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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느헤미야가 느헤미야 했다.(1)2024-03-07 17:10
작성자 Level 10

2023년 5월 7일 주일 오전 설교 (느헤미야 강해 13)

 

본문느헤미야 5:1-13

제목느헤미야가 느헤미야 했다.(1)

 

서론)

 

신학대학교 학부에 다니던 아들이언젠가 제게 아주 우울한 얼굴을 하고 이렇게 말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아버지서울신학대학교에 입학해서 정말 힘든 것은 아버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만날 때마다 던지는 이야기입니다어느 날 교수님 한 분이 제게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렇게 말했어요너 혹시 제천에서 목회하는 이강덕 목사 아들이지? 그렇지? 똑같이 생겼다고  맗씀하셨습니다. 당황하며 그렇다고 말하자 제게 돌아온 답은 아버지다운 목회자가 되라는 당부였습니다한 두 명이 아닌 참 많은 사람으로부터 이강덕 목사 아들답게 훌륭한 목회자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는 당부였습니다교수님들이 정말로 저를 아껴주시고 관심을 갖고 계셔서 제게 해 준 말이지만저는 답게라는 말이 너무 힘들고 부담스러웠어요.”

아들의 무거운 이야기를 듣고 한편으로 아들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친구들이 고맙고 감사했지만아들이 캠퍼스에서 짊어져야 할 무게감이 적지 않았겠다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떤 한 사람의 정체성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선입관으로 인식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싫든 좋든 적지 않은 부담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이미 그는 그 사람답게 살 것을 압박받고 종용받고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에 우연히 종합 편성의 한 방송국에서 방영된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낳은 최악의 산물인 우생학(eugenics)’에 대해 파헤친 벌거벗은 세계사를 만났습니다.

우생학(優生學)이라는 단어를 네이버 위키피디아 사전에서 찾아보니 이렇게 정의되어 있었습니다.

우생학은 종의 개량을 목적으로 인간의 선발육종을 찬성하는 유사과학이다인류를 유전학적으로 개량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여러 가지 조건과 인자 등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1883년 영국의 프랜시스 골턴이 처음으로 창시했는데우등한 유전자 인간의 증가를 꾀하고 열악한 유전자를 가진 인구의 증가를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정의만 보더라도 얼마나 비인간적비윤리적인 인본주의적 발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종을 서열화시킨다는 발상부터가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날 방송에서 우생학을 지지했던 한 인물이 소개되었는데 대단히 역설적으로 헬렌 켈러였습니다.

삼중의 장애를 갖고 태어났기에 수많은 고난일 이긴 뒤에 약한 자들과 함께 평생을 바쳤던 박애주의자라고 인식되어 있는 그녀가 비록 한시적이기는 했지만 우생학을 지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이었습니다.

왜 제가 충격을 받았을까요?

헬렌 켈러는 헬렌 켈러다워야 하는데 그 반대편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다워야 함은 대단히 어려운 짐입니다.

이미 어떤 한 사람의 전인격에 점 찍혀 있는 다워야 함의 내용은 그 사람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며 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성경과 교회의 역사 안을 들여다보면 이 적지 않는 부담감을 사명으로 인식하고 한 시대를 대단히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본인들의 짐을 감당했던 참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 용기를 줍니다.

신앙적은 측면에서 접근하면 대단히 불편했고영적 부담감이 엄청났을 텐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과 생각에서 이탈하지 않고 묵묵히 그 외롭고 힘든 주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한 주인공들도 즐비합니다.

바로 그 사람 중에 한 명이 우리가 지금 주일에 만나고 있는 느헤미야입니다.

 

본론)

 

우리는 4장 강해를 통해서 산발랏 일당들이 집요하게 느헤미야가 주도하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적지 않은 방해자로 고통을 주었지만 대단히 탁월한 리더십을 통해 느헤미야가 그 위기를 극복했음을 나누었습니다.

오늘부터 공부하게 되는 5장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대 사역을 이룸에 있어서 4장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은 또 다른 하나의 방해들이 등장하는 텍스트입니다.

