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5일 수요 저녁 기도회 (창세기 마흔 일곱 번째 강해) 본문: 창세기 12:4-6 제목: 따라갔고 서론) 우리는 흔히 롤 모델이라는 단어를 종종 사용합니다. 나보다 앞서간 사람 중에서 내가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따라가겠다고 결정하면 그를 롤 모델로 삼는 경우가 일반의 상식입니다. 제가 이재철 목사를 목회자의 롤 모델로 삼았던 계기는 2000년에 장신대신대원에서 실시된 신앙사경회에서 이 목사께서 행하셨던 설교를 들으면서였습니다. 내용 중에 이런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 목사께서 예장 통합 측 목사로 사역할 때, 총회장을 역임한 선배와 함께 같은 차에 동승하고 지방에 내려가게 되었는데 그 길에 선배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 목사, 차를 타고 먼 거리를 여행할 때 멀미를 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네. 그건 차가 오른쪽으로 쏠리면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이고, 왼쪽으로 쏠리면 왼쪽으로 몸을 움직이는 거지. 사람이 사는 것도 매일반이야.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지혜라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지?” 목사의 세계에서 대쪽 같은 이미지로 별로 타협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많은 사람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받던 이재철 목사께 적당히 타협하며 살라는 그것이 성공하는 방법이라는 노하우를 사판 목사가 알려준 것입니다. 그날 이 목사께서 그 어른 선배에게 이렇게 답변했다고 했습니다. “목사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충분히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냥 제 길을 걷겠습니다.” 결국 이재철 목사는 그렇게 타협할 줄 모르는 삶을 살다가 본인이 소속하고 있었던 교단에서 출교를 당하는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저는 그때부터 이재철 목사를 목회의 롤 모델로 삼기로 했습니다. 이후 그분의 목양의 정신과 목사로서의 자세를 배우려고 노력했고 그분의 설교까지도 벤치마킹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존경하는 목회자를 직접 만난 일은 제가 섬기던 바른 교회 아카데미에서 ‘멘토’를 찾아서라는 프로그램을 실시했을 때였습니다. 그 프로그램의 팀장의 역할을 제가 맡았기에 100주년 기념교회를 방문했고, 그분과 인터뷰를 하면서 대면하여 이 목사님의 삶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 목사께서 제게 해 주셨던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나름 존경하는 멘토이자 목회자의 롤 모델이었던 이 목사님을 직접 만난다는 이유 때문에 적지 않게 흥분하였고, 인터뷰 시작하면서 제 소회를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은 저의 멘토이십니다. 목사님을 직접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 이 목사께서 제게 이렇게 충고하셨습니다. “이 목사님, 제가 목사님의 멘토라고 했는데 한 마디만 조심스럽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누군가의 멘토가 될 만한 소향을 갖고 있는 목사도 아니거니와 인생 선배로, 같은 목회 동역자로 도움이 될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목사님,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멘토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정신이 들었습니다. 이후, 이재철이 제 멘토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저는 이재철 목사님을 더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보기에는 아주 평범한 것 같지만 말씀 안에 담겨 있는 교훈이 실로 엄청난 은혜가 녹아 있는 본문입니다. 지난 설교에서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데라와 아브람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하란에 이르러 정착을 했다고 했습니다. 허나 하란에서 아버지 데라가 죽고, 이미 동생인 하란을 우르에서 잃었던 아브람은 막내 나홀까지 그곳에서 사라지는 가족 붕괴를 경험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 아브람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정황은 불행했지만 사람들이 거주하기 좋은 하란에서 아브람은 정착을 꿈꿨습니다. 그랬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신 주님은 가나안으로 가려던 꿈을 접고 하란에서 평이(平易)한 삶을 살기 원했던 아브람에게 지난 주 수요일에 말씀드린 대로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명하신 것입니다. 이 명령을 접한 아브람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기사가 본문입니다. 본문을 다시 봅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정황을 잠시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지자 아브람은 하란을 떠났다고 본문 기자가 설명합니다. 주목할 것은 5절의 메시지입니다.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하란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단이 아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터치바이블 대표인 김진산 박사의 글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결국 아브람은 우르보다 조금 부족해 보였을지라도 나름 풍성한 도시였던 하란에 정착했다. 그는 곧 도시의 안온함에 빠져 들었다. 이 도시야말로 그들의 가족이 정치적인 피로(수메르 초기 왕조 → 아모리 왕조 → 고대 바벨론 → 아카드 제국 → 우르 제 왕조 → 고대 앗수르)로부터 휴식을 얻고 안정적으로 정착할만한 곳이라고 여겼다. (중략) 아브람은 고대 큰 도시였고 물산이 풍성했고, 무엇보다도 그에게 도시적인 안정감을 주었던 하란에 정착했다. 결국 새로운 기회의 도시인 하란에서 다시금 인생 성공의 길을 열었다.”(김진산, “역사와 지리로 만나는 성경이야기”, 이야기 북스, pp,27-28.) 새로운 인생 성공의 길을 열었다는 의미는 하란에서 아브람이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부를 창출하며 누렸음을 암시해주기에 충분한 자료입니다. 