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19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마흔 아홉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12:10-20 제목: 비겁함을 버리라 서론) 우리 교회 이름은 세인(世認)교회입니다. 말 그대로 ‘세상이 인정하는 교회’가 되자는 것이 우리 교회의 정체성이자, 존재 이유입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할 초창기에 가졌던 명제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세상에게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교회가 비일비재한 오늘인데, 우리 교회는 반대로 세상이 교회에게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교회가 되자.’ 라는 主尊心을 잃지 않는 교회 만들기였습니다. 그러려면 교회가 교회다워야 합니다. 다음 주간 실시될 신년 특별 새벽 기도회의 표어가 ‘교회를 교회되게’입니다. 교회면 다 교회지, 무슨 교회를 또 교회되게 하자는 것인가?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이런 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는 세상이 인정해야 교회입니다. 만에 하나 세상이 인정하지 않으면 교회라는 간판과 건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건 교회일 수 없습니다. 본회퍼는 옥중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Kirche für andere” (타자를 위한 교회) 다시 말하면 “교회는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라는 정의를 내린 것입니다. 본론) 오늘 본문에서 교우들과 함께 이런 테제에 대해서 추적하며 은혜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의 한 지역이었던 세겜 땅 모레의 상수리나무에 도착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삶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정착한 아브람은 모레에서 벧엘과 아이 중간에 있는 지역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정착하기에 이릅니다. 동시에 그곳에 도착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고 지난 주 수요일 설교를 통해 나누었습니다. 가나안 정착이라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프로젝트의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는 것 같았던 아브람에게 예기치 못한 난관이 닥칩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 땅 가나안에 기근이 든 것입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었습니다. 다른 땅도 아닌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로 그 땅에 기근이 든 것입니다. 아브람은 예기치 못한 난관으로 인해 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무언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결정한 일이 바로 애굽으로 다시 이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동하려고 하는데 아브람에게 해결해야 하는 또 다른 무거운 숙제가 있었습니다. 본문 11-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도무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창세기 기자는 보고합니다. 아내 사래 문제였습니다. 자기 아내가 너무 아름다워 애굽의 실권자인 바로가 사래를 차지하기 위해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에게 엄습한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에 사로잡힌 아브람은 자기 아내에게 비겁한 일을 자행합니다. 아내임을 속이고 누이라고 속이자는 일종의 치졸한 타협안을 내놓은 것입니다. 본문은 침묵하고 있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일은 진행되었고, 그렇게 아브람의 비겁함을 전제하여 아브람의 식솔들은 애굽에 도착하게 됩니다. 본문 14-17절은 애굽에 도착한 아브람의 일가와 바로 사이에 일어난 후담을 전합니다. 예상했던 것처럼 바로는 사래의 미모에 반하여 그녀가 아브람의 누이라고 말하는 아브람의 말을 확인한 뒤, 후궁을 삼기 위해 바로의 궁으로 이끕니다. 여기까지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됩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17절 본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아브람의 계보를 통해 이루실 구속사가 이방인에 의해 망가질 순간 더 이상은 묵과할 수 없으셨던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심으로 사래를 아내로 삼으려고 했던 바로의 일을 중단하게 하신 것입니다. 졸지에 재앙을 만난 바로는 아브람을 불러 탓하며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까지 창세기 기자는 보고합니다. 18-20절입니다.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와 함께 그의 아내와 그의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이상의 본문 이해를 통해 본문이 주는 영적 교훈을 교우들과 나누기를 원합니다. ※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바로 서지 못하면 타자에게 피해가 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미 살폈던 것처럼 아브람은 하나님이 은혜로 구속사를 이룰 도구로 선택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철저히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동역자(同役者)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순전히 아브람의 이기적 선택과 결단으로 인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바람에 하나님의 계획이 무산 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류 구원의 대 프로젝트가 한 사람의 무모하고 불신앙적인 태도로 인해 수포로 돌아갈 위기를 하나님이 묵과하실 리 만무합니다. 하나님은 이 위기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개입방법은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셔서 바로의 행위가 잘못된 일임을 깨우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잘못은 아브람이 했는데 왜 죄 없는 바로에게 고통을 주었을까? 입니다. 이것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의 영역이기에 이렇게 답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심은 하나님의 방법이기에 내가 판단할 내용이 아니라는 대답 말입니다. 바로는 어떤 의미로 보면 아브람의 비겁한 신앙으로 인해 바로는 피해를 입은 객관적 타자였습니다. 바로에 대한 접근은 이 정도로 국한하십시다. 또 한 사람, 아내 사래입니다. 본문 17절을 다시 한 번 복기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이 본문에 사래의 ‘일’이라고 번역된 ‘일’은 히브리어 ‘다바르’의 번역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일’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래 이 단어는 ‘말/말씀’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랍비 문서에는 그래서 사래가 무언가는 ‘말’했다고 해석합니다. 하경택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래의 말이 누구에게 향하였든지 야훼 하나님의 개입이 사래의 말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보는 점이 중요하다.”(하경택,“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1”,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p,208.) 본문에는 사래가 무엇을 말했는지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창세기가 편집될 당시의 여성 인권의 상태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 정황이라고 추측됩니다. 하지만 랍비의 해석까지 동원한다면 사래는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자신이 한 남편의 ‘에제르 크네그도’ 즉 ‘돕는 배필’이었기에 그녀 역시 당대의 권력 앞에서 목숨을 걸고 바른 소리를 해야 했을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하게 합니다. 역시 아브람의 비겁한 신앙은 사래에게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힌 것입니다. 