이 방해들은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결코 녹록하지 않은 위협적인 요소들이었습니다.

1-5절을 자세히 읽어보겠습니다.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 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

1-5절까지의 내용을 분석하면 대체적으로 예루살렘 유다 성벽을 재건하고 있는 포로 귀환 공동체가 세 종류의 어려움에 봉착해 있음을 시사합니다.

⓵ 먹여 살려야 할 부양 식구는 많은 데 땅이 없어서 노동을 하며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부류인데 그마저 어려워 남에게 구걸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⓶ 첫 번째 부류와는 달리 토지가 있기는 한데 때마침 불어 닥친 흉년 때문에 경작이 안 되어서 자신들의 밭과 포도원 같은 부동산을 담보로 식량을 구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⓷ ⓵⓶ 항에 비해 조금은 더 여유로운 상태이지만 국가에 세금을 내기 위해 빚을 내야했던 부류들입니다.

결국 이 세 종류에 해당하는 유다 백성들의 공통분모는 대단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라는 점입니다.

⓵⓶⓷ 모두가 오십보백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이대로 가면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는 절체절명의 고통 호소를 느헤미야에게 토로하고 있다는 것을 5절이 보고합니다.

빚 때문에 자녀를 팔아야 하는 신세저당 잡힌 땅과 밭이 빚을 갚을 수 없어 채주에게 넘어간 고통 등을 호소합니다.

이렇게 1-5절에 적시된 기록들은 산발랏 일당들의 외부적인 공격에 비해 그 강도가 적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느헤미야가 계획한 성벽 재건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상황을 놓고 볼 때 더 치명적인 위기 모드였습니다.

유다 공동체의 내적인 와해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이러했기에 그대로 이 상태를 방치하면 느헤미야 프로젝트는 물거품이 되고 마는 위기일발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이런 위기에 봉착했던 긴박한 상황에 놓였던 느헤미야가 그만이 갖고 있었던 탁월한 영적 리더십으로 이 위기를 타개하는 장면을 보고해 줍니다.

먼저 6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세 부류들의 호소를 듣고 난 느헤미야의 첫 반응은 크게 노함이었습니다.

지난 수요일 본문으로 보았던 창세기 30장 강해에서는 오늘 본문 6절에 번역되어 있는 크게 노함이라는 단어를 이미 살폈던 적이 있습니다.

라헬이 야곱에게 임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 크게 낙담하여 내가 임신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어버릴 거라는 거의 협박성에 가까운 서운함을 내색하자 야곱이 그동안에는 라헬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지만라헬의 이 볼멘소리를 듣고 크게 성을 냈다고 소개했습니다.

창세기 30:2절입니다.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여기에 기록된 성을 내다는 히브리어 하라의 번역이라고 했습니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붉으락푸르락 할 정도로 얼굴에 홍조를 띠는 감정적인 성냄을 의미한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지금 유다 성읍에 살고 있었던 성벽을 재건하고 있는 민중들의 고통을 들었던 느헤미야의 심정이 바로 하라였습니다.

얼굴에 붉은 홍조를 띨 정도로 감정이 격하게 올라와 분노한 것입니다,

이것을 느헤미야 역사서 저자는 크게 노하였다.’고 기술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느헤미야의 격노는 감정적으로 다스리기가 어려울 정도의 분노였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분노한 느헤미야는 단순히 분노하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7-8절을 읽겠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느헤미야의 행동하는 반응은 대단히 단호했습니다.

공동번역으로 7-8절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마음을 억누르며 회의를 소집하여 유지들과 관리들을 모아놓고 어찌하여 한 겨레끼리 돈놀이를 하느냐고 호되게 꾸중을 하였다. "유다인들은 우리와 한 겨레요그 우리의 겨레가 남의 나라에 팔려갔던 것을 우리는 일껏 찾아왔소그런데 그대들은 제 겨레를 또 팔아먹다니우리더러 다시 찾아오라는 말이오?" 그들이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을 보고

공동번역으로 본 7-8절은 오싹하게 합니다.

