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세기 14:17-24
제목: 반응 (1)
서론)
저는 본문 17-24절을 근거로 두 주 동안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오늘은 17-20절을 근거로 말씀을 드릴 것이며, 다음 주 수요일에는 21-24절을 텍스트로 하여 두 번째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 ‘반응(1)’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아브람은 조카 롯을 그돌라오멜의 손아귀에서 구출하여 예루살렘 주변인 사웨 골짜기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장소를 예루살렘 주변이라고 한정한 이유는 본문 17-18절에 근거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영남신학대학교 오택현 교수의 창세기 강해를 보면 이렇게 주석되어 있습니다.
“사웨 골짜기는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골짜기로 후대에는 ‘왕의 골짜기’라고 불렀다. (중략) 살렘은 시편 76:2절에 ‘그의 장막은 살렘에 있음이여 그의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라고 말하며 예루살렘을 지칭하고 있다. 아마도 아브람과 소돔 왕이 만난 장소가 예루살렘 인근 근처인 사웨 골짜기라서 살렘의 왕인 멜기세덱도 영접 나온 듯하다.” (오택현, “창세기-연세신학백주년기념성경주석”, 대한기독교서회,p113.)
이 주석을 전제할 때, 사웨 골짜기가 요단 서편에 있기에 동편을 다스리던 소돔 왕은 동선을 이동하여 아브람을 맞으러 나간 셈이고, 멜기세덱은 사웨가 지근 거리였기에 아브람을 영접하러 나가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이해한 데에 있어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아브람을 영접했던 두 명의 왕 중에 살렘 왕인 멜기세덱이 먼저 소개되었고, 그 다음으로 소돔 왕 베라가 소개되었다는 순서에 주목해야 합니다.
오늘 수요일과 다음 주 수요일에 걸쳐 이 두 명의 왕이 아브람을 영접한 내용에 대해 설명하겠지만 이렇게 순서를 정한 것은 창세기 기자가 다분히 의도를 갖고 이렇게 순서를 정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왜냐하면 멜기세덱과 베라의 전혀 다른 행위를 비교하기 위함입니다.
멜기세덱은 신앙의 관점에서 기술되었고, 베라는 철저하게 비 신앙적 관점에서 인용되었음을 보고합니다.
오늘은 먼저 신앙적인 대상인 멜기세덱을 소개합니다.
본론)
본문 18-19절을 읽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창세기 기자는 본문 18절에서 살렘 왕 멜기세덱의 정체성을 이렇게 밝힙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히브리어 ‘엘-엘룐’의 번역인데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당시 아브람이 살았던 고대 가나안은 만신의 현장이었습니다.
그 중에 ‘엘 엘룐’이란 신의 용어는 만신들 중에 최고의 신에게 붙여주는 호칭이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렇게 가나안 만신 중에 최고의 신이었던 ‘엘 엘룐’이라는 명칭을 창세기 기자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던 야웨 하나님에게 그대로 적용시켰다는 점입니다.
하경택 교수는 이 명칭 수여에 대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주석했습니다.
“가나안 만신전의 최고신에게 표현되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하나님 야웨에게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른 신들의 기능을 빼앗아 가나안과 다른 모든 지역의 최고의 신으로 고백되기에 이르기까지의 투쟁의 역사를 보여준다.” (하경택,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2”,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pp,36-37)
멜기세덱은 가나안에 만연했던 혼합적인 다신론적인 상황에서 유일하기도 하지만 최고의 신인 야웨 하나님을 섬기던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창세기 기자가 보고한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 주석입니까?
아브람의 신앙과 매치시키기 위함 때문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부르셨던 그 분, 불신앙의 마음으로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강권함으로 사라는 보호하셨던 그 분, 롯이 떠났을 때 오셔서 네가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줄 것이고, 네 자손들을 수없이 많게 하겠다고 축복하신 그 분, 헤브론에 정착하자마자 제단을 쌓으며 예배했던 바로 그 분의 제사장이 멜기세덱임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은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영접할 때 빈손으로 나오지 않고 주기 위해 가지고 나온 것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본문 18절에서 그것이 바로 떡과 포도주라고 적시했습니다.
송병현 교수는 멜기세덱이 가지고 온 떡과 포도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빵과 포도주는 제사장들이 가지고 다니는 물건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는 전쟁에서 돌아오는 아브람에게 식사를 대접한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국제제자훈련원“,p,287.)
아브람의 육신의 곤고함을 채워주기 위한 멜기세덱의 사랑이 담겨 있는 대목입니다.
또 한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 19절입니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복을 빌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아브람을 강복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멜기세덱은 아브람에 영과 육에 대한 복을 빌고 채워준 사람이 됩니다.
도대체 멜기세덱이 누구이기에 아브람에게 이런 복을 선포하고 채워준 사람이 되었을까요?
한 구절만 더 강해해 보십시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20절)
멜기세덱이 본문 20절 전반절에서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를 남깁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멜기세덱의 선포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그는 아브람이 치열하게 싸워 조카인 롯을 구출하고 승리한 전투인 그돌라오멜과의 일전에 하나님이 개입하셨음을 담대히 선포합니다.
