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9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쉰 한 번째 강해) 본문 : 창세기 13:5-13 제목 : 계산하는 신앙이 가져올 재앙 하나님은 다윗에게 은혜를 주셔서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셨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해 가며 승승장구하던 어느 날, 아람과의 전투에서도 이기게 하셨습니다. 다윗의 군사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전투하며 주군이었던 다윗을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었던 반면, 왕궁에서 오수를 늦게까지 즐기는 방만함에 빠져 있던 다윗은 일생일대의 가장 치욕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유부녀와 간통하는 죄를 자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행위를 좋게 여기실 리 없습니다. 간통의 대상자인 밧세바를 임신하게 하셨습니다. 졸지에 불륜남이 되어 버린 다윗은 자신의 범죄가 탄로 날 것을 염려하여 지금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불륜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아람과의 전쟁터에서 불러들여 특별 휴가를 주는 형식으로 아내에게 보내 그의 아내인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는 전략을 폅니다. 유전자를 감식하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우리야가 아내와 동침하기만 하면 자신의 죄를 덮을 수 있다고 다윗은 비상하게 머리를 돌려 계산한 것입니다. 사무엘하 11:6-8절을 읽겠습니다. “다윗이 요압에게 기별하여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하매 요압이 우리아를 다윗에게로 보내니 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매 다윗이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이 어떠했는지를 묻고 그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음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이런 얍삽함으로 치밀하게 계획된 다윗의 완전 범죄 계획은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갑니다. 우리아가 집으로 가서 아내와 동침하지 않은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부하들이 죽어가는 데 자신만 이렇게 안일하게 혜택을 누릴 수 없다는 충직함 때문에 다윗은 더 큰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범죄에 대하여 급해진 다윗은 더 담대해짐은 물론 무감각해지기까지 합니다. 본인의 계산이 무산되자 다윗은 특별휴가를 마치고 전쟁터로 복귀한 우리아에 대해 악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사무엘하 11:14-15절을 소개합니다.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다윗은 소위 말하는 살인교사를 요압에게 명한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계획은 성공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성공한 것이 아니라 인생 최대의 실패를 경험한 것입니다. 다윗의 이 사악함의 결론을 사무엘하 기자는 이렇게 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11:27절입니다.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다윗의 소위를 하나님이 악하게 여기셨다는 것은 앞으로 펼쳐질 다윗의 미래가 처절하게 험난할 것임을 예고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얍삽하게 계산한 다윗의 미래는 이렇게 펼쳐집니다. 불륜으로 낳은 아이를 하나님이 치셨습니다. (죄의 심판성입니다.) 자식들 간의 패륜적인 행위가 이어집니다. 암논은 이복 여동생인 다말을 강간합니다. 강간당한 다말의 친 혈육이었던 압살롬은 자신의 여동생의 몸을 욕보인 이복형 암논을 살해합니다. 압살롬의 패륜은 여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아버지 다윗을 반역하며 아버지를 죽이려고 합니다. 아버지의 후궁들을 자신의 권위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강간하는 패륜을 자행합니다. 다윗이 자신이 범한 죄를 처절하게 회개하자 하나님이 다윗을 복원하여 왕위를 되찾게 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반역했던 아들 압살롬은 요압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다윗이 왕위를 물려준 솔로몬이 남아 있던 이복형인 아도니야를 정치적인 이유로 살해합니다. 결국 다윗이 계산하던 얍삽한 범죄로 인해 그의 자녀들이 거의 멸문지화를 당하는 비극적인 재앙이 임하였음을 역사는 보고합니다. 계산하는 신앙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람과 그의 조카였던 롯에 관한 담론입니다. 애굽에서 돌아온 아브람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아이와 벧엘 사이에 정착합니다. 애굽에 내려갔을 때 계산하는 얍삽함으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아브람이었지만 구속사의 도구였던 아브람을 보호하셨던 말도 안 되는 은혜로 인해 예기치 않은 재산을 얻게 되었던 아브람은 돌아온 가나안에서 목축을 하며 신앙 안에서 정착합니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아브람의 식솔들과 롯의 식솔들 간에 다툼이 자주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재산 때문입니다. 목축을 할 땅은 제한이 있었고, 먹여야할 가축들은 자꾸만 늘어나자 서로 간의 이권 다툼이 벌어진 것입니다. 본문 6-7절입니다.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큰아버지와 조카 사이에 나름 재산관리로 인한 불협화음이 일어나자 더 이상은 함께 동거할 수 없음을 인정한 아브람은 조카와 헤어지기로 결심합니다. 친족 간에도 힘들었는데 그 땅에 먼저 정착하고 있었던 가나안과 브리스 사람들의 텃세까지 복합되니 도저히 같이 동거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유 때문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추출할 수 있는 한 가지 분명한 교훈은 풍요가 단순히 복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넉넉함이 내 신앙의 여백 중에서 나를 든든히 붙잡아주는 아딧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물질적인 넉넉함과 풍요로움은 자랑하고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라 민감하게 경계하고 긴장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은 애굽에서의 실패를 마음에 새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해서 또 다시 계산하는 그 얍삽함이라는 실수를 재연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롯의 일행들로 인해 벌어지는 불편함, 그리고 다툼을 더 이상은 묵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던 아브람은 이번에는 계산하는 얍삽함이 아닌 신앙적인 선택을 조카에게 제시합니다. 