느헤미야는 지금 어려운 이웃들을 더 어렵게 만든 예루살렘 성읍 안에 살고 있었던 유지와 관리들을 불러 들였습니다.

귀족들과 민장들을 공동번역에서는 유지와 관리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이들을 부른 이유는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가해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먹고 살만한 부가 있었습니다.

이 부함은 또 다른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자양분이었기에 이들은 이 축적된 부를 이용하여 가난한 이웃들을 옥죄었습니다.

송병현 교수의 주석에서 이 당시의 유다 예루살렘의 정황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을 빚을 진 사람들도 있었다당시 연 이율이 보통 20%였는데 최고 40-60%까지 치솟았다고 한다이런 상황 속에서 부유층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합리적인 선에서 돈을 꾸어주며 손을 내 밀었으면 좋았을 텐데 오히려 서민들의 처지를 악용하여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려고 했다사실 율법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금하고 있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창세기 주석”, p, 271)

이런 악한 소위로 인하여 부익부빈익빈이 유다 예루살렘을 강타했고공동체의 선이자하나님께서 바라시고 원하시는 숙원 사업이었던 성벽 재건 사역이 깨질 위기에 봉착하고 만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런 질 나쁜 행위에 대해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해서 귀족과 민장들을 향하여 대노했고 그들을 향하여 오금이 저리는 비수를 던지며 그들의 행태에 대해 강력하게 비토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비토는 단순히 비토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해자들에게 가장 강력한 타격을 가하며 쐐기를 박습니다.

다시 8절입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하나님께서는 억압의 굴레에 있는 유다 민족을 극적으로 구출하여 예루살렘에 돌아오게까지 했는데 다시 귀족과 민장들은 자기들의 악한 소위로 인해 아픈 자들에게 고통을 줌으로서 그 억압의 굴레로 쳐 넣으려고 한다고 느헤미야는 그들을 맹공 하였습니다.

느헤미야의 강력한 권고는 더없이 매서운 역사적 성찰을 근거하여 행한 멘트였기에 귀족과 민장들이 보인 반응은 고개를 숙이는 것뿐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느헤미야는 상황의 반전을 확신하고 고삐를 늦추지 않고 다음과 같이 강력하게 교통정리를 합니다.

이어지는 본문 9-11절을 봅니다.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치자 그런즉 너희는 그들에게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너희가 꾸어 준 돈이나 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 하였더니

느헤미야는 대단히 구체적인 시행세칙을 발표합니다.

ⓐ 담보로 잡혀 있는 부동산의 반환

ⓑ 이자 지급의 면제

ⓒ 모든 빚의 탕감

종합해보면 느헤미야는 혁명과도 같은 요구를 귀족과 민장들에게 요구한 것입니다.

이런 요구에 대해 있는 자들이었던 귀족들과 민장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마지막으로 살펴보십시다.

본문 12-13절입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기로 내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그 말대로 행하겠다고 맹세하게 하고 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

적어도 이 구절을 읽으면서 목사인 저는 대리만족의 쾌감을 느낍니다.

아멘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영적 권위를 체감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의 서슬이 시퍼런 명령이 떨어지자 귀족들과 민장들은 즉각적으로 느헤미야의 요구에 순종하기에 이릅니다.

앞에서 요구한 세 가지 모두를 그대로 수용하기로 합니다.

수용뿐만이 아니라 제사장들 앞에서 공증까지 받습니다.

엄청난 물러섬이요순종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느헤미야 입장에서는 손뼉 치며 박수해야 합니다.

헌데 본문 마지막 절을 접하다보면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비장함까지 느끼게 하는 결기를 느헤미야에게서 엿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 앞에서 맹세하며 번복하거나 변질되지 않겠다고 공증까지 선 귀족과 민장들에게 자신의 옷자락을 터는 퍼포먼스를 보입니다.

그 이유는 만에 하나오늘 제사장 앞에서 약속한 이 약속을 어기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재산을 이렇게 털어버려 빈털터리가 되게 할 것이라는 상징적 쐐기를 박기 위해서였습니다.

