에 대한 주장은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를 시험하는 말이 아니라, 히브리서 설교자 자신이 목회 경험을 통해 실질적으로 얻은 연륜에서 나온 말이라 하겠다.”(P,147) 토마스 롱 교수의 말을 저 역시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을 나름 도출해 낼 수 있습니다. “구원하지 못할 존재는 그 어떤 영역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해 낼 수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기 위한 대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의 자리를 이탈하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필드에서 추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역설에 부합하는 대단히 중요한 성경적 내용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다시 우리는 1절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 말을 풀면 이렇게 쉽게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너희들을 구원하기 위해 매달리신 십자가의 도를 붙들고 다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이상한 복음에 현혹되지 말고 다시 복음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해서 바울은 은혜의 자리에서 이탈하여 날개가 없는 것 같은 추락을 경험하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의 신자들에게 이렇게 강력한 경고를 남긴 것은 충분히 심정적으로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1장의 추억을 돌아가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1:6-8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은혜의 자리를 떠나면 추락합니다. 어떤 추락입니까? 날개 없는 추락입니다.
  이재철 목사께서 인간의 일생이라는 책에서 다윗이 ‘에덴’이라는 하나님의 돌보심의 영역에서 거하다가 ‘아단’이라는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는 영역으로 끝없이 추락한 역사의 내용을 너무 기막힌 분석으로 기록한 글을 십 수 년 전에 읽었는데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저 역시 목회의 현장에서 이 권고를 나를 쳐서 복종하는 가늠자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목사께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무엘하 11-12장에 걸친 사건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습니다.
⓵ 죄의 대담성 (사무엘하 11:3-4절입니다.) ⓶ 죄의 결실성 (사무엘하 11:4-5절입니다.) ⓷ 죄의 확산성 (사무엘하 11:14-15절입니다.) ⓸ 죄의 둔감성 (사무엘하 11:26-27절입니다.) ⓹ 죄의 후유성 (사무엘하 12:9-12절입니다.) 왜 제가 이재철 목사께서 이미 분석한 5가지의 내용을 교우들에게 이토록 자세히 설명했을까요? 오늘 설교 제목 때문입니다. ‘에덴’이라는 히브리어의 뜻은 ‘우아한 기쁨’이라는 하나님의 지배하심과 돌보심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에덴’이라는 히브리어 명사가 ‘아단’이라는 동사가 되면 ‘주색잡기를 하다.’ ‘패륜적인 행위를 한다.’는 뜻으로 바뀝니다. 다시 말해 ‘에덴’의 자리에서 ‘아단’의 자리로 이탈한 다윗은 날개 없는 추락의 추락을 경험했음을 교우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눈치를 채셨습니까? 지금 저와 여러분은 어떤 자리에 거하고 있습니까? 에덴입니까? 아니면 아단입니까?   
결론 :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하나님을 변수가 아닌 상수로 두고 살아가는 교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길 말고는 내가 영적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연약해서 내가 어떤 경우, 추락하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변수가 아닌 상수로 알고 그 분의 중심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바로 이 믿음의 도구가 여러분을 다시 추락하는 그곳에서 다시 용솟음치게 하는 날개로 작용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어떤 종교인은 추락할 때 날개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도에 붙들린 성도는 추락할 때에도 그것이 날개가 되어준다는 것을.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 모두는 후자의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