추측하기로는 아버지 데라의 유업이었던 우상에 관련된 일을 이어감으로 얻은 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렇게 하란에서 나름의 평온함에 빠질 그 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오셔서 그에게 미션을 주신 것입니다. 하란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 기록한 창세기 기자의 이 보고는 그래서 의미가 있어 보이는 기록입니다.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 이것을 버리고 떠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작고한 하용조 목사께서 이 부분을 강해한 글을 읽다가 적절하게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어 인용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휴게소에서 살면 안 됩니다. 목적지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향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을 가야 합니다. (중략) 우리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도중하차입니다. 즉 잠깐 쉬어야 할 일을 영원한 것처럼 여기고, 가는 목적을 잃어버리고 변경하는 것입니다.” (하용조,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라-창세기 강해 2, 두란노,pp,237-239.) 저도 동의합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드디어 아브람이 조카 롯을 데리고 하란을 떠나 가나안 장도에 오릅니다. 이때 아브람의 나이는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7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였습니다. 그렇게 미지의 땅으로 떠났던 아브람이 제일 먼저 팔레스타인에 입성하여 정착한 땅이 세겜이었음을 본문 6절이 증언합니다.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세겜은 우리들에게 아주 익숙한 땅입니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해지기 전까지 고대 이스라엘의 수도 역할을 할 정도로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것은 이 세겜에 아브람이 들어갔을 때, 이미 가나안 사람이라고 지칭되던 족속들이 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아브람에게 두려움이 근간이었을 것입니다. 하경택 교수의 말을 들어보십시다. “아브람이 도착한 땅은 빈 땅이 아니었다. 가나안인들이 살고 있었던 땅이다. 이러한 본문의 진술은 우리에게 다시금 약속과 성취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약속과 성취는 긴 역사의 과정 끝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고 그 땅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다. 약속의 땅을 실제로 얻기까지는 약속을 믿고 따라가는 믿음과 순종의 삶이 필요하다.” (하경택,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1”,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p201.) 무슨 말입니까? 아브람이 들어갔던 그 땅에는 곳곳이 지뢰밭이었다는 말입니다. 가나안 땅은 아브람에게 떠 받쳐 갖다가 주는 장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람은 그 땅을 향해 갔습니다. 시쳇말로 무슨 배짱으로 모험을 시도했을까요? 4절 본문에 그 답이 있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크게 보여야하는 구절입니다. 아브람이 적지 않은 시련과 낯섦이 있는 땅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아브람이 따라갔던 것이 땅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에 하나, 땅이라는 개념을 바라보고 갔다면 아브람은 출발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겜이라는 땅보다는 하란이 훨씬 편안하고, 이익이 되고, 부담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란에 비해 턱없이 불편하고, 힘든 장소였던 팔레스타인의 세겜으로 아브람이 식솔들을 데리고 들어간 이유는 다시 강조하지만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지난 주 수요일에 보았던 12:1-3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오늘 새벽에 우리는 누가복음 1:57-66절을 근거로 큐티를 했습니다. 세례요한의 탄생 이후 친족들이 귀하게 얻은 아들의 출생을 축하하며 이름 짓기를 시도합니다. 당연히 친족들의 이름 짓기는 아버지의 이름이었던 사가랴를 대를 이어 지어야 한다고 여론화했습니다. 그런데 모친인 엘리사벳도, 부친인 사가랴도 공히 요한이라고 이름을 지을 것을 공언합니다. 여론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부모가 이렇게 뜻을 같이 할 수 있었습니까? 그 근거는 누가복음 1:13절에 있습니다.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하나님이 명명해 주신 이름 ‘이오안네스’ 즉 ‘요한’이라고 지으라는 말씀에 부모들이 순종한 것입니다. 아침에 교우들에게 이렇게 전했습니다. “신앙인들이 지켜야 하는 우선순위는 세상의 여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식 즉 말씀이다.” 사람은 누구나 위기의 때를 경험합니다. 위기가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공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위기를 돌파하는 방법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사람들과 확연히 다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두 인물을 통해 생각해 보십시다. 먼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을 추적해 보십시다. 사울에게 있어서 애증의 대상이었던 사무엘이 열조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상황은 더 위급해졌습니다. 블레셋의 침공 위기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이전 블레셋의 공격 때에는 사무엘이 옆에 있어서 위기를 극복했는데 이제는 사무엘이 없습니다. 마음이 급해진 사울은 죽은 사무엘의 영혼이라도 불러내 본인에게 임한 위기를 극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이윽고 사울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사무엘상 28장에서 역사가는 소상히 보고합니다. 