이 말은 다시 환언한다면 이미 멜기세덱은 아브람의 싸움 즉 전쟁의 결과를 관통하여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도대체 멜기세덱의 능력이 어느 정도이기에 아브람의 승리를 예측할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을 18절 본문에서 이미 말했음을 교우들에게 전했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렇습니다.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아브람의 반응을 보겠습니다.
20절 본문 후반절입니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아브람은 전쟁의 승리로 인해 자연적으로 얻은 전리품의 1/10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음을 보고 합니다.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은 아브람이 멜기세덱에 드린 1/10에 대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십일조는 낙헌제(free-will offering)가 아니라 하위직에 있는 자가 고위직에 있는 자에게 매여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행위다.” (월터 브루그만, “현대성서주석-창세기” 한국장로교출판사,p,218.)
그렇다면 아브람은 자신을 아랫사람이라고 인정한 것이고, 멜기세덱을 윗사람이라고 평가했다는 말이 됩니다.
생면부지의 멜기세덱이었지만 그를 이렇게 인정한 것은 멜기세덱의 제사장 권위 때문일 것입니다.
멜기세덱의 제사장의 권위를 인정한 아브람은 그에게 주저 없이 십일조를 드린 것입니다.
이상이 오늘 본문 해석입니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보인 반응을 통해 우리들이 레마로 받아야 하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공유하겠습니다.
※ 내가 신앙적인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는 신앙적인 일체의 것에 반응함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주목해 보십시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전술했듯이 십일조는 단순히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물질의 1/10을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아랫사람이고 십일조를 받는 대상이 윗사람이라는 대 전제를 인정하고 윗사람에게 바치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사웨 골짜기에서 만난 아브람은 멜기세덱과 초면의 관계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람은 전리품의 1/10을 기꺼이 그에게 드렸습니다.
멜기세덱이 자신에게 영적인 복을 강복해 주고, 육체적인 주림을 채워준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나안 지경에서 자신을 축복해 주었던 야웨 하나님의 중재자이자 제사장이 멜기세덱임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덱이 자신의 영적인 부분까지 인도할 신앙의 지도자임을 동의했기에 아브람은 십일조라는 것을 드리며 영적으로 반응한 것입니다.
시인 나태주의 시를 읽다보면 시인이 가져야 할 시적 감성이 정말로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놀랍게 깨닫습니다.
내 인생의 봄은 갔어도/ 네가 있으니/ 나는 여전히 봄의 사람
너를 생각하면/ 가슴속에 새싹이 돋아나/ 연초록빛 야들야들한 새싹
너를 떠 올리면/ 마음속에 꽃이 피어나/ 분홍빛 몽골몽골한 꽃송이
네가 사는 세상이 좋아/ 너를 생각하는 내가 좋아/ 내가 숨 쉬는 네가 좋아
(나태주, “너와 함께 라면 인생도 여행이다”의 ‘봄의 사람’ 중에서, 열림원,p,80.)
시인에 따르면 내가 행복한 이유는 너라는 존재 때문임을 밝힙니다.
내가 너에게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그것이 행복이고 봄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이렇게 사람도 또 다른 타자에게 긍정적으로 반응할 때 행복한 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에게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존재라면 나의 일부가 아니라 나의 전부로 주님의 것에 대하여 철저하게 신앙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새벽 묵상 텍스트이기에 다시 말씀을 드리겠지만 누가복음 5:12-13절을 보십시다.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나병환자를 고치신 주님의 기사입니다.
이 나병환자가 천형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었던 단초는 신앙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손을 내미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신실한 크리스천 정신과 전문의인 제럴드 메이는 자신의 걸작인 ‘영혼의 어두운 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행의 절정, 곧 밤이 지난 다음의 새벽을 경험한다는 것은 곧 이제까지 언제나 존재해 왔던 하나님과의 연합을 깨닫는 것을 가리킵니다. 십자가 요한은 이러한 연합의 깨달음을 가리켜 사랑의 충만함이라고 부릅니다.” (제럴드 메이, “영혼의 어두운 밤”, 아침, p,97.)
메이가 ‘연합’이라고 지칭한 단어, 성 요한이 ‘사랑의 충만함’이라고 지칭한 단어를 저는 ‘하나님응 향한 신앙적 반응’이라는 단어로 바꾸고 싶습니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의 신앙적 행위를 신앙적인 반응으로 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신앙의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신앙적으로 행동하십시다.
신앙적으로 생각해야 신앙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결론)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한동일 교수의 ‘라틴어 수업’을 읽다가 가슴에 진하게 담아 밑줄 그은 한 구절 소개하고 기도하겠습니다.
"Hodie mihi cras tibi" (호라스 미기 크라스 티비)
로마의 공동묘지 입구에 쓰인 문장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한 교수가 이 글을 소개하면서 대단히 중요한 갈파를 던집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영원으로부터 와서 유한을 살다가 다시 영원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한 번 숨이 끊어지면 그만인데도 영원에서 와서인지 인간은 영원을 사는 것처럼 오늘을 삽니다.” (한동일, “라틴어 수업”, 흐름 출판,pp,151-152.)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이렇게 너무 어리석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인간인 내가 어리석지 않게 사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영적인 은혜에 대해 영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아브람처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