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6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쉰여섯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14:17-24 제목: 반응 (2) 오늘은 아브라함을 영접한 두 번째 왕인 소돔 왕 베라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 21절을 보겠습니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이 구절이 왠지 모르게 독자인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아무런 의미 없이 이 구절을 보면 별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 깊게 들어가 보면 가볍게 지나칠 구절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4:11-12절을 복기해 보십시다.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요단 동편의 네 나라의 연합국이 요단 서편의 다섯 나라를 공격하여 무력화시키는 일이 벌어졌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이 전쟁에서 패배를 당한 소돔은 갖고 있었던 모든 재물과 양식을 탈취 당했음을 창세기 기자가 보고합니다. 창세기 13:10절의 보고를 근거할 때 소돔이 갖고 있었던 재산과 양식은 풍요로웠을 것입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소돔 왕 베라는 이 풍요를 엘람 왕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소돔에 살고 있었던 롯은 고래 등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꼴로 엘람 왕에게 볼모가 되는 재앙을 맞게 되었습니다. 천만 다행으로 큰아버지 아브람에게 극적인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4:1-16절에 기록된 팩트입니다. 아브람은 예기치 않게 참여하게 된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의 전투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게 된 이후 획득한 전리품들을 갖고 돌아옵니다. 사웨 골짜기로 개선한 아브람을 형식적인 인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돔 왕 베라가 맞이합니다. 아브람을 맞이한 베라의 일성이 대단히 불편합니다. 다시 21절입니다.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롯을 비롯한 소돔 사람들은 돌려주고 전쟁에서 이겨 획득한 전리품들은 네가 맘대로 취하라는 베라의 말이었습니다. 이에 반응한 아브람의 답변을 보십시다. 본문 22-23절을 읽겠습니다.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이해하기가 너무 쉬운 답변이었습니다. 베라의 말에 단호하게 거부한 것입니다. 개인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것처럼 보였던 베라의 말을 거절한 아브람에게 볼 수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백석대학교 송병현 교수는 4가지로 그 이유를 분석했습니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주석-창세기”pp,288-289.) ① 아브람은 이 세상의 복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었다. ② 아브람은 하나님이 그를 존귀하게 해 주실 때를 사모하고 있다. ③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주고자 했던 재물은 억울한 자들의 눈물과 피로 얼룩진 가증한 물건이었다. ④ 소돔의 모든 사람과 짐승들은 곧 멸망하게 된다. 보수적인 신학교에서 강의하는 보수적인 교수의 참 시의적절한 해석이라는 점에 동의했습니다. 저는 참 은혜로운 해석이자 접근이라는 데에 조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설교를 준비하다가 조금은 더 진보적인 해석에 마음이 갔습니다. 컬럼비아 신학교의 월터 브루그만 교수의 해석이 진지하게 다가왔습니다. “아브람은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음을 밝히며, 그 하나님께 손을 들어 맹세한다. 아브람이 이미 얻었으면서도 아직 얻지 못한 행복과 번영은 군사적이거나 정치적인 책략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에 의해서만 주어진다.” (월터 브루그만, “현대성서주석-창세기”,p,222.) 브루그만의 이 해석에 마음이 간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는 자의 신앙행동 반경에 대한 동의입니다.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 아브람이 본문 22절에 등장합니다. 단순히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는 아브람이 아니라 그 분의 이름으로 맹세를 할 정도의 친숙한 앎이 아브람에게 있었습니다. 본문에 맹세했다고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 ‘룸’은 ‘맹세하다’로 번역되었지만 실제 의미는 ‘높이다’는 동사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람은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를 높이며’ 그 분의 이름에 먹칠하는 불신앙적인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것이 소돔 왕 베라의 말을 거부한 이유였던 것입니다. 다만 24절에 기록된 것처럼 자신은 그렇게 본인의 유익을 위해서는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취하지 않겠지만 자신의 싸움을 도와주었던 젊은이들이 이미 허기가 져서 먹었던 것과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가 취할 것에 대해서는 자신도 어쩔 수 없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무서운 선 긋기였습니다. 이상의 본문 해석을 교우들에게 전하면서 오늘 수요 설교를 통해 조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오롯이 제게 전달되었습니다. ※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방향의 삶을 산다는 교훈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려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의 존귀함 때문에 적어도 주군의 이름에 먹칠하는 망령됨을 경계하면서 막 살지 않습니다. 아브람이 바로 이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참 극단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던 이유를 엿보게 해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역대상 16:7-10절을 소개하겠습니다. “그 날에 다윗이 아삽과 그의 형제를 세워 먼저 여호와께 감사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릴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고 그의 모든 기사를 전할지어다 그의 성호를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마다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의 법궤가 들어오자 그 법궤를 모신 장막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제사를 드리고 난 다윗은 궁전 찬양 사역자였던 아삽과 그의 형제들을 세워 찬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호 즉 야웨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하였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찬양하던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삶을 살았던 다윗은 그의 삶의 방향성이 옳고 또 옳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지속적으로 높인 것이 아니라 일순간 하나님의 이름을 무시한 삶을 살았음을 우리는 너무 잘 압니다. 