사무엘상 28:7절입니다.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엔돌에 살고 있는 무당을 통해 죽은 사무엘을 만나고자 했던 사울을 봅니다. 또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다윗입니다. 다윗이 자기 식구들과 따르던 부하들의 식솔들을 나름 안전한 장소라고 여겼던 시글락에 맡겨두고 블레셋에 머물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던 사울의 살해 위협을 피해 정치적인 망명이라는 이름으로 블레셋에 피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헌데 블레셋의 왕이었던 아기스의 도움을 받고 피해 있었던 다윗에게 시련이 닥칩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놓인 다윗은 난처해졌는데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다윗을 이 전쟁에 관여하지 않게 하셨고 자기들의 가족이 있는 시글락으로 돌아가게 되는 행운까지 얻게 하십니다. 그러나 새옹지마라고 했나요. 다윗은 바로 이 시글락에서 더 큰 위기를 맞습니다. 다윗이 없다는 것을 안 아멜렉 족속이 다윗에게 당한 분풀이로 복수를 하기 위해 다윗의 두 아내는 물론 시글락에 있는 모든 여인들을 다 포로로 끌고 갑니다. 다윗에게 어처구니없는 위기가 봉착한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문제는 이런 위기를 자초한 당사자가 다윗이라는 여론이 형성되어 시글락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책임을 물어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는 여론이 형성 되었다는 점입니다. 일촉즉발의 위기가 다윗에게 임한 것입니다. 이때 다윗이 이 위기를 헤쳐나간 방법이 사울이 엔돌의 무당을 찾아간 사건과 불과 사무엘상 2장 차이에 기록되어 있어 극단의 비교를 하게 해줍니다. 사무엘상 30:6-8절입니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가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의 식을 찾은 사울은 몰락하고 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을 따라간 다윗은 아멜렉에게 빼앗긴 여인들을 구출하고 자신도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오늘 본문 설교를 통해 우리들이 심비에 새겨야 하는 교훈을 이렇게 교통정리 하겠습니다. ※ 그리스도인들이 따라가야 하는 것은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다시 4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그렇습니다. 아브람이 따라간 것은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 기록된 말씀으로 비추어 볼 때 창세기 저자의 천재적 표현 방법이 보입니다. 아브람은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차적인 기록이 이렇습니다.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롯의 앞날이 영적으로 평탄치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들게 하는 메시지입니다. 롯이 따라간 것은 아브람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삼촌이었던 사람 아브람이었습니다. 롯을 통해 주는 영적 교훈도 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복을 받는 승리의 주인공이 되려면 사람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제가 철이 없었던 젊은 목사 시절에 목사이자 사람인 이재철을 멘토로 삼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처럼 롯도 사람을 따라갔습니다.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신본중심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견지했다면, 롯은 전형적인 인본주의적인 신앙인이었다고.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2022년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펜데믹 3년차로 접어들었습니다. 또 겪어야 하는 아픔입니다. 오늘 국민일보 미션 란에 아주 의미 있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조광현 고려신학대학원 교수와 조철현 고신대 교수가 최근 발표한 논문 ‘청중이 느끼는 온라인 설교와 현장 설교의 차이점에 관한 연구’에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 담겨 있다. 연구진은 서울의 A교회, 경기도 안양 B교회를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이들 교회에서 각각 현장 설교와 온라인 설교를 들은 성도 183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설문 결과를 보면 5점 만점을 기준으로 했을 때 온라인 설교에 대한 만족도 점수는 2.02점으로 현장설교 점수 4.60점에 비해 크게 낮았다. 세부적으로 살폈을 때도 모든 항목에서 현장 설교가 더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가령 ‘설교 내용 이해’ 항목에서 온라인 설교를 들은 성도가 매긴 점수는 3.67점이었으나 현장 설교에 참석한 이들이 준 점수는 4.13점이었다. ‘설교자의 열정’ ‘설교자의 전달’ 등의 항목에서도 현장 설교 점수가 훨씬 높았다. 점수가 가장 크게 벌어진 항목은 ‘예배 환경’이었다. 대면예배의 경우 이 항목 점수는 4.41점에 달했으나 온라인 설교의 경우 겨우 2.82점을 기록했다. 온라인 설교의 단점으로 가장 많이 나온 응답은 ‘설교에 집중하기 어렵다’(24명)는 거였다. 응답자들은 “설교 도중 딴 짓을 하게 된다”거나 “차량의 소리 등 방해되는 요소가 많다”고 답했다.” (국민일보 1월 5일자 미션 란에서) 이 글을 읽다가 이런 뼈아픈 소회가 임했습니다. “펜데믹이 몰고 온 가장 아프고 두려운 재앙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배를 무시하여 말씀의 능력에서 멀어지게 하는 무감각이다.” 결국은 그리스도인이 싸워야 하는 전쟁의 내용은 말씀 싸움입니다. 별 말로 위로를 하고, 별 말로 합리화를 하고. 별 말로 자기변명을 늘어놓지만 결국 그리스도인의 승패를 가르는 제일 원인은 말씀을 따라가는가, 아니면 따라가지 않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가지 않으면 사람을 따르게 될 것이며, 여론이라는 세상의 식에 무방비로 공격당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브람이 될 것입니까? 아니면 롯이 될 것입니까?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