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4장 큐티하기 이강덕 목사 1. 찬양하기 : 찬송가 450장 - 내 평생소원 이것 뿐 2. 큐티본문 : 느헤미야 4:1-23 3. 큐티날짜 : 2011년 6월 13일 4. 말씀요약 예루살렘 총독으로 부임하여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느헤미야는 드디어 동역자들과 함께 성벽 재건의 깃발을 들었다. 그런데 역사라는 것이 다 그렇듯이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역에 방해하는 무리들이 발생하게 된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암몬, 아스돗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연대하여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을 반대하며 먼저는 부정적인 여론으로 공격했고 이것이 여의치 않자 그 다음은 물리력으로 성벽 재건이라는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려 했다. 이러한 다중적인 방해로 인해 유다 회중이 흔들리고 낙심하게 되자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의 단을 쌓으므로 위기를 극복함과 동시에 또 한 가지,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반대 세력의 무자비한 공격을 막기 위해 유다 공동체의 동역자들에게 민감하게 전투를 대비하는 체계도 구축하기에 이른다. 한 손에는 쟁기를 잡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병기를 잡게 하였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토록 하는 철저한 계획을 세우는 장면을 본문에서 소개한다. 이로 인하여 유다는 외부적인 방해 세력의 위협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5. 나에게 주신 말씀과 적용 1) 사탄의 세력을 열 받게 하라 (1절, 3절, 7절)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들을 비웃으며”(1절)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3절)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허물어진 틈이 메꾸어져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노하여”(7절) 느헤미야서에 계속해서 느헤미야의 대적으로 등장하는 산발랏은 사마리아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된 권력자였다. 그는 자신이 통치하는 사마리아와 인접해 있는 유다 지역에 느헤미야가 돌아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한다는 소식과 실행을 듣고 보면서 자신의 영향력이 약화될 것을 염려하여 크게 분노하기에 이른다. 그의 분노는 시기심으로 이어졌고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대하여 적극적인 방해자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암몬 사람 도비야도 오십 보 백보였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만들어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가 하면 동시에 여러 반대자들을 부화뇌동시켜 그들과 연대하여 물리적인 방법까지 동원하여 성벽재건을 필사적으로 훼방하는 역할을 하였다. 도비야 역시 성벽 재건에 분노하고 있음을 7절이 보고한다. 나는 느헤미야의 대적자들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면서 의미 있는 도전을 받게 되었다. 내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을 감당하면 감당 할수록 나의 대적들이 시쳇말로 열을 받는다는 감회였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의 싸움은 선한 싸움이 아니었던가! 하나님 앞에서 말이다. 그러나 사탄의 궤계와의 싸움은 그렇지 않다. 치열한 영적 전투이다. 내가 이기면 사탄이 패하는 것이고 사탄이 이기면 내가 죽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적인 흑암의 세력들은 내가 목적하는 하나님을 위한 선한 사역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면 그 일로 인하여 열 받아 자중지란 할 수 있음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적어도 하나님의 군사는 사탄의 궤계들이 열받게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탄을 열 받게 하는 삶! 멋있지 않은가? 2) 근묵자흑( 近墨者黑) (10-12절)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자의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우리의 원수들은 이르기를 그들이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그들 가운데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그 원수들의 근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 좋은 말도 여러 번 들으면 식상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좋을 말의 위력은 그리 크지 못하다는 말로 확대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나쁜 말이다. 나쁜 말은 여러 번 들으면 그 나쁜 말이 진실인 것처럼 믿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의 도출이 우리들이 결코 부정적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들과 가까이 하면 안 되는 이유이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있다.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는 뜻으로 나쁜 사람을 가까이하면 물들기 쉬움’을 이르는 말이다. 유다의 대적자들은 유다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부정적인 선동을 하면서 성벽재건의 실패를 공언했다. 심지어 10번이나 찾아와 이 부정의 언어들을 쏟아냈다. 느헤미야의 강력한 지도력이 있었지만 지속적인 부정의 언어들을 듣게 됨으로 인해 유다 백성들이 힘이 다 빠지게 되는 위기에 이르게 되었음을 느헤미야 기자는 보고한다.(10절) 그렇다. 본문의 말씀을 접하면서 다시 한 번 다음과 같이 다짐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에는 가까이 하지 말자. 신앙의 긍정 편에 서도록 노력하자. 이것이 바로 내가 대적자들의 공격을 방어하는 최선의 공격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3) 옷을 벗지 않는 정신 (23절) “나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따라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우리가 다 우리의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각각 병기를 잡았느니라” 느헤미야는 대적들의 공격이 이제는 물리적인 공격으로 이어지는 것을 알고 성벽 재건자들에게 또 다른 임무들을 맡기게 된다. 일을 할 때 한 쪽 손에는 쟁기를 잡고 또 한 쪽 손에는 병기를 잡게 한 것이다.(17절) 동시에 건축자들에게는 허리에 칼을 차게 하였다. 또한 서로가 일하는 장소가 달라 거리적인 문제로 인해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할 것을 대비하여 나팔을 각 처에 준비해 놓았고 비상시에 나팔소리가 들리면 한곳으로 집결할 것을 약속하기까지 하였다. 이런 유비무환의 정신을 발휘한 유다 공동체 지체들의 행동 중에 압권은 23절에 기록된 ‘우리가 다 우리의 옷을 벗지 않았다.’의 말씀이었다.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옷을 벗지 않은 사람들이 바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있었던 느헤미야와 동역자들이었다. 이 말씀이 레마로 와 닿은 이유는 옛날 신출내기 전도사를 한 교회에 부임받아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시절 담임목사님의 긴급한 호출에 대비하여 넥타이도 풀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던 시절이 기억나서였습니다. 그 때 사역은 영적인 정신으로 했던 것 같다. 그렇다. 오늘 마지막으로 본문 큐티를 통해 받은 말씀은 ‘우리가 다 우리의 옷을 벗지 않았다.’는 대목이었다. 옷은 단순한 옷이 아니었다. 전투하는 옷이었습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흔히 상투적으로 말하는 말 중에 정신문제야! 라는 격언을 많이 듣는다. 그러나 옷을 벗지 않았다는 말을 신앙적인 언어로 바꾸어 말한다면 사탄의 궤계와 언제든지 맞붙을 수 있는 신앙적 긴장감을 잃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큐티를 하면서 내가 얻은 최고의 진수였다. 빈틈이 없는 영적 무장이 있을 때만 쓰러지지 않으리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벗지 않겠다는 도전을 준 귀한 말씀이 느헤미야 4장 큐티 내내 가슴에 메아리쳤다. 6. 기도 하나님! 사탄의 공격은 느헤미야 시대보다 오늘이 더 치열하고 강력합니다. 오늘도 나에게 수없이 많은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과 아라비아 사람들, 암몬 사람들, 아스돗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공격은 치열하고 맹렬합니다. 도저히 제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주시는 옷을 입어야 하겠습니다. 전신갑주를 입히시는 하나님. 당신의 성육신화 된 말씀의 전신갑주를 입겠습니다. 절대로 벗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가장 강력한 영적 긴장감을 날마다 주옵소서. 특별히 교회 건축하는 여정에 더욱 영적 긴장감을 주시고 부족하지만 2주 동안의 철야의 기회를 통해 재무장하는 종과 우리 교회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