종합해 보겠습니다. 아브람의 비 신앙적 행위로 인해 객관적 타자들이 피해를 당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설교를 통해 우리가 담아야 하는 신학적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바로 서지 못하면 타자에게 피해가 감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도로 살아가는 나의 비겁한 비 신앙적 행위로 인해 나의 이웃이, 나의 지인이, 나와 관계한 그 어떤 이가 고통을 당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회퍼 목사의 일침은 황금율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는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다.” 그렇다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그 답을 저는 10절에서 찾고 싶습니다.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 땅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약속하셨기에 반드시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땅이었다는 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12:4절에서 중요한 레마를 받았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의 승부수는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탁월하고 귀한 신앙적 선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이렇게 던진 승부수를 끝까지 가나안에서도 유지해야 했습니다. 허나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아브람은 이 은혜의 여정을 지속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눈에 닥친 기근이라는 고통의 터널을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이 고통을 떨쳐버리기 위해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에서 이탈한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땅에서 하나님이 배제되는 우상의 땅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로 돌아간 것과 다를 바 없는 불신앙적인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망각하고 잊어버리자 아브람은 세상의 방법이 커보였습니다. 당연한 처사인지 모릅니다. 본문 11-13절이 오싹하게 합니다.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가짜는 진짜를 이기지 못합니다. 세상의 방법들은 가짜를 이용하여 진짜를 흉내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짜는 가짜지 진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래는 아내였지 누이가 아니었는데 이 엄연한 명제를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아브람이 틀어버린 것입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입니다. 신앙인이 잘못되는 시작은 가짜를 진짜라고 둔갑시키는 일에 눈감을 때 시작됩니다. 진짜를 가짜라고 강요할 때 신앙은 일그러집니다. 왜 이런 무모한 시도가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믿음 하나만을 붙들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온 아브람이 그 믿음을 버리고 애굽으로 내려 간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이탈되면 그 순간부터 불행해 집니다. 아내를 버리고, 자신의 안일만을 생각하는 극단의 이기주의에 빠진 것입니다. 진짜를 가짜로 둔갑시키는 진리의 왜곡을 서슴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라지고 자기만 본 것입니다. 결국은 아브람은 하나님 없는 상태에서 영적인 피폐와 망함을 경험하고 맙니다.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구약성경 룻기 1:1-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룻기를 시작하는 프롤로그입니다. 그냥 아무 생각이 없이 이 본문을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룻기 1:1-5절 안에는 어마어마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본인들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먹고 살기 위해 이방 땅인 모압으로 이주합니다. ‘베들레헴’이라는 단어는 ‘떡집’이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떡집을 떠난 것이 비극의 시발이었습니다. 기근이 들었다고 떡집을 떠난 엘리멜렉의 가정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일 먼저는 엘리멜렉이 타향에서 죽습니다. 이어 두 아들이 장가를 간 뒤에 아버지처럼 죽습니다. 졸지에 나오미, 오르바, 룻이라는 여성 3명은 과부 신세가 됩니다. 살라고 왔던 땅에서 비참한 죽음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모압에서 더 이상 살 의미가 없어진 나오미는 우여곡절 끝에 두 자부 중에 둘째였던 룻을 데리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룻기를 기록한 신명기 역사서 기자는 그때의 상황을 아주 의미 있는 구절을 룻기 1:22절에 남겨놓았습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나오미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귀환할 때의 배경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보리 추수를 시작할 때였다고. 하나님이 제정하신 땅, 베들레헴의 흉년은 일시적인 흉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땅은 하나님이 풍성하게 하시는 땅입니다. 흉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일시적인 일입니다. 아브람의 패착은 가나안을 떠난 것입니다. 가나안을 떠난 비극은 아내를 잃어버릴 뻔한 비극과 자신의 믿음을 초개와 같이 버린 불신앙적인 행태로 발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는 영적으로 비겁한 자가 되는 법입니다. 주석을 보다가 아주 가끔 경악할 만큼 엉터리로 주석한 글들을 보게 되는 그때마다 아연실색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복음적이라고 말하며 정통 개혁주의자이기에 아주 뛰어난 캘빈주의자로 정평이 난 존 맥아더가 쓴 창세기 12:10절의 글을 읽다가 대단히 유감스러웠습니다. “기근은 가나안에서 드물지 않게 일어났다. 족장 시대에도 양식이 크게 부족한 때가 한 두 차례 더 있었다. 기근이 심하고 시기도 좋지 않다보니 아브람은 약속의 땅에 들어와 옮겨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식이 대체로 풍요로운 애굽으로 이주해야 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기에 상황이 극도로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우르로 돌아가지 않았다.”(존 맥아더, “맥아더 성경주석”, 아바서원,p,71.)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기에 우르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맥아더 목사의 해석보다 더 정확한 해석이 있습니다. 베스터만은 이 대목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적어도 여기서는 아브람이 믿음의 사람이 아님이 분명하다.” (C. 베스터만, “창세기주석”, 한들출판사, p,166.) 담임목사는 클라우스 베스터만의 해석에 100% 동의합니다. 주목할 교훈을 다시 새기겠습니다. 올바른 믿음이란 나 혼자의 유익을 위해 비겁하게 타협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렇게 권면한 것은 정답입니다. 누가복음 9:6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기를 문제로 여기고, 자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기 비판적인 사람은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습니다.” (김기석, “모호한 삶 앞에서”, 비아토르, p,177.) 오늘 설교를 통해 한 가지는 놓치지 마십시다. 비겁한 신앙은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움직이는 종교적 활동이라는 것을. 마치 본문의 아브람처럼.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나’ 중심이 아니라 ‘너’와 ‘그’ 중심으로 신앙의 삶을 바꾸어 나가면 적어도 나로 인해 타자가 피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명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인교회 성도들이 비겁해서야 되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