밧세바를 취한 삶입니다. 이 악한 행위를 보셨던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 그의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사무엘하 12:9-10절입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기에 두 번에 걸쳐 번역된 ‘업신여기다’는 히브리어는 ‘바자하’입니다. 이 단어는 원뜻이 ‘경멸하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였던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과 이름을 멸시하고 경멸하는 자로 급전직하했다고 고발하는 역사가의 경종이 ‘바자하’에 담겨 있습니다. 이 두 극단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방향성의 올곧음과 이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이름을 붙들고 사는 자는 그 길의 방향성이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올바르게 삽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과 이름을 버리는 자는 그 길의 방향성이 흐트러지게 마련입니다. 흐트러지면 막 삽니다. 랜덤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일전에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한 소년 법 전문 판사인 천종호 판사는 신앙생활을 아주 잘하는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그가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친구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같이 자라난 친구 중 한 명이 무기징역형을 언도 받고 복역 중에 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중학교 시절에 조폭에 가입하여 인생을 망친 중학교 친구 이야기 중에 그 친구가 옥중에서 자기에게 편지에 이런 글이 있음도 밝혔습니다. 오늘 내가 보내는 편지를 소년범들에게 읽혀 주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반면교사를 삼으라는 의도일 것입니다. 천 판사는 그의 신앙고백에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계명을 내리신 것은 인간을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계명이 아닌 예수님의 보혈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율법에 관한 이러한 태도를 갖는다면 매일 조금씩 우리의 삶을 예수 이야기에 맞추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신문 인터뷰에서) 기막힌 성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이름을 거울삼아 살았던 천 판사는 작금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일탈을 막는 최일선(最一線)에서 일익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올곧게 살고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과 이름을 업신여겼던 그의 친구는 때늦은 후회를 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보고는 우리들을 경성시킵니다. 저는 율법주의를 경계하는 목사입니다. 동시에 율법주의는 복음이라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치명적으로 배치되는 것임에 동의하는 목사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한 가지 우리들이 소홀히 여길 수 있는 것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율법주의는 대단히 예민하게 경계할 것이지만 율법이라는 것이 적어도 내 삶을 막 살지 않게 하는 선한 도구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제 3계명의 율법입니다. 왜 3계명이 생겼는지 아십니까? 출애굽기라는 두 번째 율법서는 바벨론 포로기 시대에 편집되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렇다면 주전 587년에서 주전 538년 사이일 것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렸던 이스라엘은 바벨론, 바사의 치하에서 야웨 하나님 신앙이 아닌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우상들을 섬기라는 강한 압박과 시련 속에서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능멸하고 이방의 우상들을 높이라는 일련의 도전 앞에서 다윗 공동체로서의 야웨 하나님을 존중하겠다는 신앙으로 다시 옷매무새를 만지는 동기부여가 필요했을 것이 자명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계명이요, 율법입니다. 중간기 400년 동안 유대 신앙을 종교화, 교리화했던 분파주의자들이 율법을 율법주의화 했고, 그런 소위가 악한 행위로 인해 율법이 복음보다 우선시 되는 재앙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율법주의로 변질되자 그것이 도리어 올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율법에 대하여 반감을 갖는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났고 그 결과 율법을 지키려는 귀한 일들까지 율법주의로 매도하여 율법을 가볍게 여기는 누를 범하게 된 것이 오늘까지 이르는 자가당착의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천착할 것은 율법이 나를 삼가게 하는 도구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정리해 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말씀을 높이는 자는 막 살지 않습니다. 방향성이 언제나 아름답고 올바릅니다. 다시 아브람으로 돌아갑시다. 아브람은 잠시 동안 주어질 세속의 이익에 눈멀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야웨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방향에서 이탈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훗날 믿음의 한참 후배였던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회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8-10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한희철 목사의 묵상 하나 전합니다. “다가온다는 태풍 앞에서도 거미가 저리 태평인 것은, 태풍의 위력을 몰라서가 아닐 것이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촘촘하게 거미줄을 치면서도 실상은 비워놓은 구석이 더 많다. 그것은 비를 견디고 바람을 견딘다는 것을 거미는 알고 있을 것이다. 다가온다는 태풍 앞에서도 거미가 저리 태평한 것은 자신의 허술함을 믿기 때문이다.” (한희철, “하루 한 생각”, 꽃자리,p,336.) 한 목사의 이 글을 읽다가 무릎을 쳤습니다. 세상에! 자신의 허술함까지도 믿는 것이 거미인데 어떻게 부족함이 없고 완벽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에서 이탈하여 믿음을 저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라는 방향성에서 이탈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끝까지 그분의 말씀과 이름에 붙들려 사는 백성입니다. 마치 아브람이 그랬던 것처럼. 모쪼록 우리 세인 지체들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에서 이탈되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