본문 8-9절을 읽겠습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람은 우선 선택권이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특권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계산하는 세속적 방법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다시 믿음 없는 선택을 하지 않겠다는 결기를 보여 준 것입니다. 문제는 아브람이 아니라 롯이었습니다. 아브람이 포기했던 계산하는 행동, 얍삽한 행위를 롯이 선택한 것입니다. 일전에 12:4절을 강해할 때 우리는 롯의 위험성을 터치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 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말씀을 따라 간 반면, 롯은 사람을 따라 간 불완전성에 대해 살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우려가 본문에서 여지없이 확인됩니다. 10절 본문을 봅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0절이 주는 영적 의미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브람이 우선선택권을 포기하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에 있는 소알, 소돔, 고모라 쪽을 바라보았다고 지적합니다. ‘바라보다’로 번역된 ‘라아’는 ‘욕심껏 바라본다’는 의미가 있는 단어입니다. 롯이 선택한 지역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해 줄만한 땅임을 암시한 것입니다. 롯은 주저하지 않고 큰아버지가 양보한 요단으로 대변되는 동쪽의 비옥한 지역으로 장막을 이주합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선택이고, 계산된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 지역은 대단히 위험한 지역이었고 영적으로 불길한 땅이었음을 본문 마지막 13절이 시사합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우리는 창세기 18-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실상은 물론 그 성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계산하는 신앙의 결국은 파멸이요, 파국이었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메시지’에서 13절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소돔 사람들은 악해서 하나님을 거슬러 극악한 죄를 짓는 자들이었다.” 이상합니다. 넉넉한 땅, 비옥한 땅, 물이 많은 땅이었던 요단 동편에 위치해 있었던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이 악하다고 보고한 것, 동시에 하나님을 거스르는 행동을 자행했고, 극악한 죄를 범했다고 고발한 점이 그렇습니다. 다시 한 번 주지하지만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라아’(탐욕스러운 판단)에 함몰된 자들이 갖고 있는 부나 명예나 행복은 불에 타는 것들입니다. 결코 복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주는 만족과 쾌락은 한시적입니다.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롯은 그것이 영원할 것으로 착각하며 산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14장을 강해할 때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큰아버지와 결별한 이후 소돔과 고모라 지역에 거주하던 롯이 그쪽 지역의 맹주 엘람 왕 그돌라오멜에게 인질로 잡혀가는 비극을 당하게 됩니다. 극적으로 아브람에 의해서 구조된 롯은 다시 소돔으로 돌아가 살다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소돔 심판 때 또 다시 극적으로 구원 받아 생명은 유지합니다. 하지만 소알 땅으로 피신한 롯은 그의 두 딸의 몸을 통해 자식을 낳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더불어 그렇게 딸들의 전혀 신앙적이 않은 선택으로 인해 얻게 된 두 아들은 모압과 암몬으로 이 두 족속의 조상이 되는 상식적이지 않은 재앙의 씨앗을 남기게 됨을 창세기 기자는 보고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상의 본문 해석을 통해 오늘 수요 예배를 통해 주시고자 하는 은혜의 레마를 받겠습니다. ※ 계산해야 하는 신앙의 길목에 서게 되면 그 반대편 선택을 하십시다. 본문 8-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 구절을 주석한 현존하는 최고의 구약학자라고 칭송받는 월터 브루그만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십시다. “이 이야기에서 아브람은 경이로운 신앙의 모델로 묘사된다. 나이 많은 큰아버지로서 그는 좋은 땅에 대한 기득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믿고 있었기에 자기가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창세기 주석, 한국장로교출판사,pp210-211.) 반면 롯의 선택에 대한 주석도 살펴보겠습니다. “롯이 바라본 땅은 비옥했다. 그러므로 많은 가축을 거느리고 있는 롯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리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롯의 선택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식했더라면 그쪽을 선택할 수 없었다. 가나안을 선택했어야 했다. 즉 ‘별 볼일 없는 하나님의 축복’과 ‘매력적인 세상의 부귀영화’ 중 그는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창세기”, 국제제자훈련원, p,273) 이렇게 갈파한 송병현 교수는 이 구절 주석의 갈무리를 다음과 같이 쓰고 마무리했습니다.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우리에게도 혹시 롯의 모습이 보일 때가 있지 않은가!” (위의 책, 같은 페이지) 누가복음 12:13-15절을 읽겠습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이 구절을 만날 때마다 섬뜩해집니다. 왜? 내가 주님께 명령하는 자일까 봐. 계산은 이미 끝났습니다. 형이 차지할 재산의 분할을 하는 것이 그가 행했던 계산의 결론입니다. 다만 유효성에 대하여 확실한 공증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찾아가 준비된 서류를 내놓고 완벽하게 준비했고 계산했으니까 주님은 여기에 사인만 하면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두려운 것은 그 사람이 혹시 나일까 봐 두렵습니다. 주님이 으름장을 놓는 그에게 대노하셨습니다. 누가 나를 너희들의 재판장으로 세웠느냐는 강력한 비판을 오늘의 언어로 기록한 한 문장으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계산은 내가” 롯은 자기가 계산했습니다. 반면 아브람은 한 번의 불신앙적인 시도에 따른 철저한 실패를 거울삼아 다음과 같은 신앙적 선택을 한 것입니다. “계산은 주님이” 사탄이 나를 강하게 유혹합니다. “하나님도 이해하시니 네가 계획하고, 네가 작성하고, 사인만 하나님께 받아!” 여기에 고개를 끄떡이는 자들의 결론은 재앙입니다. 만에 하나 내 눈을 들어 보니 ‘라아’의 이익이 보이는 것이 있으면 그 반대편의 것을 선택하십시오. 그게 주님의 방법이자, 주님의 식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누가복음 5:11절입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이 구절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예수를 따르니라”는 어느 정도 연륜이 쌓인 종교인들이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신실한 그리스도인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구절(모든 것을 버려두고)이 반드시 첨가된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