본문 해설을 듣고 났는데 여러분은 마음이 어떠하셨습니까?

느헤미야의 반응과 액션에 대하여 어떤 느낌이 드셨습니까?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싶으십니까?

무슨 결벽증 환자인가?

너무 가난한 자 쪽으로 기울어진 편향된 운동장은 아닌가 따지고 싶으셨습니까?

뭐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설교 제목으로 이렇게 정했습니다.

느헤미야가 느헤미야 했다.”

언어의 유희로 설교 제목을 이렇게 정한 것이 아닙니다.

설교 제목은 대단히 강력한 영적 통찰을 제시하기 위함입니다.

 

※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만 주목하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교훈을 주고 싶었습니다.

 

느헤미야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위로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위로의 주체자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은 자가 느헤미야입니다.

그러므로 느헤미야가 느헤미야 했다는 문장 메시지는 느헤미야는 사람들의 위로눈치타협에 굴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왜 그랬습니까?

느헤미야가 유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위대한 전 역사를 감당하려 했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하시는 분이시지 사람이 나를 위로하는 존재가 아님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행하는 사역이 아님을 분명히 확신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지는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작품인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일하심만을 주목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목회를 하는 목사에게 대단히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감동이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느헤미야를 하자 일어난 영적 기상도가 제게는 어마 무시한 감동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8절 2f)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기로” (12절 1f)

오늘의 목회 현장에서 목회자가 무언가 사역 지침을 내리면 꿈쩍도 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자꾸만 목회자들은 교회 분위기를 신자들의 귀에 달콤한 소리를 들려주는 기형적 형태로 변질시켜 가고 있습니다.

기실또 그렇게 목회를 하는 목사는 신앙적 포플리즘에 빠져 거기에 기생하며 빌붙어 사는 종교인들에게 대우 받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목사들에게 주 만 바라보라는 신앙적 본질 회복 메시지는 박물관에서나 찾을 수 있는 소리가 되고 말았고거기에 익숙해져 있는 신자들은 본인들의 신앙적 거리두기 안에서 아멘 할 내용들만 찾고 있는 괴물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 안을 들여다보며 하나님이 찾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른 아닌 이 땅의 느헤미야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에게 위로 받기 위해 목숨을 건 자들이 아니라하나님에게만 위로 받기를 소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주님은 찾고 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소리에 아멘 하고 본인들이 영적으로 일탈한 것들은 버리기로 결심한 자들자신들이 순종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머리 숙여 회개하고 잠잠히 떨 수 있는 자들을 하나님이 찾고 계십니다.

나는 우리 세인 교회의 지체들이야 말로 하나님에게 위로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고백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이제 저는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 토요일에 이요한 전도사의 결혼 예식이 은혜 중에 진행되었고또 은혜 중에 마쳐져서 감사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결혼 예식 중에는 양가 부모님들에게 신랑 신부가 인사를 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순서에 따라 아들과 며느리가 저희 부부에게 인사를 하는 시간제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랐던 일이 있었습니다.

제게 엎드려 아들이 절을 하는 바로 그 시간그 아들은 바로 저였습니다.

그 자리에 불과 34년 전에 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제 아들이 그 자리에 섰습니다.

며느리가 고개를 숙여 절을 하는 그 자리에 불과 34년 전에 제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 자리에는 제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독서여행 텍스트였던 한강의 희랍어 시간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감각되는 것은 시간입니다거대한 물질의 느리고 가혹한 흐름 같은 시간이 시시각각 내 몸을 통과하는 감각에 나는 서서히 압도됩니다.” (p,39)

또한 한강은 이렇게 읊조립니다.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적어도 이 세상에는” (p,121)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영원합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는 영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한 가지는 선택하십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해야 할 일에서 흔들리지 마십시다.

여타 다른 것에 기웃거리지 마십시다.

느헤미야는 느헤미야 했기에 오늘도 그는 우리에게 느헤미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주 만 바라볼찌라